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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년 정극후(鄭克後) 봉고옥산서원제생문(奉告玉山書院諸生文) 등초(謄草)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I.1657.4713-20180630.Y185010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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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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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시문류-서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서
작성주체 정극후, 옥산서원 제생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작성시기 1657
형태사항 크기: 41 X 113.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657년 정극후(鄭克後) 봉고옥산서원제생문(奉告玉山書院諸生文)
1809경주 하계정사에서 문집을 간행하면서 1657쌍봉 정극후가 옥산서원 유생들에게 회재 이언적의 마음을 세우고, 도덕을 본받아 면학할 것을 강조한 글을 등초해 보낸 것이다. 이 글은 옥산서원 유생들이 학업하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회재 이언적의 사례를 통해 유생들이 마음을 바로 세워 학업에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쌍봉집』(한국문집총간 속18), 정극후, 민족문화추진회, 200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09慶州 霞溪精舍에서 문집을 간행하기 전 옥산서원과 관련된 정극후의 글을 확인받기 위하여 謄草하여 보냈던 文書로서, 1657雙峯 鄭克後가 玉山書院 儒生들에게 晦齋 李彦迪의 立心과 道德을 본받아 勉學할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1809慶州 霞溪精舍에서 문집을 간행하기 전 옥산서원과 관련된 정극후의 글을 확인받기 위하여 謄草하여 보냈던 文書로서, 1657雙峯 鄭克後가 玉山書院 儒生들에게 晦齋 李彦迪의 立心과 道德을 본받아 勉學할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정극후(1577-1658)는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1624~1625년, 1635~1636년 사이 옥산서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1632년에는 서악서원 원장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鄭胤金(1552~?)과 아들 鄭㙱(1595~)도 옥산서원 원장을 역임할 만큼 학문과 명망이 높았던 가문의 인사였다. 아울러 1634년에는 童蒙敎官을 역임하고, 이어서 金井道 察訪, 王子師傅을 지냈다. 이처럼 경주부내의 두 사액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서원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동몽교관과 왕자사부를 역임하는 등 교육적 능력도 인정을 받았다. 아울러 西岳書院誌 도 편찬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비록 이언적과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당시 元老로서 이언적과 동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에게서 직접 회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렇기에 정극후가 옥산서원 유생들에게 행동과 마음을 바로 잡아서 勉學하도록 曉諭하는 글을 보낼만한 자격이 있었다. 본문을 보면 세상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며, 그것은 三綱五常의 도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儒冠과 儒服을 입고, 儒學이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선비들은 自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글에서 반대로 당시 원내 분위가 다소 어수선했던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현전하는 立案과 立學記 등의 자료에서는 17세기 초반 유생들의 勉學과 탈선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정극후는 배우는 자는 처음에 반드시 먼저 뜻을 세워서 독서에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뜻을 세워 옛 성현의 글을 수없이 많이 읽다보면 그 가운데 한둘의 말이나 행동이 발단이 되어 흥기하는 곳이 되고, 이로 말미암아 견고한 뜻을 세우고, 힘써서 善人이나 賢人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대가 멀고 직접 도통을 계승하길 바라지만 시간과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공자나 맹자보다는 시대가 오래되지 않았고, 살고 있는 곳도 멀지 않은 賢人들을 돌아본다면 더욱 사모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서원의 건립 목적과도 상통되는 것이었다. 