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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전여시(傳與時) 서책서실목록(書冊閪失目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889.4713-20180630.Y1850107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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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전장기
내용분류: 경제-회계/금융-전장기
작성주체 옥산서원 재임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작성시기 1889
형태사항 크기: 22 X 40.2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89년 옥산서원(玉山書院) 전여시(傳與時) 서책서실목록(書冊閪失目錄)
1889년 12월 15일 망향례에 원장인 부윤 민영직이 참석하고 이날 재임들의 교체 및 전여가 시행되었을 때 작성한 잃어버린 서책의 목록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서책의 전수시의 기록에서는 이전에 잃어버린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매우 많다고 했다. 이래서는 진실로 그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뒤 날을 생각하면 혹시라도 서로 의심하는 발단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향알을 맞이하여 새로운 임원과 옛날의 임원이 나란히 모였을 때 서적이 없는 것을 기록하여 다시 이와 같이 누락되는데 이르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기재된 잃어버린 장서 목록은 28종 38책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경주 옥산서원의 장서 수집 및 관리 실태를 통해본 도서관적 기능」,『한국민족문화』58, 이병훈,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89년 12월 15일 望香禮에 院長인 府尹 閔泳稷이 참석하고 이날 齋任들의 교체 및 傳與가 시행되었을 때 작성한 閪失한 書籍 目錄
1889년 12월 15일 望香禮에 院長인 府尹 閔泳稷이 참석하고 이날 齋任들의 교체 및 傳與가 시행되었을 때 작성한 閪失한 書籍 目錄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서책의 전수시의 기록에서는 이전에 잃어버린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매우 많다고 했다. 이래서는 진실로 그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뒤날을 생각하면 혹시라도 서로 의심하는 발단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香謁을 맞이하여 新任과 舊任이 나란히 모였을 때 서적이 없는 것을 기록하여 다시 이와 같이 누락되는데 이르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기재된 閪失목록은 28종 38책이다. 옥산서원은 藏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다. 그것은 임란이전에 사액되어 일찍이 많은 서적을 기증받고, 나아가 국가로부터 內賜된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임란 당시에도 전란의 피해가 적었기에 오로지 서적을 보관할 수 있었던 옥산서원은 임란이후 국왕의 교육과 출판을 위하여 홍문관에서 서적을 대여해 가기도 했다. 이처럼 양질의 서적을 다수 보유했던 옥산서원은 철저한 장서관리를 통해 18세기 중반까지 1권의 책도 잃어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원임의 선발이 어려워지고 서원의 위상이 쇠퇴하면서 경주부윤의 서적 대여요청이 증가하고, 서원운영에 관여하는 사족가문들의 요청도 증가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대여한 서적을 제대로 반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세기 중반이후 옥산서원은 경주부윤의 完文과 옥산서원 堂中의 立議, 나아가 1840년에는 ‘書院書冊不出門外’ 규정과 正祖의 傳言을 하나의 판목에 새겨서 御書閣 門楣에 걸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적의 대여와 불법 반출은 계속되었다. 「1856년 5월 8일의 堂中 完議」에서는 서책을 대여한 후 반납하지 않고, 新舊任이 인수인계를 전혀 하지 않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양동과 옥산의 두 마을에서 책을 빌려간 자들을 秋享 전까지 반납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는 후손들의 서적 대여가 많았음을 알려준다. 한편 「1862년 5월 1일 당중 완의」에서는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서적의 대여와 미반납으로 증가하였다. 그래서 새롭게 현재 남은 책들을 확인하여 『都錄』을 수정하고, 『借去錄』을 만들어 有司를 경유한 후 서적의 대여 날짜와 책명, 인명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빌려주었던 유사가 책임을 지고 해당 서적을 반납 받도록 하면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처도 1889년의 서실 서책 목록을 보면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실된 목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內賜本으로는 孟子와 孟子諺解가 있으며, 서원 운영과 관련된 通文謄錄, 儒案(錦粧), 執事記, 小學講規, 建院時列邑賻助冊, 考往錄 등이 있다. 이들 책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 것들이다. 다만 명단을 통하여 이러한 책들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가운데 유안과 잡사기는 옥산서원 건립 당시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기록이다. 소학강규는 옥산서원에도 소학 교육을 중요시 했으며, 강학을 할 때 일정한 의례와 규정이 있ᅌᅥᆻ음을 알 수 있다. 고왕록과 건읍시열읍부조책은 서원의 건립 당시부터 경주부와 인근 고을에서 옥산서원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 가문, 원사 등의 부조액 등을 기록한 것과 서원 건물의 개보수, 서적의 수입과정, 감사 및 수령의 방문, 향회, 도회, 강학 등의 서원제반 사안에 대한 기록으로 보인다. 통문등록은 옥산서원 정서등록과 마찬가지로 특정사안과 관련된 내용을 엮었거나, 당시까지 옥산서원에서 보관하던 모든 통문을 등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옥산서원에는 19~20세기 통문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통문등록에는 17~18세기에 보내왔던 통문들을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8세기에는 옥산이씨 소손들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장산서원을 건립하고, 옥산서원 향례 참여를 두고 사림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즉 당시 수집된 통문도 적서시비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언급했던 운영 자료의 특징 역시 적서시비가 본격화되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서파에서 항상 그들 선조의 서원 참여와 역할이 컸음을 주장하였고, 그 근거로서 주로 언급했었던 집사기 등이 사라졌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말 옥산서원의 서책관리 방법의 문제점과 사라진 서적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경주 옥산서원의 장서 수집 및 관리 실태를 통해본 도서관적 기능」,『한국민족문화』58, 이병훈,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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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書冊傳受時錄以前無見失者許多此則誠未
知其所由而此後慮或有起訝之端故今於
香謁新舊任齊會時錄其所無更不至如是
踈漏耳
孟子第六卷 戊午失
(孟子)諺解一卷前無
小學三卷前無
儀禮經傳一卷前無
儀禮圖一卷前無且墨秩
程氏外書一卷前無
孔子通記一卷前無
馬史一卷前無
註唐詩一卷前無
文選四卷前無
通文謄書一卷
錦粧儒案一卷未搜
執事記一卷前無
小學講規一卷前無
崇仁碑文一丈 不入傳集黜而未搜
本院碑文二軸 不入傳集黜而未搜
奉先雜儀三卷前無
九經衍義一秩前無
武陵集一卷前無
孤松集二卷 一卷癸丑無一卷丁巳無
甁窩集一卷前無
修庵集一卷戊午無
省吾堂集一卷丙辰無
孝經一卷戊辰無
建院時列邑賻助冊前無
太極問辨一卷前無
松澤實記一卷懸註未搜
考往錄二卷未搜
己丑十二月十五日傳與時
首席行次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