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11월 30일에 있었던 延額禮 당시 賜額板을 맞이하는 儀禮 절차를 정리한 笏記
1839년 11월 30일에 있었던 延額禮 당시 賜額板을 맞이하는 儀禮 절차를 정리한 笏記이다. 이와 관련하여 옥산서원에 소장된 『求仁堂重建日記』가 참고 된다. 옥산서원은 재사액이 결정된 후 11월 6일 예조의 서리가 賜額書本을 가지고 감영에 도착하였다. 이후 14일에 경주부에 도착하여 15일부터 경주부에서 書本을 가지고 현판을 판각하였다. 서리가 30일에 사액판을 가지고 서원에 온다고 통보를 해와서 25일에 원임이하 여러 인원들 모여서 연액의절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연액의절은 서원이 창건할 당시의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1792년 어제제문 판을 맞이할 때의 의절을 참고하여 增損하였다. 이 날 만든 것이 본 ‘院儒及本孫祗受謝恩行禮儀’이다. 원유와 본손이 공손히 사액판을 받고, 그에 감사하는 예를 행하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본 홀기는 額號를 맞이한 후 예조서리와 부윤 및 유생들과 본손을 구분하여 액호를 맞이하는 4배례를 하고, 이후 사은례로서 4배례를 행한 후 예를 마치고 물러나는 절차이다. 그러나 『일기』에서는 서원에 들어온 후 예조서리가 먼저 강당에 올라가 버려서 儀節대로 행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일기에 따르면 사액판을 가진 의장행렬이 서원 앞 松壇에 도착하여 원장 이하 諸生이 巾服을 갖춰서 맞이하러 갔다. 이어 轎輿에 사액판을 싣고 역락문에 앞에 이르렀다. 이때 奉板儒生이 사액판을 들고 예조서리와 함께 먼저 서원에 들어가고, 그 뒤를 원장과 제생들이 따랐다. 홀기에 나온 것처럼 부윤이 참석하지는 않았다. 봉판유생이 강당에 이르러 강당 중앙의 탁자에 사액판을 봉안하고, 上執禮가 강당에 올라 동쪽을 향해서고, 唱笏이 따라서고, 東西唱이 계단 가운데에서 서로 마주보고 섰다. 원장이하는 마당에서 동서로 나누어 서서 동쪽은 원장과 鄕搢紳이 서고, 서쪽은 諸生이 섰는데, 이때 북쪽을 향하여 차례대로 섰다. 唱이 큰 목소리로 拜興을 외치고 모두 4배를 마쳤다. 예조서리가 원장을 이끌고 동쪽 계단을 올라 탁자에 이르러서 그 앞에 俯伏하게 했다. 예조 서리가 사액판을 원장에게 주자, 원장은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아서 다시 執事者에게 주어 탁자 위에 봉안하였다. 집사자가 붉은 보자기를 걷어내어 사액판을 보이게 하자, 예조서리가 큰 소리로 額號 4자를 읽고, 그 옆의 17자도 읽는 것을 마치고는 이내 부복한 원장과 함께 서쪽 계단 아래로 물러났다. 집례, 창홀, 동서창의 창에 따라 이전과 같이 원장이하는 모두 북쪽을 향하여 4배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諸生들이 나란히 나아가 奉審하는 것을 마친 후 봉판유생이 붉은 보자기를 씌워서 받든 후 御書閣에 이르렀다. 예조서리와 원장이 따라 들어가서 높은 다리의 상위에 봉안하였다. 또한 賜額書本과 印本을 함께 그곳에 보관하고 물러났다. 이처럼 옥산서원에서는 재사액된 현판을 맞이하고 봉안하는 일에 원장이하 여러 유생들이 참여하여 철저히 고증하고, 준비를 하였었다.
자료적 가치
홀기는 祭禮의 순서를 정리한 것이다. 본 홀기는 사액시 현판을 영접하는 의식을 구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제향의례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