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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치제(致祭) 제문(祭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I.1781.4713-20180630.Y185010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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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시문류-제문
내용분류: 종교/풍속-관혼상제-제문
작성주체 이양정,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작성시기 1781
형태사항 크기: 55 X 60.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781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치제(致祭) 제문(祭文)
1781년 5월 18일 왕명으로 좌부승지 이양정옥산서원에 치제를 올리며 읽은 제문이다. 제문에는 회재의 학문연원이 같은 시대의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주돈이와 주자에서 이어진다고 하였다. 즉 정주학의 적통을 이들이 함께 잇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회재의 정밀하고 깊이 있는 학문은 『대학장구보유』, 『구경연의』등의 저서로 대표되며, 신하로서도 수렴청정 하에서 「일강십목소」을 올려 군주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훗날 유배되어 사망했지만 그의 의리와 유지는 남아서 후인들에게 전해졌다고 칭송하였다. 아울러 그를 제향하는 서원의 그림이 왕명으로 올려 졌었기에 이에 사람을 뽑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경주 옥산서원의 장서 수집 및 관리실태를 통해 본 도서관적 기능」,『한국민족문화』58, 이병훈,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81년 5월 18일 王命으로 同副承旨 李養鼎玉山書院에서 致祭를 올리며 읽은 祭文.
1781년 5월 18일 王命으로 左副承旨 李養鼎玉山書院에 致祭를 올리며 읽은 祭文이다. 옥산서원은 건립이래로 17세기 초반까지 다수의 치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히 전개되고, 영남 남인이 몰락하면서 옥산서원에 대한 致祭역시 단절되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회재 이언적의 학문이 영조와 정조에 의해 주목을 받으면서 그를 제향하는 옥산서원 역시 국왕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63년(영조 39) 8월 25일 영조는 회재의 후손인 李憲黙을 소견하고, 경상감사에게 명령하여 옥산서원의 경치를 그려서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는 1781년(정조 5) 4월 23일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으로 禮官을 보내어 宋時烈을 제향하는 노론계의 대표적 서원인 華陽書院에 준하여 祭官과 祭需를 갖추어 치제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서인 내지 노론과 차등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로서 회재와 퇴계에 대한 존경의 뜻이었다. 영남에서는 수백 년 만에 시행된 치제였던 만큼 그 의미와 규모가 성대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치제를 통하여 두 서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즉 영남지역을 벗어나 조정에까지 다시금 두 서원에 대한 관심이 증폭했던 것이다.
제문에서는 회재의 학문연원이 같은 시대의 趙光祖, 李滉과 더불어 周敦頤와 朱子에서 이어진다고 하였다. 즉 程朱學의 적통을 이들이 함께 잇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회재의 정밀하고 깊이 있는 학문은 『大學章句補遺』, 『九經衍義』로 대표되며, 신하로서도 수렴청정 하에서 「一綱十目疏」를 올려 군주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훗날 유배되어 사망했지만 그의 의리와 유지는 남아서 후인들에게 전해졌다고 칭송하였다. 아울러 선조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고향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고, 그곳의 그림이 왕명으로 올려 졌었다고 했다. 이러한 예식에 의거하여 사람을 뽑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즉 제문의 내용은 회재의 학문이 정주학의 적통을 계승하였으며, 학자이자 신하로서 모범이 됨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치제를 하는 것도 이전에 그곳의 그림을 그려올렸던 법식에 따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아마도 집권 초기의 정조로서는 노론 대신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영남 남인을 끌어들이려한다는 혐의를 피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실제 두 서원에 대한 치제를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避嫌노력은 확인된다. 4월 23일 정조는 두 서원에 대한 치제를 명령하면서 "등극 이래로 정무가 바빠서 두 先正臣을 제향하는 서원에 치제를 올리지 못한 것이 높여 사모하고 크게 우러르는 마음에 있어서 더욱 부끄럽다"고 했다. 아울러 "영조 때에는 두 서원의 터를 그려서 올리라는 명령까지 있었기에 이제라도 치제를 거행하는 것은 더더욱 진실로 마땅한 일"이라고 치제의 당위성에 대하여 직접 역설하였다. 그만큼 수백 년 만의 영남지역 치제인 만큼 노론 대신들의 반발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마음이 치제문에도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제문은 1781년 치제 당시 사용된 것으로 당시 제례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경주 옥산서원의 장서 수집 및 관리실태를 통해 본 도서관적 기능」,『한국민족문화』58, 이병훈,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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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乾隆四十六年歲次辛丑五月十八日
國王
遣近侍臣承政院左副承旨李養鼎
諭祭于 贈領議政文元公李彦迪之靈天開文明運回奎躔維嶽降神克生大賢偉姿近
道英邁出群早講正學扛夯斯文同時靜退共溯洛閩妙歲通籍亨衢發軔薄
試字牧儒雅其治畀以言責正直自持爰有陰邪將入左腹公惟辨奸獨憂誤國
遭厥蜮沙遜于丘園出處何常惟義所存大慝乃去君子得輿惟時
中廟首命甄敍龍赼洛波鳳儀王庭經帷啓沃玉佩鏗鏘應旨陳章剴切其言華褒鄭
重秀德之倫
榮靖盛世擢置貳相期升大猷時丁不幸
垂簾之政爰屬宣仁十條良規寔出寸丹辭功衛社又觸時諱衆鏑叢至砥柱奚倚遠涉
涪江竟不憖遺移孝爲忠小屈大伸義理遺緖啓牗後人盛德必祀孔廡同禋曠世相
感子懷曷已桑梓之鄕俎豆有所遺居入圖達于楓陛爰命邇列式薦諭祭間氣之
聚悠散何適尙有不眛庶幾歆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