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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원배위시元配位諡號職銜列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0000.4725-20180630.Y185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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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시도기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심원록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4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원배위시호직함열록(元配位諡號職銜列錄)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옥동서원의 배향된 4명의 元位와 配位 구분, 職銜, 諡號를 기록한 것으로 1861년(철종 12)에 작성된 옥동서원 『元配位諡號職銜列錄成冊』이다. 이 자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식이 황효헌보다 먼저 배향되었음에도 후자가 앞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바로 옥동서원의 문중화의 깊은 관련이 있다. 위차 시비는 1804년(순조 4) 원우를 중수하고 還安祭 때 황씨 가문에서는 年齒를 앞세워 위차 변경을 요구했고, 반면 전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기존과 동일한 위차를 주장하면서 발생되었다. 그것은 鄕權의 향배와 관계되는 것이기에 어느 한쪽에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처럼 두 가문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상주 사림들이 중재를 모색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옥동서원 운영을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장수황씨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옥천전씨 全宗德 등은 전식의 위패를 사전에 통보 없이 상주를 대표하는 道南書院에 그의 스승 유성룡의 위패 아래 안치하기에 이른다. 사액서원에서 공론을 수렴하지 않고 사사로이 위패를 다른 서원에 추배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며, 위패를 사사로이 받아준 도남서원에 대한 여론도 좋지 못했다. 都會에서 이 문제를 상부에 보고해 처리하자는 방안이 도출 된 바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양 가문은 여러 곳에 통문을 보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 형성에만 열중하였다. 이에 지역 사림에서는 사액서원인 만큼 전후의 事端에서 편견과 사적인 견해를 버리고 조정에 의견을 물어 처리하자는 타협안에 따라 예조에 상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1808년(순조 8) 전식의 위패를 원래대로 옥동서원으로 환안하였으며, 여기에 황효헌의 증손인 황유를 추배하는 것으로 양 가문을 타협이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원배위시호직함열록(元配位諡號職銜列錄)
자료적 가치
서원의 묘우 내에는 배향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位次에 따라 主享·並享·列享·配享·從享·別廟 등으로 구분하며 배향하는 시기에 따라 元享과 追享으로 나눈다. 주향은 위패 중 최고, 병향은 위패를 나란히 모시는 것, 열향은 좌측에서 우측 일렬로 배열 한 것, 배향은 좌향으로 배석 한 것, 종향은 후대 배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배향 가운데 좌측에서 모셔진 위패가 최우선 우선한다. 白華書堂을 전신으로 하고 있는 玉洞書院는 1580년(선조 13) 방촌 황희의 영당을 건립하고 춘추향사를 봉행하다가, 1714년(숙종 40)에 사림들의 중론에 의해 沙西 全湜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15년(숙종 41)에는 신덕리에 위치한 방촌 황희의 영당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뒤 1783년(정조 7)에는 畜翁 黃孝獻과 槃澗 黃紐를 추배하면서 배향 선현은 모두 4명이 되었다. 본 자료는 옥동서원의 배향된 4명의 元位와 配位 구분, 職銜, 諡號를 기록한 것으로 1861년(철종 12)에 작성된 옥동서원 『元配位諡號職銜列錄成冊』이다. 당시 기록을 작성한 원임은 齋任 洪祐善과 黃鱗周이다. 원위 즉 주향은 당연히 황희, 배향은 황희의 현손 황효헌, 유성룡 문인 전식, 황효헌의 증손 황뉴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자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식이 황효헌보다 먼저 배향되었음에도 후자가 앞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바로 옥동서원의 문중화의 깊은 관련이 있다. 17세기 중반까지 서원의 건립과 운영이 일향사림의 공동의 관심사에서 점차 향촌사회의 신분유지를 위한 기구로 전락하면서 그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이와 맞물려 향촌사회 내부분열이 격화되어 갔다. 이 시기 상주지역 소재 원우도 16세기 3개소에서 13개소로 증가하는데 바로 문중서원의 남설 때문이다. 또한 그 증가되는 현실속에서 황희의 후손 장수황씨들이 18세기 이후 옥동서원의 운영을 주도하면서 전씨가문과 빚어진 사건이다. 그리고 실제 장수황씨 가문은 향촌 내 옥동서원 외에는 지파의 원우가 존재하지 않는 만큼 대단히 중요한 기구였다. 특히 19세 이후에는 서원 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더욱 노정이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위차시비다. 조선후기 영남의 대표적인 향전인 병호시비의 발단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조나 스승의 위차가 높다는 것은 후손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 즉 ‘班格’을 높이는 것이고,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학문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원이 양반사족들에게 있어 공동의 이익을 위한 기구에서 점차 그 후손들의 기구로 변모해감에 따라 위차시비는 후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옥동서원에서도 19세 초 배향자들의 후손 가문인 장수황씨와 옥천전씨 사이 심각한 위차 시비를 경험한 바 있다. 시비는 1804년(순조 4) 원우를 중수하고 還安祭 때 황씨 가문에서는 年齒를 앞세워 위차 변경을 요구했고, 반면 전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기존과 동일한 위차를 주장하면서 발생되었다. 그것은 鄕權의 향배와 관계되는 것이기에 어느 한쪽에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처럼 두 가문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상주 사림들이 중재를 모색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옥동서원 운영을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장수황씨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옥천전씨 全宗德 등은 전식의 위패를 사전에 통보 없이 상주를 대표하는 道南書院에 그의 스승 유성룡의 위패 아래 안치하기에 이른다. 사액서원에서 공론을 수렴하지 않고 사사로이 위패를 다른 서원에 추배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며, 위패를 사사로이 받아준 도남서원에 대한 여론도 좋지 못했다. 都會에서 이 문제를 상부에 보고해 처리하자는 방안이 도출 된 바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양 가문은 여러 곳에 통문을 보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 형성에만 열중하였다. 이에 지역 사림에서는 사액서원인 만큼 전후의 事端에서 편견과 사적인 견해를 버리고 조정에 의견을 물어 처리하자는 타협안에 따라 예조에 상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1808년(순조 8) 전식의 위패를 원래대로 옥동서원으로 환안하였으며, 여기에 황효헌의 증손인 황유를 추배하는 것으로 양 가문을 타협이 이루어졌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서원의 위차시비가 발생할 때 원칙적으로 道學을 강조하였다. 서원 건립의 기준은 학문과 도덕이 우선시하기 때문에 서원의 위차도 당연히 이를 중요시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서원의 증가와 남설 및 제례기능이 강화되면서 위차의 기준이 연치가 중요시 되었다. 옥동서원의 위차시비는 바로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사례라 할 수 있어 조선후기 상주지역 향촌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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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玉洞書院 元配位諡號職銜列錄成冊
玉洞書院陞享 先輩 元配位諡號職銜列錄
元位
翼成公厖村黃先生諱喜字懼夫長水人官領議政
淸白吏 世宗朝賢相
配位
吏曹參判畜翁先生黃公諱孝獻字叔貢長水人翼
成公玄孫己卯名賢靜庵從遊 中朝名臣
忠簡公沙西先生全公諱湜字凈遠管山人官吏曹
參判 贈左議政航海朝天西厓門人 仁祖
朝名臣
持平槃澗先生黃公諱紐字會甫長水人畜翁增損
寒岡愚伏門人 仁祖朝名臣
辛酉正月 日玉洞書院齋任洪祐善
黃鱗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