1886년 5월, 臨北面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이 東後面 佳流村에 있는 자신들의 先山에 다시 偸葬한 朴勗伊 등을 엄히 다스리고 그 묘소를 즉시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安東府使에게 호소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886년(고종 23) 5월, 臨北面(지금의 안동시 임동면)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의 全州柳氏가 安東府使에게 올린 上書로 그 내용은 그들의 先山에 또다시 偸葬한 朴勗伊이라는 자가 엄히 처벌하고 그 묘소를 즉시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 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상서는 지난해, 즉 1885년 10월에 전주유씨의 선산인 安東府 東後面 佳流村(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류리) 뒷산 안의 白虎脈에 朴勗伊이라는 자가 투장을 하여 소송을 제기한 사실부터 언급하고 있다. 이 소송에서 안동부사는 양쪽 모두에게 원망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지형지세를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잰 결과 투장한 묘소를 빨리 이굴해가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박욱이이라는 자가 관청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고서 지난해에 투장한 묘소에 봉분을 쌓고 심은 떼를 대충 허물고는 거기에 아주 가까운 곳에 다시 묘소 하나를 투장했다. 이에 전주유씨들은 사사로운 감정이 심하게 일어나 분하고 아픈 마음을 이겨내기가 더욱 심해 갈수록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안동부사가 공무로 서울에 올라간 때를 타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박욱이라는 자는 법을 무시함이 참으로 심하다고 전주유씨들은 고발하였다. 박욱이는 이전에 투장한 묘소를 오히려 알아보지 못하게 하니 남의 묘소를 침범하는 습관이 이미 극에 달하였는데, 안동부사가 관아를 비우고 상경하는 날에는 한층 더할 것이라고 전주유씨들은 예상했다. 만약 조금마한 틈이라도 있을 같으면 옛날에 투장한 묘소를 파내어갈 뜻을 버릴 것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며, 새롭게 투장한 묘소가 점차로 경계에 가깝게 들어오는 것은 과연 무슨 조짐이겠는가하고 전주유씨들은 되물었다. 박욱이의 이러한 일을 처음부터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전주유씨 자신들은 사사롭게 선조의 묘소를 보존할 수 없을 뿐이지만, 花山(안동의 옛 지명)이라는 큰 고을에 공적인 법과 관청의 명령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투장을 일삼는 박욱이와 朴萬俊을 엄한 杖刑과 통렬한 다스림으로 이전과 새롭게 투장한 묘소를 하루 빨리 이굴해가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전주유씨들이 안동부사에게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1885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주유씨들이 암행어사와 안동부사에게 각각 두 번씩 올린 상서에 따르면, 박욱이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전주유씨의 선산에 투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산에 있는 오래된 무덤을 파서 삭은 뼈들로 장사를 지내고, 봉분에는 떼를 입혀 새 흙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처럼 오래된 무덤으로 가장하여 장사를 지낸지가 8년이나 되었다고 하며, 1850년에 투장한 묘소와 연관 지어 자신들이 대대로 장사를 지낸 온 곳인 것처럼 주장했다. 이에 전주유씨들은 암행어사와 안동부사에게 즉각 상서를 올려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투장의 배후자로 지목되는 박만준으로부터 侤音까지 받았다. 그 고음에 따르면 박만준은 전주유씨의 선산에 있는 묘소로부터 150步가 떨어진 곳에 묘소를 써서 투장한 것을 시인하고, 12월 안으로 이굴해가라는 관청의 판결에 응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불과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다시 투장의 시비가 일어났다. 왜 이렇게 묘소를 두고 잦은 시비가 일어나는가는 이 상서에서 전주유씨들이 "새롭게 투장한 묘소가 점차로 경계에 가깝게 들어오는 것은 과연 무슨 조짐이겠는가?"라는 물음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짐은 바로 산림에서 나오는 이익을 차지하겠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산림과 천택은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山林川澤與民共之]"라는 이념 아래 원칙적으로 산림의 사적인 점유에 대해 강력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산지의 소유는 단지 묘지를 근거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묘지를 통해 산지를 소유한 자는 그 산의 산출물, 즉 즉 땔감, 목재, 흙 등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박욱이가 투장을 하려고 하고, 전주유씨들이 투장을 막으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렇게 묘소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원이 되자 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관리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마구 침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소유임을 인정받지도 못한다. 묘소를 통해 산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養山과 禁山을 통해 관리를 하고, 墓直이나 墓戶를 두어 타인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로 올수록 산림의 소유권은 자신이 점유한 산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이용을 배제할 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박욱이가 사대부인 전주유씨의 선산에 투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이전에 올린 여러 상서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가 관아의 관노와 사령 가운데 우두머리로 지역에서 나름의 세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산림이 서로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의 근거가 되는 묘소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경우에 보는 것처럼 판결이 나고서도 또다시 같은 곳에서 같은 시비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이번의 상소에 대해서도 "이전에 매장한 묘소는 지난달에 파서 옮겨가서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고, 새롭게 매장한 묘소는 당연히 지형을 헤아려서 결정하여 처리할 것"이라는 신중한 題音을 내렸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전주유씨와 朴勗伊 사이에 있었던 山訟이 새롭게 시작되는 첫 번째의 것이다. 그러나 전주유씨의 선산인 安東府 東後面 佳流村 뒷산에 대한 소송은 1850년과 1885년에 이어 벌써 세 번째이다. 이 소송에서 있었던 상서와 소지, 그리고 侤音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조선후기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산송의 전말을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문서연구』33, 「조선후기 산송과 상언‧격쟁」, 김경숙, 한국고문서학회, 2008
『東方學志』77, 「조선후기 山訟과 山林 所有權의 실태」, 김선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