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3월 星州 檜淵書堂에서 晦齋 李彦迪의 學文淵源을 문제 삼은 孫氏들을 비판하고, 손씨를 옹호하는 글을 쓴 退溪의 後孫들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玉山書院으로 보내온 通文
1906년 3월 星州 檜淵書堂에서 晦齋 李彦迪의 學文淵源을 문제 삼은 孫氏들을 비판하고, 손씨를 옹호하는 글을 쓴 退溪의 後孫들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玉山書院으로 보내온 通文이다.
통문을 보면 『愚齋先生實紀』에서 淵源道脈을 晦齋 李彦迪에게 傳授하였다고 하고, 회재의 후손들이 그에 대하여 辨說을 하였다고 한다. 다만 회연서당측은 400년 전의 일이기에 後人들이 그 실제 자취를 궁구할 수 없으며, 300리나 떨어져 있어서 참관하거나 들을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退溪 李滉이 지은 晦齋의 狀德文에서는 從遊나 受業은 보이지 않고, 授受한 곳이 없다는 등이 남아있으니 두 가문의 是非는 이미 완료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 홀연히 퇴계의 후손이라는 자들이 갑작스레 자신의 글을 先賢의 문집 뒤에 붙이려는 영광으로 인해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先祖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죄를 지었으니 애석하다고 했다. 또한 眞城李氏 3인의 말이 비록 대현의 道脈을 전하는 것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에는 부족하더라도, 특히 陶山의 후예로서 다른 자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여 바꾸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손이시비는 『愚齋實紀』를 편찬하면서 李象靖의 상량문 문구 중에서 ‘淵源道脉’를 附註하고, 나아가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孫海翼, 孫最秀 등이 이언적의 학문이 孫仲墩에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詩와 跋文을 진성이씨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에게서 얻어 싣고 이를 반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손씨측이 이 실기를 중간하면서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문을 받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손씨측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하여 회연서당은 옥산서원에서 진성이씨 후손들을 꾸짖어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하고, 그들이 깨닫지 않는다면 통문으로 알려서 함께 살펴서 엄히 하소연하여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자료적 가치
영남의 3대 시비의 하나였던 손이시비와 관련된 통문이다. 한 동네에서 수백 년간 살았던 손씨와 이씨 가문은 경주와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이들 가문의 대결은 향내 사족들을 분열시키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회재의 학문연원은 사림 전체의 도통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시비이기도 하다. 본 통문은 당시 성주 회연서원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