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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정조 8)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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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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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시도기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심원록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작성시기 1784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8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1784년(정조 8)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자료적 가치
癸巳年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朔望際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院長과 齋任, 儒生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黃氏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삭망분향은 주로 원장과 재임 및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의 정확한 작성연대는 계사년 9월 삭일분향 입록자인 黃大休의 옥동서원 원장 취임인 1773년(영조 49)에서 갑진년 즉 1784년(정조 8)까지 인데 일부 자료가 망실된 듯 하다. 중복 포함하여 총 48명이 수록되어 있고, 직임을 기재하는 자는 원장 2명, 재임 5명, 나머지는 일반 유생들의 삭망분향시 주관자들이 입록되어 있다. 이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황씨 39명으로 압도적이며 이씨 5명, 趙氏 2명, 여씨와 민씨 각 1명 순이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옥동서원의 운영 핵심가문인 장수황씨가 절대적이다. 성관의 분포로 미루어 옥동서원 이미 18세기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후손들이 사는 고을에 설립된 문중서원은 물론이고 大賢書院에서도 후손들이 원임에 취임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84년(정조 8)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자료적 가치
癸巳年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朔望際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院長과 齋任, 儒生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黃氏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상주목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書院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립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祭享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상대적으로 제향을 통한 선현 숭배의 기능이 크게 강조되었다. 넓은 의미로서의 서원의 향례는 士林의 공론에 의해 결정되고 국가에 의해 인준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더불어 享禮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유교문화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참여 자체가 자신의 유교적 소양을 대외적으로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서원의 제례의식은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현전하고 있는 옥동서원 관련 자료에는 제례와 관계되는 자료는 드문 형편이다. 따라서 분향을 비롯한 여러 제례의 절차나 형식, 내용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으나 다만 본 문서를 비롯한 수십여 분향록을 통해 朔望焚香時의 참여 인원에 대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삭망분향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그 달의 한 가운데 날인 보름날에 향을 피워 올리는 비교적 간단한 의례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원장과 재임 및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의 정확한 작성연대는 계사년 9월 삭일의 분향 입록자인 黃大休의 옥동서원 원장 취임인 1773년(영조 49)에서 갑진년 즉 1784년(정조 8)까지 인데 일부 자료가 망실된 듯 하다. 중복 포함하여 총 48명이 수록되어 있고, 직임을 기재하는 자는 원장 2명, 재임 5명, 나머지는 일반 유생들의 삭망분향시 주관자들이 입록되어 있다. 이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황씨 39명으로 압도적이며 이씨 5명, 趙氏 2명, 여씨와 민씨 각 1명 순이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옥동서원의 운영 핵심가문인 장수황씨가 절대적이다. 성관의 분포로 미루어 옥동서원 이미 18세기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후손들이 사는 고을에 설립된 문중서원은 물론이고 大賢書院에서도 후손들이 원임에 취임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향사를 비롯한 유교적 의례 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관계와 경계를 설정하고 형성하는 중요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대내외적으로 향사에 참여하는 행위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으며, 그 지역사회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선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주요한 척도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 옥동서원의 삭망분향례를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통해 당시 옥동서원의 실질적 운영주체의 일면을 보여주는 분향록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사립 교육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향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건립 초기에는 인재양성과 학문연구라는 교육적 기능이 우선하였지만, 점차 先儒 향사와 지역 사회의 교화적 기능이 중시되어갔다. 더불어 서원이 지역별, 학맥별로 유대를 강화해 가면서 그 상징적 제향인물에 대한 제례의식과 기능이 점차 증대되어 갔다. 본 문서는 서원의 제향의식이 명맥을 유지하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의 院任과 院生의 인적구성의 단면을 보여주고, 상주 지역에서 옥동서원에 참여하는 이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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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癸巳八月朔焚香
齋任李益榮
儒生黃載休
望焚香
儒生黃祥幹
九月朔日焚香
院長黃大休
儒生呂橒
黃景幹
黃百休
二月望焚
香齋任黃大坤
三月朔焚
香院長黃啓熙
齋任黃鶴老
儒生趙雲萬
趙奎鎭
黃秀幹
黃穆熙
黃宅熙
黃祚熙
李益榮
十二月朔焚香
李益榮
望焚香
齋任>李益榮
黃耳老
儒生閔諧
甲辰正月初七日焚
香齋任>李益榮
黃耳老
儒生黃日熙
黃孝幹
黃翼瑞
黃世休
黃鎰重
黃允熙
黃百休
黃昌熙
黃載休
黃穆熙
黃秀幹
黃應重
黃弼重
黃樂休
黃翼熙
黃鶴老
黃喆煥
黃福休
待行
黃弼熙
望焚
李益榮
二月朔焚
焚香
黃宅熙
自二月望至閏三月初一日朔以院底廚氣停香禮
閏三月望焚
李益榮
五月朔焚
黃潤{土+正}
望焚
香儒生黃福休
六月朔焚
香儒生黃世休
黃允熙
黃載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