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순조 10)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駿奔錄
자료의 내용
본 駿奔錄은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執事分定錄의 명단을 기록한 자료이다. 본 자료는 옥동서원 소장 준분록 10책 가운데 하나로 경오년 즉 1810년(순조 10)에 작성된 문서로 겉 표제에는 준분록과 간지가 적혀있고, 본 좌목에는 執事와 성명이 기재되어있다.
전체 수록 현황을 살펴보면 경오년 3월 3일 亭禮時 23명과 9월 5일 亭禮時 20명, 갑진년 정월 28일 畫像改摸 告由時 19명, 2월 初9일 畫像改摸 奉安時 15명, 갑진년 大享時 3월 초10일 5명, 계축년 3월 春 享時 4명 6차례에 걸쳐 이루진 향사와 고유제와 봉안제에 참석한 86명이 등재되어 있다. 옥동서원의 향사는 일반적으로 음력 춘3월과 추9월 上丁日 사당인 景德祠에서 행하되, 만약 國忌日이 겹치게 되면, 中下末丁에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향사는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인 子時 末에 치러진다. 옥동서원 유사는 크게 享有司와 別有司가 있으며, 원장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다. 향유사는 향사를 치르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향사 때의 제 집사를 奉請 할 수가 있다. 반면, 별유사는 2명이 임명되는데 句官有司라고도 부른다. 별유사 2명은 각각 타성 1명, 본손 1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본손은 옥동서원 제향자인 황희의 후손, 즉 장수황씨 일족을 뜻한다. 별유사가 서원의 업무 일반을 총괄하며, 각종 재정 관련 사항의 실무를 담당한다. 따라서 향사 준비와 관련된 각종 업무와 제 집사의 선발은 이들 원장과 향유사·별유사 간의 유기적인 업무 분담과 상호 간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새로 선임된 원장과 유사에게는 향사가 마친 보름 이내에 薦紙를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향사가 끝난 후 새로 선임된 원장과 유사는 각각 춘향을 앞두고는 정월 초닷새 날, 추향을 앞두고는 팔월 초하루 날 焚香을 한 뒤 봉청자의 추천과 향사 등과 같은 서원의 당면 현안 등을 논의한다. 옥동서원의 분향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루어지며, 향유사 1명과 별유사 1명이 거행하는데, 초임 원장도 첫 분향시는 분향을 하는 것을 원칙이다. 제 집사의 봉청은 향유사가 행한다. 이때 추천된 제 집사에게도 천지를 발송하는데, 춘향은 음력 2월 초하루 날, 추향은 8월 초 하루날 발문하여 일주일 안에 송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외 아헌관과 종헌관은 원장과 유사 등과 협의 하여 천거한다. 한편, 祝과 찬자贊者는 사전에 잠정적으로 정하되, 일반 제관으로 봉청하며, 향사당일 분정하는 형식을 따른다. 이상 초헌관·아헌관·종헌관·축·집례에 대하여 옥동서원에서는 五執事라고 부른다.
본 준분록에는 집사분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옥동서원 향사 때 봉무할 제 집사에 대한 분정은 오후 5시에 이루어진다. 옥동서원의 강당인 蘊輝堂에는 목판으로 제작된 분정판이 걸려 있는데, 지난 향사 때의 헌관 이하 제 집사의 명단이 한지에 묵서되어 걸려 있다. 이것을 금번 향사의 것으로 교체하여 부착한 뒤, 다음 향사 때까지 게시해 둔다. 習儀, 制祝, 夜話, 封尊, 實饌과 陳設 등이 모두 준비되면 향사는 새벽 1시에 봉행하며 1시간 전 향사를 통고한다. 제관들은 세수를 한 뒤, 의관을 챙겨 입고 10분 전까지 준비를 완료한다. 향사는 옥동서원에 전해지고 있는 전통 홀기에 따라 거행하는데 獻幣禮 - 初獻禮 - 亞獻禮 - 終獻禮 - 飮福受胙 - 望燎禮 - 飮福禮 순으로 진행이 된다. 공식적으로 음복례가 끝나야지 모든 향사 제례가 끝나는 것이다. 모든 제관들은 강당에서 相揖禮를 행하고, 좌정한 뒤 음복을 시작한다. 음복 도중 금번 향사에 문제점 없었는지, 개선해야 될 것은 무엇인지 두루 의견을 묻는다. 음복례가 마치면 원장 이하 임원들이 모여 후임 원장 등을 추천한 후 罷座한다.
현재 옥동서원에는 주향자 황희의 畵像 진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의 차남이자 장수황씨 상주 입향조 黃保身이 상주로 낙향했을 때 부친의 영정도 함께 가져온 것이다. 이때 가져온 영정은 1424년(세종 6) 황희가 62세 때 그린 것으로서 이후 유일본으로 황희 영정의 표준이 되었다. 그래서 옥동서원에는 1752년(영조 28)의 사본, 1844년(헌종 10)의 모사본, 1857년(철종 8)의 모사본 등이 보전되어 있는데 본 준본록은 바로 1844년에 화상을 개모하고 고유례와 봉안례를 실시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화상을 개모한 연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1752년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화상이 퇴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례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성씨별 구성을 살펴보면, 黃氏42명, 金氏 15명, 李·洪氏 각 4명, 宋·全氏 각 3명, 姜·琴·盧·趙 각 2명, 康·高·權·羅·柳·朴·鄭 각 1명씩이다. 옥동서원 배향자의 후손 장수황씨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외 16개의 다양한 성씨가 참여하고 있다.
이는 1789년(정조 13)의 사액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사액 이후 옥동서원은 상주목의 서부지역을, 기존 사액 서원인 남인계 도남서원은 동부지역을, 서인계 흥암서원은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다만 당색을 표방하지 않은 옥동서원에 대한 출입이 앞의 양 서원에 비해 출입이 저조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문중서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지리적 요인에 의한 접근성이 제한된 것에 기인한 바가 컸다.
자료적 가치
본 『준분록』은 18세기 초반 옥동서원의 인적구성과 화상 개모 사실을 일부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자료에 나타난 인물들은 대부분 황희 후손 장수황씨들이기는 하지만 사액 직후의 영향으로 16개의 다양한 가문에서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 초반 옥동서원이가 가지고 있던 운영과 향사 집사분정의 양상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