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경 慶尙北道 榮州郡의 山泉堂會 유림이 金宏弼의 흔적이 담긴 「情志交孚契會圖」의 봉안과 관련해, 의견을 묻고자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
各處通文謄草 第一
자료의 내용
1920년경 慶尙北道 榮州郡의 山泉堂會 유림 宋賢燦·宋奎泰·宋啓欽·宋寅五·宋?煥·宋在洛 등이 경상북도 達城郡의 道東書院 유림에게 보낸 통문이다. 이 통문은 도동서원에서 엮은 『各處通文謄草』 第一에 「山泉堂會中來文」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료에 발급 시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情志交孚契會圖」를 봉안한 山泉書堂이 1920년 공사 시작 1개월 만에 완성된 점을 고려할 때, 본 통문도 1920년경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당회중래문」은 「정지교부계회도」 봉안과 관련해 도동서원 측에 의견을 묻고자 발급되었다. 「정지교부계회도」는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이 訥齋 宋碩忠[1454~1524], 錦南 崔溥[1454~1504], 靈川 朴聃孫, 崇陽 申希演과 漢陽 好賢坊에서 講會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영주에 세거하고 있던 송석충의 冶爐宋氏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에 송석충 후손들이 1920년경 山泉書院의 옛 터에다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하는 影閣 건립은 추진하게 되었는데, 산천서원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있었던 서원으로 원래 송석충을 제향해 왔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1920년경 다시 송석충을 추모하고자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한 영각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유림의 의견을 묻기 위하여, 김굉필을 제향하고 있는 도동서원에 본 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결국 영각 건립은 1920년 산천서당 완공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 과정은 1920년 9월 金世洛[1854~1928]이 쓴 「山泉書堂記」에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산천당회중래문」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송나라 때 濂洛의 諸賢은 道義로 서로 교제하여 遺像이 一祠에 안치되었으며, 河陜의 諸公은 名位가 서로 계승되어 ?影이 一閣에 걸려 있으니, 이때 風韻하던 습속은 오히려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로 교제하던 명현의 초상을 함께 봉안한 사례를 전제한 것이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畢齋 金宗直[1431~1492]이 학문을 창도하여 孔子·孟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 程子의 학문을 이어 나갔는데, 그것의 嫡傳을 얻어 一世에 크게 떨친 자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으로 이미 오랫동안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道를 배우게 하여 잃지 않게 하였으니, 공자·맹자의 학문을 계승한 우리나라에서는 김굉필 선생의 德이 盛하게 되었다고 평가해 놓았다. 그러면서 우리 선조 눌재공 송석충은 김굉필 선생과 함께 공부한 同門·同庚이고, 한양의 호현방에서 최부·박담손·신희연 등과 同居하였는데, 이로써 이들의 뜻이 믿음으로 맺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김굉필을 따라 강학할 때, 강회하던 차례, 당시의 古宅, 꽃과 나무가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이것이 이른바 「정지교부계회도」라고 하면서, 그림의 제작 배경을 설명해 놓았다. 이어 우리 선조 송석충은 戊午士禍의 조짐을 미리 알고 병을 칭해 소백산 남쪽으로 내려왔기에 黨禍의 網打로부터 초연할 수 있었으나, 흉보를 들은 날에는 문득 悼文을 지어 나아가 조문하였고, 저술을 모두 불에 태워 소멸시켜 버렸으며, 끝내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과 자취가 숨겨진 것이 더욱 비통하다고 하였다. 그 후 영주의 유림들이 선조가 은거한 터에다가 서원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산천서원인데, 1868년(고종 5) 철폐된 이후부터 鞠草가 날로 무성하게 되었고, 絃誦은 오랫동안 끊겼으며, 이 狂瀾을 挽回하는 데에는 기약 없이 세월만 흘러 산과 하천이 다르게 되고, 상하 위치가 거꾸로 되었으니, 누가 儒先을 歆饗하지 않는 것을 알겠으며, 이는 실로 世道가 떨어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하지만 지금 錦陽을 보면 완전히 없어지라는 이치는 없기에, 어두운 길에서 다시 촛불을 밝힐 기약이 생겨, 儒宮이 復設되고 學舍가 장차 興하여 많은 선비들이 依歸함이 이로부터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금양은 黃俊良[1517~1563]을 추모하던 錦陽精舍로 추정된다. 원래 황준량은 영주 郁陽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 서원이 철폐된 후 유림들이 금양정사를 세워 황준량에 대한 추모와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이를 본 받아 송석충 후손들은 산천서원의 옛 터에다가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한 영각 건립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어 통문에서는 이러한 영각 건립을 통해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것을 폐하지 않고, 매년 여름에는 詩禮를 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공사에 앞서 김굉필 선생을 봉안한 本院, 즉 도동서원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로 1~2員을 보내 통문을 전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통문 말미에는 「정지교부계회도」가 그려진 강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긴 뒤, 도동서원 측에서 선현을 위하는 정성과 추모하는 뜻을 살피어, 회답 해 줄 것을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 향촌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유학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일족 간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각종 崇祖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던 院祠가 대거 복설되었는데, 「정지교부계회도」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산천서당도 앞서 철폐되었던 산천서원을 계승한 것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