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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20년경 「산천당회중래문(山泉堂會中來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20.2771-20180630.Y187010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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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동서원, 산천당회, 도동서원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920
형태사항 크기: 29.5 X 20.5
수량: 04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안내정보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 소장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 수록 1920년경 「산천당회중래문(山泉堂會中來文)」
1920년경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군(榮州郡)의 산천당회(山泉堂會) 유림이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도동서원(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각처통문등초(各處通文謄草)』 제1(第一)에 「산천당회중래문(山泉堂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산천당회 측은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 봉안과 관련해 의견을 묻고자 본 통문을 발급하였다.
「정지교부계회도」는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한양(漢陽)에 있을 때, 송석충(宋碩忠)[1454~1524최부(崔溥)[1454~1504], 박담손(朴聃孫)·신희연(申希演)과 더불어 강회(講會)하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영주에 세거하던 송석충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다. 앞서 송석충영주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祭享)되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고종 5) 철폐된 상태였다. 이에 후손들이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하는 영각(影閣)을 건립하여 송석충을 추모하려고 했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김굉필을 제향한 도동서원에 의견을 묻기 위해 본 통문을 발급하였던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920년경 慶尙北道 榮州郡의 山泉堂會 유림이 金宏弼의 흔적이 담긴 「情志交孚契會圖」의 봉안과 관련해, 의견을 묻고자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20년경 慶尙北道 榮州郡의 山泉堂會 유림 宋賢燦·宋奎泰·宋啓欽·宋寅五·宋?煥·宋在洛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山泉堂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발급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情志交孚契會圖」를 봉안한 山泉書堂1920년 공사 시작 1개월 만에 완성된 점을 고려할 때, 본 통문도 1920년경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당회중래문」은 「정지교부계회도」 봉안과 관련해 도동서원 측에 의견을 묻고자 발급되었다. 「정지교부계회도」는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이 訥齋 宋碩忠[1454~1524], 錦南 崔溥[1454~1504], 靈川 朴聃孫, 崇陽 申希演漢陽 好賢坊에서 講會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영주에 세거하고 있던 송석충의 冶爐宋氏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에 송석충 후손들이 1920년경 山泉書院의 옛 터에다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하는 影閣 건립은 추진하게 되었는데, 산천서원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있었던 서원으로 원래 송석충을 제향해 왔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1920년경 다시 송석충을 추모하고자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한 영각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유림의 의견을 묻기 위하여, 김굉필을 제향하고 있는 도동서원에 본 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결국 영각 건립은 1920산천서당 완공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 과정은 1920년 9월 金世洛[1854~1928]이 쓴 「山泉書堂記」에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산천당회중래문」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송나라 때 濂洛의 諸賢은 道義로 서로 교제하여 遺像이 一祠에 안치되었으며, 河陜의 諸公은 名位가 서로 계승되어 ?影이 一閣에 걸려 있으니, 이때 風韻하던 습속은 오히려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로 교제하던 명현의 초상을 함께 봉안한 사례를 전제한 것이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畢齋 金宗直[1431~1492]이 학문을 창도하여 孔子·孟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 程子의 학문을 이어 나갔는데, 그것의 嫡傳을 얻어 一世에 크게 떨친 자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으로 이미 오랫동안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道를 배우게 하여 잃지 않게 하였으니, 공자·맹자의 학문을 계승한 우리나라에서는 김굉필 선생의 德이 盛하게 되었다고 평가해 놓았다. 그러면서 우리 선조 눌재공 송석충김굉필 선생과 함께 공부한 同門·同庚이고, 한양호현방에서 최부·박담손·신희연 등과 同居하였는데, 이로써 이들의 뜻이 믿음으로 맺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김굉필을 따라 강학할 때, 강회하던 차례, 당시의 古宅, 꽃과 나무가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이것이 이른바 「정지교부계회도」라고 하면서, 그림의 제작 배경을 설명해 놓았다. 이어 우리 선조 송석충은 戊午士禍의 조짐을 미리 알고 병을 칭해 소백산 남쪽으로 내려왔기에 黨禍의 網打로부터 초연할 수 있었으나, 흉보를 들은 날에는 문득 悼文을 지어 나아가 조문하였고, 저술을 모두 불에 태워 소멸시켜 버렸으며, 끝내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과 자취가 숨겨진 것이 더욱 비통하다고 하였다. 그 후 영주의 유림들이 선조가 은거한 터에다가 서원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산천서원인데, 1868년(고종 5) 철폐된 이후부터 鞠草가 날로 무성하게 되었고, 絃誦은 오랫동안 끊겼으며, 이 狂瀾을 挽回하는 데에는 기약 없이 세월만 흘러 산과 하천이 다르게 되고, 상하 위치가 거꾸로 되었으니, 누가 儒先을 歆饗하지 않는 것을 알겠으며, 이는 실로 世道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하지만 지금 錦陽을 보면 완전히 없어지라는 이치는 없기에, 어두운 길에서 다시 촛불을 밝힐 기약이 생겨, 儒宮이 復設되고 學舍가 장차 興하여 많은 선비들이 依歸함이 이로부터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금양黃俊良[1517~1563]을 추모하던 錦陽精舍로 추정된다. 원래 황준량영주 郁陽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 서원이 철폐된 후 유림들이 금양정사를 세워 황준량에 대한 추모와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이를 본 받아 송석충 후손들은 산천서원의 옛 터에다가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한 영각 건립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어 통문에서는 이러한 영각 건립을 통해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것을 폐하지 않고, 매년 여름에는 詩禮를 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공사에 앞서 김굉필 선생을 봉안한 本院, 즉 도동서원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로 1~2員을 보내 통문을 전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통문 말미에는 「정지교부계회도」가 그려진 강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긴 뒤, 도동서원 측에서 선현을 위하는 정성과 추모하는 뜻을 살피어, 회답 해 줄 것을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촌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유학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일족 간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각종 崇祖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던 院祠가 대거 복설되었는데,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산천서당도 앞서 철폐되었던 산천서원을 계승한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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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右〕山泉堂會中來文【宋賢燦宋奎泰宋啓欽宋寅五宋?煥宋在洛
右通諭事伏以諸賢道義相授而遺像之安於
一祠河陜諸公名位相承而?影之揚於一閣子孫
之追慕爲一人士之景仰無二?自有而風韻之
俗尙猶不逮於我東矣惟我?畢齋金先生倡學於
東溯之源啓之緖而得其嫡傳丕振一世
寒暄先生是已使百世之冠儒服儒者講先生之
道不失吾之東邦則先生之德盛矣哉生等先
訥齋公與先生學則同門年則同庚而又同居於
京城好賢坊崔錦南溥朴靈川聃孫申崇陽希