즉 聖賢으로 표현되는 孔孟의 이상적 인물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으로 국내의 유학자 가운데 師表가 되는 인물을 賢人으로 받들어 제향하고, 그를 거울삼아 뜻을 세워서 유생들이 정진하는 것이다. 정극후 역시 孔孟의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현인의 세계는 오래되지 않고 가까이 있기에 학문을 정진하는데 그 사모하는 효과가 크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賢人은 회재 이언적이었다. 회재는 종묘에 제향되면서 신하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1610년 文廟에 배향되면서 東方五賢의 한 분으로 공인되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정극후 역시 이언적의 학문이 공자와 맹자를 이어서, 程頤와 程顥, 周敦頤, 朱子를 거쳐 그에게 직접 이어짐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성현들은 멀리 있지만 회재는 體仁廟에서 오르내리고, 서원 위편 독락당은 회재가 卜居했던 곳으로서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옥산서원에 거주하는 유생들은 가까이 있는 회재를 모범으로 하여서 정진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회재가 성현들의 학문을 계승할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하여 자신이 듣고,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된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정극후는 회재가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선비로서 성장하고, 유학 경전을 읽고, 유학에 힘썼던 그 기간은 겨우 약관일 때였다고 했다. 즉 현재 서원에 들어와서 학업에 정진하는 유생들과 비슷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회재는 평생 학업에 뜻에 세우고 경전을 궁구하면서 名利에 연연하지 않고, 몸으로는 공맹의 다스림을 따랐고, 마음으로는 程朱의 道를 사모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일찍이 마음에 세우고, 마침내 그 마음을 지켰다는 것을 후인들은 마땅히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종묘와 문묘에 배향되어 신하이자 학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극후는 본인이 젊은 시절 들었던 80세 노인이 직접 겪은 회재와 관련된 이야기와 맹자의 故事를 통해 배움을 통해 성인이 되길 바란다면, 먼저 회재에게 배우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그는 옥산서원의 여러 유생들은 정성으로 선생의 立心으로서 마음을 삼고, 선생의 道와 德으로서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학문에 끊임없이 궁구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그치지 말아야 하며, 현인에 이르는 유무를 떠나서 어린 유생들 각자가 힘써라고 당부하였다.
자료적 가치
1809년 정극후의 6대손 鄭忠弼(1725~1789)과 鄭東弼(1740~1820) 형제가 慶州 霞溪精舍에서 『雙峯先生文集』(5권 3책)을 간행하였다. 당시 본 문서를 등초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어 확인을 요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쌍봉집』(한국문집총간 속18), 정극후, 민족문화추진회, 200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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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告玉山書院諸生文
嘗聞天地之間萬物之中惟人最大所貴乎人者以其有三
綱五常之道也象人之中又爲四民之首者士也爲士者旣冠
儒冠服儒服欲無忝於儒之名則儒有席上之珍是不可不
自重也學者之初必先立志讀書之法不但尋行數墨而
已亦必以古聖賢自期古聖賢千言萬語無非入道作聖之
方而其中一二言語一二行事又當有發端興起之處由是
而立志堅固着力眞實則可以至於善人賢人亦不難矣今
去孔孟之世遠矣而對越方策之中則若親承提耳而面命
況乎去賢人之世未久也距賢人之居未遠則爲益親切而慕
效之爲易矣今此上流之獨樂堂我
晦齋先生卜居之地也書院之體仁廟我 先生陟降之所也諸
生旣居此書院吾且以 先生之事告之竊念我 老先生生
於斯長於斯讀書於斯用力於斯其年僅踰於弱冠而
有詩曰平生志業在窮經不是區區爲利名明善誠身希孔
孟治心存道慕朱程則此其立心之早而畢竟所立之貞爾
者後生之所當知也且吾於昔年聞八十老人之言其言曰渠
在少時有時陪從於 先生之行見 先生出入玉洞之時臂
鷹之奴亦或先後而 先生只看馬首而已絶不見顧左右
之時云所以今臂鷹者養親之孝也其不左右顧者正心之
功也雖無知常漢尙能心服而言之不置 先生之一言一
動皆可爲後世法者尤不可不知也孟子曰乃所願則學孔
子也此孟子之所以立心而終至於亞聖之地今諸生欲學孔子
先學我 先生其亦可矣 先生之立心如是 先生之
道之德又如是諸生誠能以 先生立心爲心以 先生道德
爲準則念念而不忘循循而不已其終也及則賢不及亦
不失於命名吾黨小子盍各勉焉歲在丙申冬八十老
烏川鄭克後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