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申年 2월 3일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駿奔錄
자료의 내용
駿奔錄은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告由祭와 秋享祀 당시 제례에 참석하였던 인사 및 獻官執事를 기록한 자료이다.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제례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직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본 자료는 옥동서원 소장 준분록 10책 가운데 하나로 戊申年 2월 3일 작성된 것으로 겉표제에는 준분록으로 되어있고, 본 좌목에는 직임, 성명, 執事 등에 관한 사항을 기재해 두고 있다.
181명이 수록된 구체적인 현황을 살펴보면 畫像 개모 告由時 13명, 還安時 16명, 무신년 3월 향사시 18명, 移安告由時 14명, 還安時 9명, 무신년 9월 향사시 17명, 병자년 춘추향시 31명, 정축년 춘향시 9명, 무인년 移安時 10명, 還安時 23명, 기해년 향사시 21명이 참여를 하고 있다.
옥동서원의 향사는 일반적으로 음력 춘3월과 추9월 上丁日 사당인 景德祠에서 행하되, 만약 國忌日이 겹치게 되면, 中下末丁에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향사는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인 子時 末에 치러진다. 옥동서원 유사는 크게 享有司와 別有司가 있으며, 원장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다. 향유사는 향사를 치르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향사 때의 제 집사를 奉請 할 수가 있다. 반면, 별유사는 2명이 임명되는데 句官有司라고도 부른다. 별유사 2명은 각각 타성 1명, 본손 1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본손은 옥동서원 제향자인 황희의 후손, 즉 장수황씨 일족을 뜻한다. 별유사가 서원의 업무 일반을 총괄하며, 각종 재정 관련 사항의 실무를 담당한다. 따라서 향사 준비와 관련된 각종 업무와 제 집사의 선발은 이들 원장과 향유사·별유사 간의 유기적인 업무 분담과 상호 간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새로 선임된 원장과 유사에게는 향사가 마친 보름 이내에 薦紙를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향사가 끝난 후 새로 선임된 원장과 유사는 각각 춘향을 앞두고는 정월 초닷새 날, 추향을 앞두고는 팔월 초하루 날 焚香을 한 뒤 봉청자의 추천과 향사 등과 같은 서원의 당면 현안 등을 논의한다. 옥동서원의 분향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루어지며, 향유사 1명과 별유사 1명이 거행하는데, 초임 원장도 첫 분향시는 분향을 하는 것을 원칙이다. 제 집사의 봉청은 향유사가 행한다. 이때 추천된 제 집사에게도 천지를 발송하는데, 춘향은 음력 2월 초하루 날, 추향은 8월 초 하루날 발문하여 일주일 안에 송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외 아헌관과 종헌관은 원장과 유사 등과 협의 하여 천거한다. 한편, 祝과 찬자贊者는 사전에 잠정적으로 정하되, 일반 제관으로 봉청하며, 향사당일 분정하는 형식을 따른다. 이상 초헌관·아헌관·종헌관·축·집례에 대하여 옥동서원에서는 五執事라고 부른다.
본 준분록의 특징은 바로 1728년(영조 4) 주향자 황희의 화상을 개모하고 告由·還安·移安 告由祭 등의 과정을 기록한 성책이라는 점이다. 원래 황희의 영정은 그의 둘째 아들이자 장수황씨 상주 입향조 少尹公 黃保身이 監察·正郞, 宗親府 典籤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상주목으로 내려 왔을 때 이 영정도 함께 상주로 오게 되었다. 이때 가져온 영정은 1424년(세종 6) 황희가 62세 때 그린 것으로서 이후 유일본으로 황희 영정의 표준이 되어 있으며 타지역의 원우에 게시된 영정들도 이를 모사한 것이다. 또한 서원에는 이외에도 3개의 모사본이 더 보전되어 있다.
제례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성씨별 구성을 살펴보면, 黃氏 122명, 趙氏 16명, 金氏 14명, 李氏 10명, 朴氏 6명, 琴氏 5명, 姜氏 4명, 宋·申氏 3명, 呂·鄭氏 2명, 權·羅·盧·孫·全氏 1명이며 다수의 성씨는 단연 옥동서원의 배향자 3명의 후손 장수황씨가 압도적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서원의 성격이 문중서원화 되어 가던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런 문중화는 곧 지역사림의 서원 참여율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당시 상주 재지사족에 의해 운영되었던 향촌기구의 하나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또 다른 배향자 전식의 후손 옥천전씨는 단 1명뿐 그 차이가 확연하다. 사실 배향자 전식의 후손인 옥천전씨 가문은 서원 중건 때부터 참여가 저조하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참여치 않고 있었다. 다만 원장으로 등재된 4명 중에는 장수황씨는 1명뿐이고, 姜杭·盧思義·李增曄이 각각 1명씩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는 지역 내 명망 있는 인사들을 원장으로 임명하여 서원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특히 강항(1702∼1787)은 본관은 진주, 자는 而直, 호는 市北으로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을과 6위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에 이르렀다. 그는 호조좌랑이 되어 염전세에 부정을 적발하기 위하여 호남 지방으로 나가니 도백과 수령이 모두 범한 것이 있어 평소에 잘 아는 자로 하여금 타협하고자 하거늘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때 臺諫의 고의적인 탄핵으로 인하여 파직된 당대 상주의 대표적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증엽은 본관은 흥양으로 1710년(숙종 36) 진사시에 입격한 인물이다.
자료적 가치
『준분록』은 18세기 옥동서원의 운영층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자료에 나타난 인물들은 대부분 황희 후손 장수황씨들이 서원의 운영에 깊이 관련하고 있었던 인사들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옥동서원이가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내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향사 집사분정의 양상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