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12월 13일 王命으로 慶州府尹 俞章煥이 玉山書院에 致祭를 올리며 읽은 祭文.
1839년 12월 13일 王命으로 慶州府尹 俞章煥이 玉山書院에 致祭를 올리며 읽은 祭文이다. 옥산서원은 1839년 1월에 강당이 소실되는 일을 겪었다. 이후 강당 중건과 재사액이 내려져서 11월 30일에 사액례를 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11월 29일 官下帖이 와서 12월 13일에 致祭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 치제는 재사액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즉 右議政 趙寅永의 요청으로 儒學을 존숭하는 정치를 더하고, 도덕을 숭상하는 의지를 보이기 위하여 道統과 관련있는 인사를 제향하는 9개 서원을 선정하여 致祭를 명령하였다. 이에 영남에서는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는 옥산서원과 퇴계 이황을 제향하는 陶山書院이 선정되었다. 그 외에는 箕子를 제향하는 關西의 仁賢書院, 朱子를 제향하는 海西의 紹賢書院, 鄭夢周를 제향하는 松京의 崧陽書院, 조광조를 제향하는 경기의 道峰書院, 李珥·成渾·金長生을 제향하는 논산의 竹林書院, 宋時烈을 제향하는 괴산의 華陽書院, 宋浚吉을 제향하는 논산의 黔潭書院 등이 있다.
본 제문의 내용 역시 치제가 행해진 날짜와 치제관인 경주부윤 유장환의 성명을 기재하고, 이어서 회재 이언적의 학문연원과 학문의 업적 및 영남과 斯文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이 제문은 왕명에 의하여 藝文館에서 작성된 것이다. 또한 祭需는 경주부에서 갖추도록 했으며, 수령을 禮官으로 차정토록 명하였다. 그래서 경주부윤 유장환이 예관이 되었으며, 그 외에 典禮官 大祝 兼 梁山郡守 李致五, 祝 史齋郞兼淸河縣監 尹日善, 贊者 長鬐縣監 成華鎭, 謁者 松羅察訪 金馨淳, 都預差 彦陽縣監 林一馥을 집사관으로 차정하였다. 또한 鄕執事에는 奉香 生員 李耆祥, 奉爐 崔雲範, 奉爵 柳周祚, 奠爵 李泰壽, 判陳設 孫永獻·蔣師赫·崔世應, 司奠 權承運, 廟庭東唱 李晉元, 廟庭西唱 李宗彬, 外庭東唱 鄭來元, 外庭西唱 李在脩을 선발하여 12월 13일에 치제를 행하였다.
1839년(己亥) 12월 13일『賜祭時 到記』에는 12월 8일부터 향내외 인사들이 내원하고 있었다. 특히 향외 인사들은 『심원록』에도 확인되는데, 치제 당일에 집사관을 제외하고 61명의 향외 인사들이 내방하였으나, 예비 제관이었던 언양현감 임일복은 오지 않았다. 12월 9일에는 27명(1명 영천)의 인사들이 내원하였는데, 10일에는 234명(19명 향외)으로 증가하였고, 치제 당일에는 모두 425명이 참석 하였다. 향외 인사 61명과 집사관 5명을 제외한 359명이 경주의 유생들이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옥산서원과 안강 및 그 주변에 세거하던 가문들이었다.
특히 여주이씨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안동권씨, 청안이씨, 경주이씨, 영일정씨, 아산장씨, 경주손씨 등이 10명 이상 참석하였다. 61명의 향외 인사들은 8일에 1명이 내원했으며, 10일에는 19명으로 증가했으며, 그 외는 치제 당일에 맞춰 방문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永川에 거주했는데 언양, 의성, 울산, 선산, 흥해, 영일, 하양, 청도, 칠곡, 자인, 대구, 청송 등지에서도 1~3명이 참관하였다. 한편, 옥산서원 치제에 참석했던 인사들이 경주 인근의 고을들에 국한되었던 것은 옥산서원에서 경주부와 그 주변의 열읍으로만 치제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서원에서는 같은 날 도산서원에서도 치제를 행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두 서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과 그 주변의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는 통보하지 않았으며,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는 거리가 멀고 시일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또한 알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강당을 중건하는 가운데 영액례와 치제를 거듭 거행하면서 옥산서원은 많은 물력을 소모하여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옥산서원의 위상을 향내외의 官民에게 闡揚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료적 가치
이 제문은 1839년 12월 13일 치제시 사용된 것으로 당시 제례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