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3월 6일 觀察使 金道喜가 玉山書院 講堂 落成式에 참석하여 賜額板과 御製祭文板을 講堂에 걸면서 읽었던 告由祝文
1840년 3월 6일 觀察使 金道喜가 玉山書院 講堂 落成式에 참석하여 賜額板과 御製祭文板을 講堂에 걸면서 읽었던 告由祝文이다.
고유문을 보면 고유제를 주관하는 資憲大夫 慶尙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都巡察使 大丘都護府使 金道喜라고 전체 직역과 성명을 밝히고, 옥산서원에 제향된 晦齋 李彦迪에 대한 학문적 위업을 찬양해서 역대 왕들이 사액과 어제 제문을 내렸음을 소개했다. 이어서 본 고유문을 작성하게 된 계기로서 1839년 봄에 있었던 옥산서원 강당 화재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아울러 왕명에 의하여 다시 현판을 걸게 된 사정을 알렸다. 이와 관련해서는 옥산서원에 남아있는『求仁堂重建日記』가 참고가 된다. 옥산서원은 1839년 1월 28일 강당이 소실되자 이를 원내외에 알리고, 경주부와 감영에도 보고하였다. 이후 사림들이 논의하여 강당 중건을 결의하고 경주부와 도내에 건립비용을 분배하는 한편, 재사액을 요청하자는 도내 유생들의 여론이 발의되었다. 이에 경상감사 김도희의 적극적인 협조로 재사액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재사액 현판의 글씨는 조정에서 내려 보내서 경주부에서 판각하도록 하고, 어제제문은 경상감영에서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1839년 11월에 예조서리가 사액현판의 글씨를 가지고 와서 경주부에서 판각한 후 11월 30일에 연액례를 행하고 서원에 사액현판을 보관하였다. 이후 이듬해 1840년 3월 7일 落成式을 거행하면서 그때 사액현판과 어제제문판을 게시하기로 감사와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본 고유문은 그 전날인 3월 6일 오후에 감사 김도희가 옥산서원에 도착한 후 어제제문판을 어서각에 봉안하고, 감사가 고유제를 행하면서 읽었던 축문이다. 당시 고유제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헌관 관찰사 김도희, 집례 前正言 李凝祥, 讀祭文 前承旨 李淵祥, 贊者 正字 崔斗錫, 謁者 正字 申冕鎤, 贊引 前參奉 李愽祥·李鍾祥, 奉香 進士 李源浩·金昺銖, 奉爐 金熙永, 奉爵 李晩應, 奠爵 鄭元永, 司尊 生員 李在伋, 判陳設 洪璧·權大淵·柳道鳳·孫永殯·李能亨, 掌饌 生員 柳致球, 掌牲 李彛祥·李克壽, 內庭東·西唱 李在衍·李在脩, 外庭東·西唱 孫永纘·權承運을 선정하였다. 이어서 의례에 참석한 유생들의 대표인 班首에 李泰元을 차정하고, 의례시 유생들의 질서를 담당하는 序班에는 孫鍾泰·金時益·南驥陽 등을 차정했다. 그 외에 참석한 수령들과 유생들의 공궤를 담당할 典穀有司 3인, 魚肉有司 6인, 支供有司 10인, 鋪陳有司 5인, 酒有司 8인, 南草有司 5인 등을 선발하여 서원 벽에 게시하였다.
3월 7일의 낙성식에는 경상감사와 경주부윤 외에도 인근의 영천·청송·청도·의령·신령·청하·영덕·자인·하양·흥해·영일·장기 등 12개 지역의 지방관들이 참가하였으며, 만여 명의 유생이 참석하였는데 대부분 경주에 거주했으며, 他邑 유생은 976명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白日場을 실시하였는데 8,300여 명이 응시하였다. 감사는 이날 120명을 선발하여 각 試題의 壯元들을 求仁堂 앞에서 직접 시상 하였다. 또한 장원은 『朱子百選』과 『史記』각 1질, 壯紙 2속, 白紙 3속, 붓 3매 묵 5丁을 주었고, 2등 3인은 『雅頌』1질과 동일한 지필묵 주었다. 3등 이하는 壯紙 1속, 백지 2속, 필 2매, 묵 2정을 주었다. 옥산서원에서는 추가로 80명을 선발하여 白紙와 붓, 먹 각 하나씩을 주었다.
자료적 가치
이 제문은 1840년 3월 6일 고유제 당시 사용된 것으로 당시 제례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