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2월, 安東府 臨北面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致覺 등이 자신들의 先山에 朴尙文이 偸葬한 묘소를 移掘해 가도록 하고, 그를 처벌해 줄 것을 暗行御史에게 호소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850년(철종 1) 2월, 臨北面(지금의 안동시 임동면)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致覺 외 38명이 연명하여 암행어사에게 올린 상서로 그 내용은 자신들의 先山 아래에 살면서 그 곳에 투장한 朴尙文을 처벌하고, 그 묘소를 移掘해가도록 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 상서에 따르면 그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유치각 등이 일가를 이룬 全州柳氏 水谷派의 선산은 安東府 東後面 佳流里에 있으며, 그 곳에는 대사간을 지낸 柳正源의 부인인 淑夫人 宣城李氏의 묘소가 있었다. 그런데 옛날 재실의 노비였던 박상문이란 자가 몇 해 전에 숙부인의 묘소에서 백호맥을 압박하면서도 곧바로 쏘아보는 곳에 자기 어머니의 묘를 몰래 썼다. 그래서 그들이 기소를 하려고 하자 박상문은 하루 빨리 파내어 가겠다고 하기에 특별히 옛날 재실의 노비였고 애걸하는 모습이 가련하여 그 기일을 늦추어 주어 땅을 골라 이장해 가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금년 봄, 즉 1850년의 봄에 일가의 형제를 숙부인이 묻힌 산 안에 葬事를 지내려 하는데, 상문이란 자가 마땅히 파내어 갔어야 할 묘소를 근거로 도리어 산의 주인 행세를 하며 자신들로 하여금 묘소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묘소를 쓰기 위해 지세를 알아보는 날에는 온갖 이치에 어그러진 행동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묘소를 쓸려고 했던 자리에 그 질녀의 시신을 몰래 가져다 묻었다. 그런데 그 곳은 자신들이 임시로 장사를 지내기 위해 혈 자리로 보아두었던 곳이었다. 또한 저들은 무리들을 널리 모아 상여를 두드려 부수는가 하면 상복을 찢기도 하며 장사를 지낼 棺을 그 산 안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禮를 차리지도 못하고 길가에 장사를 지내게 되어 원통하다고 호소했다. 이 일로 해서 먼저 이웃 고을의 수령에게 호소하고, 그 다음에는 안동부의 부사에게 호소하면서 이미 山麓圖를 제출하여 엄한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상문은 방자하고도 대담하게 투장한 묘소들을 파내어 가라는 판결에 대해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는 나라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명분을 파괴하니 암행어사 합하께서 가장 먼저 징계해야 할 자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안동부의 옥중에 있는 박상문에게 추상같은 위엄을 보이고, 죽을 만큼의 장형을 더하고 난 뒤 투장한 두 묘소를 당장 파내어 가라는 처분을 특별히 내려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상서는 조선의 3대 소송 중의 하나라고 하는 山訟과 관련된 것이다. 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번이 세 번째의 소송이다. 첫 번째는 안동부를 함께 다스리던 이웃 고을 수령에게 소송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관리가 교체하는 시기로 전임 안동부의 부사가 떠나고 새로운 부사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동부사의 부임과 함께 낸 두 번째 소송의 소지에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소송에서 전주유씨 측이 모두 승소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유씨의 선산에 투장한 것으로 판결된 박상문은 옥에 갇혀서까지 묘소를 파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박상문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移掘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묘소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사실은 첫 번째 소송에서 증거로 제출한 산록도에 그 단서가 있다. 이 산록도를 보면 하나의 산에 세 줄기의 맥이 내려오는데 가운데가 유함진의 선산이 있으며, 그 오른쪽이 박상문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묘지와 근자에 새롭게 쓴 그의 조카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논 한 곳과 人家들, 그리고 작은 개울이 있으며, 두 묘소 사이의 거리는 176걸음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두 집안에서 묘소를 쓴 산의 줄기가 다르고, 또 둘 사이의 거리를 보면 법규상 전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원래 조선의 묘역 범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종친 1품이면 사면 각 100보로 한정하고,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문무관은 10보씩 체감하고, 7품 이하와 생원‧진사 및 유음 자제는 6품과 같으며, 부녀자는 남편의 직에 따른다고 『경국대전』에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주자가례』에서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둔 의례보다는 사대부 공통의 의례를 기본이념으로 하였으며, 또한 지세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산술적 거리보다는 풍수의 지세에 따른 좌청룡‧우백호를 수호의 범위로 삼는 ‘龍虎守護’를 지향하였다. 그 결과 1676년(숙종 2) 3월에 사대부 先山의 용호 내 養山處에 타인이 묘를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용호수호를 법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이어서 영조대에 이르러『續大典』에 정식 법조항으로 확정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의 묘역범위는 현실적으로 200보까지로 확정되고,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법규에 따라 박상문이 쓴 묘소는 전주유씨의 선산 내에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연이은 소송에서 박상문은 패소하고 전주유씨 측이 승소를 한 것이다. 그런데 산록도를 보면 두 묘소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논과 인가, 그리고 개울이 있어 서로의 묘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유씨들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박상문이 자기 집안의 묘소를 근거로 산림의 이용과 소유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두 번의 승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암행어사에게 상소하여 그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박상문의 입장에서 보면 묘소를 이장한다는 것은 그 산림의 이용과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판결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에 있었던 두 번의 소지와 이번의 상서는 외형상으로 보면 철저히 묘소의 자리를 두고 소송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이 상서가 이전의 두 소지와 다른 점은 이 시비를 계층 간의 대립, 즉 서민이 士族을 능멸하는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상문의 신분을 과거 자신의 재실을 관리하던 노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집안을 번성하게 하고 富를 축적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자신들은 궁벽한 시골에 있는 구차한 사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호소는 이 소송이 산림의 소유와 이용을 위한 이익다툼이라는 것을 감출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암행어사는 "들으니 지극히 악독하다. 상세히 조사하여 처결할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어찌 보면 상서를 올린 사람들의 의도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현실적으로 山地의 사적인 점유가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산지의 이용에 있어 공공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산지를 법적으로 소유권을 공인하지도 보장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양반 사대부를 위시한 일반 개인의 墓圍地 또는 養山 등을 둘러싸고 산송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상서 또한 이러한 것에서 기인한 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산송에서 세 번째 訴狀이 되는 셈이다. 이는 산송이 단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소송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산송과 관련해서 본 상서를 포함해 여러 소지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면 산송의 전말을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 상서가 가지는 특징은 여타의 소지들과 다르게 庶民과 士族 간의 대립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상대가 지방관이 아닌 암행어사를 염두에 두고 세운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문서연구』33, 「조선후기 산송과 상언‧격쟁」, 김경숙, 한국고문서학회, 2008
『東方學志』77, 「조선후기 山訟과 山林 所有權의 실태」, 김선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