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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도유사(都有司) 유학(幼學) 권도원(權道源) 등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902.0000-20180630.Y1880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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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욱성, 옥산서원
작성시기 1902
형태사항 크기: 92.5 X 68.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902년 도유사(都有司) 유학(幼學) 권도원(權道源) 등 통문(通文)
1902년 2월 도유사 권도원 등이 안동 가구리의 감원정 터에 투장한 안동부 향리 권좌금을 처벌하자는 의견에 서명하지 않는 경주 사림을 설득하기 위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온 통문이다. 통문에서는 회곡 권춘란(1539-1617)이 만년에 지은 감원정이 무너지고 터만 남은 지 수백년이 되었지만 그의 묘지명과 선현들의 시에 그 유풍이 잘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문인들의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기로 논의하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안동부 향리 권좌금이 그의 아버지를 그 터에다가 투장하였다. 안동 사림들의 이것은 사문의 극변이자, 풍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서, 부군사에게 진정하고 연계하여 도내 여러 고을에서 유림들의 서명을 광범위하게 받았다. 즉 공론을 수렴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경주지역은 권춘란의 후손들이 거주하기에 그들에게 연명을 받도록 했지만 경주의 사림들이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연명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권도원 등은 경주 사림들을 설득하고자 본 통문을 보내어 감원정을 건립하여 도내 사림이 모두 함께 공경하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2년 2월 都有司 權道源 등이 鑑源亭 터에 偸葬한 府吏 權佐金을 처벌하자는 의견에 聯名하지 않는 慶州 士林을 설득하기 위하여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1902년 2월 都有司 權道源 등이 鑑源亭 터에 偸葬한 府吏 權佐金을 처벌하자는 의견에 聯名하지 않는 慶州 士林을 설득하기 위하여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이다. 발송처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통문에서는 濂溪가 지은 蓮峯書室과 朱子가 지은 竹林精舍는 모두 사림과 관계된 것으로서 숭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처럼 晦谷 權春蘭(1539-1617)이 만년에 佳邱里의 냇가 바위에 지은 鑑源亭도 그가 퇴계의 고제이고, 유림의 師表가 되는 인물이기에 존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현재 감원정이 무너지고 터만 남은 지 수백년이 되었지만 寒岡 鄭逑와 栢譚 具鳳齡이 지은 詩와 淸陰 金尙憲이 지은 권춘란의 墓誌銘에 그 遺風이 잘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문인들의 후손들이 중건하기로 의견을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府吏 權佐金이 그의 아버지를 주춧돌을 나열한 곳에다가 偸葬하였다. 이것은 안동 사림들의 공분을 사서 斯文의 極變이자, 風化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府郡事에 진정하고, 유림에 있어서 한 면과 한 고을의 사건이 아니기에 유생을 정하여 列邑에서 광범위하게 署名을 받았다. 경주에는 권춘란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별도로 유생을 보내지 않고 그들에게 대신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통문에서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 후 현재 경주지역 사림들이 믿을 수 있는 기록(信蹟)이 없다고 연명을 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권도원 등은 경주사림들이 그 사건의 顚末을 알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보았다. 억압한 것 또한 그 사람에게 들은 것은 없기에 그러하다고 보았다. 즉 한쪽 편만의 일방적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또한 만약 그 사람과 대화를 했다고 해도, 명첩에 서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면서 만약 연봉서실이나 죽림정사가 홀로 옛날부터 아름다웠던 것은 아닌 것처럼 새로운 터와 옛터를 함께 정리하여 즐거워지길 바란다고 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말 이래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山訟의 한 사례이다. 공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그에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論事濂溪蓮峯書室晦菴竹林精舍皆有關於斯文者尙矣而惟我 晦谷權先生鑑源亭又其一也先生卽
退陶夫子之高弟也 宣廟朝侍從儒臣也其道德文章菀然爲 朝家之歎儒林之師表也逮至晩年築一亭子於佳邱泉石之勝扁之曰
者盖取半畝方塘一鑑開爲有源頭活水來之義當日 鄭寒岡具栢潭兩先生題詠之吟賞之 淸陰金先生撰墓誌曰鑑源之亭山若增高
水若增淸云誰之宅其人如玉此皆載在遺集中 僉尊之曾所共知而鄭等之更不可贅說也夫斯亭也頹而墟者數百年于玆矣其遺風餘韻永久流芳
於杖屨經履之地几人之路於址下者靡不有兎葵燕麥之感而況於親炙之後裔乎方議重建者雅矣不意年前府吏權佐金偸埋其父於平日藏修列礎之
地此是斯文之極變風化之所關也鄙等齊聲齎憤擬呈府郡事係儒林則非一面一鄕之事也以之定儒生廣取名啣於列邑而 貴鄕則以先生後承之
僑在者替告矣 僉議何如而以本院之無信蹟爲止重須未知其事之顚末而然耶抑亦其人之無聞而然歟彩洪甫卽名家后裔而轉泊萍鄕無乃
有渡淮之歎且若以其人之交疎不許名牒乎苟若快滌穢氛重新舊址則吾林之大倖而蓮峯之室竹林之舍奚獨專美於古耶伏願
僉君子同聲寓慕俾敦大事之地千萬善甚
右通文
玉山書院
壬寅二月十六日 都有司幼學權道源
有司安敎庠
金永甲
製通鄭象欽
安燦重
金永國
寫通權秉誠
安承國
鄭承謨
具然泰
會員金正欽
鄭達逵
安敎振
李章文
進士李郁成
幼學具然道
安敎黙
鄭承武
權秉常
安夔欽
金永胤
柳益榮
李玉成
金傳鉉
具碩魯
安秉鎬
權相達
李廷夔
金攴鉉
安承謨
鄭承和
金悅鉉
柳河榮
權相璣
具然浡
柳晩榮
柳濬榮
安承緖
金永洵
權大永
李宜春
安鼎鎔
鄭義逵
安宅重
鄭思欽
權濬夏
鄭宅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