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7월 高山書堂에서 大山 李象靖을 제향하는 廟宇를 創建하여, 奉安式을 거행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
1917년 7월 高山書堂에서 大山 李象靖을 제향하는 廟宇를 創建하여, 奉安式을 거행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韓山李氏 大山 李象靖[1711-1781]을 제향했던 高山書院은 그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1768년 건립한 高山精舍가 전신이다. 사후에 그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향촌 사림들의 공의로 1789년 강당인 好仁堂을 건립하였다. 이후 1827년 강당을 이건하고, 이듬해에 仰止齋와 靜虛樓를 지었다. 1844년에는 장판각을, 1857년에는 묘우인 景行祠를 짓고, 9월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1868년에 대원군의 원사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17년 다시 대산 선생을 봉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여러 선비들이 정성을 다하여 공사를 마무리하고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새롭게 건설된 묘우와 담당은 마치 고산서원 앞을 흐르는 7곱 굽이 계곡과 산과 같이 새로운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묘우를 건립하여 다시금 향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매우 경사스럽고 축하할 일이기에 斯文에 알려서 모여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고산서당 측은 복되고 길한 날을 잡아서 9월 26일에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기로 정했다고 했다. 성대한 의식이란 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봉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에 본 통문을 보내어 옥산서원 사림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두루 알려서 많은 사림들이 참석해 주길 요청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들어오면서 훼철되었던 서원과 사우의 복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기에 대부분 한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나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가문에서 추진되었다. 이 통문은 당시 복설의 한 사례로서 유림의 공론을 바탕으로 복설의 당위성을 갖추려는 사족들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