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曆(1573-1619)年間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玉山書院의 春秋享祀시 儀禮절차를 기록한 笏記
萬曆(1573-1619)年間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玉山書院의 春秋享祀시 儀禮절차를 기록한 笏記이다. 본 笏記는 옥산서원 설립 초기에 사용되었던 笏記로 추정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현재 옥산서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享祀笏記와 비교하여 보다 간소화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서원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인 1572년에 건립되었기에 그 이전에 건립된 紹修書院과 伊山書院의 院規와 儀禮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본 홀기 역시 소수서원 홀기와 거의 같은데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만을 獨享한다는 점에서 보다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또한 再拜시의 구령도 생략하였다. 현재 향사에 사용하는 홀기에는 모두 들어가 있다. 또한 향사에 참여하는 집사도 삼헌관을 제외하고 大祝, 謁者, 贊者 만이 확인된다. 현재 이들 외에도 贊引, 判陳設, 司樽, 奉香, 奉爐, 奉爵, 奠爵, 掌饌, 掌牲, 盥洗位 등이 있다. 이것은 영남의 다른 서원에서도 동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7세기 초반 제작된 永川 臨皐書院의 『書院規範』을 보면 祭官에는 三獻官과 대축 등의 집사들이 옥산서원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獻官預差 1인을 두고서 헌관의 궐향에 대비하고 있으며, 贊引은 사람이 없으면 알자가 겸하도록 했다. 실제 옥산서원 홀기에서도 謁者가 贊引을 겸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외에 봉향이 준작을 겸하고, 봉로가 봉작을 겸하며, 장찬이 진설을 겸하도록 했다. 관세위는 1명을 두되 사람이 없으면 세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즉 이를 참고하면 향례시 필요한 최소인원은 헌관을 제외하고, 축 1원, 찬자 1원, 알자 1원, 사준 1원, 봉향 1원, 봉로 1원, 장찬 1원 등 7명이다. 옥산서원 홀기에서는 이 가운데 알자와 찬자, 대축의 역할만이 확인된다. 대축은 축문을 읽는데, 그 祝式은 笏記에 부기되어 있다. 찬자와 알자는 헌관과 참사자를 바른 동선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헌관을 직접 인도하는 것은 이중 알자의 역할이다. 사준은 헌관이 잔을 올릴 때 따르고 건네주는 등의 도움을 주며, 봉향과 봉로는 초헌관이 집행하는 분향례 때 역할 한다. 장찬은 제물을 진설하고 그것이 잘 되었는지 판단하며, 향사가 끝나면 제물을 수습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홀기는 향사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인원별 순서와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사준, 봉향, 봉로, 장찬 등의 역할이 홀기에 기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 홀기에서는 이들의 역할을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향사 의례에 대한 절차가 정비되던 시점이었으며, 한편으로는 향사에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옥산서원 『執事記』(1585.2~1630.8)에서도 확인된다. 즉 초창기 春秋享祀에 3명의 獻官과 7~10명의 집사 외 2~7명의 유생들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또한 현행 홀기에는 學生의 순서가 명시되었지만 본 홀기에서는 이들이 확인되지 않는다. 향례의 순서는 참석자 모두가 진설을 확인한 후 분향례를 행하고, 이어서 奠幣禮 →初獻禮→亞獻禮→終獻禮→飮福禮→撤邊豆→望燎禮의 순서로 행해지는데, 오늘날의 향사와 동일한 순서이다. 홀기의 좌측 단에는 祝文 서식이 남아있다. "萬曆某年"이라고 제문의 날짜를 부기한 것으로 보아서 만력연간(1573-1619)에 제작된 홀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홀기는 옥산서원의 초창기 향사 절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