演諸賢結情志交孚於先生之第圖帖之遺影古宅
之花木?今奉翫宛然若昨日事則其爲後孫者雖
百世而如一日彛衷之所同也吾先祖炳幾於戊午
托疾南下隱於小白之陽超然於黨禍之網打而承
凶之日輒爲悼文向方以弔悉掃著述而幷界炎火
杜門以終其世其志其迹隱而益悲矣其後榮州
章甫設院於先祖考槃之墟則山泉是也自戊辰
院之後鞠草日深絃誦久絶狂瀾之挽回無期而況
山河異矣冠裳倒矣孰知儒先之不享實爲世道之
淪降哉見今錦陽無可盡之理昏衢有復燭之期儒

宮復設學舍將興則多士之依歸自此有所耶生等
方營五賢影閣於山泉院墟庶幾俎豆之不廢於春
秋詩禮之不廢於各夏不忘吾五賢之遺風餘韻於
尤不敢不奉告於先生之本院故玆送一二員齎通
而南蓋情志契帖是先生當日交孚之盛迹則年相
若道相似後生末學之固不敢妄擬而情同志孚講
之不已不以山河之邈而有所間焉則其心卽五先
生昔日相孚之遺意也況遺影之合享始於今則先
生在天之靈寧不洋洋與之陟降於斯耶以僉尊爲

先之誠追賢之志俯賜裁答開視季世之盛意以賁
多士之觀聽千萬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