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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영천(永川) 창녕조씨(昌寧曺氏) 문중(門中)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83.0000-20180630.Y18801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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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옥산서원, 창녕조씨 문중
작성시기 1883
형태사항 크기: 80 X 60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883년 영천(永川) 창녕조씨(昌寧曺氏) 문중(門中) 통문(通文)
1883영천의 창녕조씨 문중에서 금오사터에 경주의 김모가 투장을 하였으며, 이를 파내고 감영과 경주부에 하소연하여 그 못된 버릇을 징벌해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통문을 보면 대원군의 원사 훼철이후 매월당 김시습을 제향하던 금오사가 사라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영천의 창녕조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이 소문으로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지난해에 금오사터에 투장을 했다고 들었다고 한다. 조씨들은 선현을 제향하던 곳에 사사로이 무덤을 쓰는 것은 세상의 도리가 극변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조 조상치와 김시습이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자신들은 먼 곳에 떨어져 있기에 부득이 옥산서원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이러한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옥산서원에서 경주의 공론을 끌어내어서 김씨를 감영과 경주부에 진정을 하여 잘못된 버릇을 징벌하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이 통문은 대원군의 원사훼철이후 옥산서원이 경주를 대표하는 서원이자, 향론을 주도하는 곳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83永川의 昌寧曺氏 門中에서 金烏祠터에 慶州의 金某가 偸葬을 하였으며, 이를 파내고 監營과 慶州府에 呈訴하여 그 못된 버릇을 懲罰해주길 요청하는 通文
1883永川의 昌寧曺氏 門中에서 金烏祠터에 慶州의 金某가 偸葬을 하였으며, 이를 파내고 監營과 慶州府에 呈訴하여 그 못된 버릇을 懲罰해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통문을 보면 대원군의 원사 훼철이후 梅月堂 金時習을 제향하던 金烏祠가 사라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금오사터를 지나는 사람들 마다 아무개 선생을 제향하던 터라고 말하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김시습을 제향하던 건물이 사라지고 빠르게 그의 존재가 잊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 통문에서는 김시습을 제향하던 건물을 금오사라고 하지만 『東京雜記』 등에서는 梅月堂影堂, 梅月堂祠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당은 김시습이 寓居하였던 金鰲山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永川의 昌寧曺氏 문중에서는 지금 자신들이 소문으로 듣기로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지난해에 금오사터에 偸葬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세상의 도리가 극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렇게 나서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先祖인 靜齋 曺尙治와 金時習이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에 투장 소식을 듣고도 한 장의 종이로만 고하게 된 것에 대하여 後人으로서 부끄럽게 여긴다고 전했다. 창녕조씨 가문에서 옥산서원으로 통문을 보낸 것은 당시 대원군의 훼철령 이래로 경주에서는 서악서원과 향교, 옥산서원이 향론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경주부내에 위치한 서악서원과 향교는 소위 庶派들이 운영을 주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通婚과 소통을 이어온 옥산서원에 투장한 것을 발굴하고, 나아가 투장한 김씨를 공론으로서 呈訴하여 처벌하여 頑習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창녕조씨들은 김시습이 경주로 은거하여 생을 마쳤으며, 오랜 기간 동안 제향을 해오다가 훼철되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현인을 사모하고 보호하는 도리는 유생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조씨들처럼 직접적인 인연이 없더라도 경주지역에서 오랫동안 제향을 이어오면서 존숭해온 선현이므로, 경주에 살고 있는 김씨가 유허지를 훼손했으므로, 경주 사림의 공론으로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대원군의 원사훼철이후 선현을 존숭하는 다양한 방법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원사의 遺址가 활용되었던 한 사례를 확인시켜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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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論事伏以尊賢衛學之誠其於杖屨之所猶尙景仰而況乎百年俎豆之遺墟乎慕
賢共護之道旣在章甫之列必無異同而又況先世交友後昆乎噫竊伏念 貴鄕金烏祠卽梅月
堂金先生曾所尸祝之所也近自掇享之後雖在行路之人過其山下則掯點而歔欷曰某山某邱某先
生尸祝之遺址云有此傳說豈非百世之口碑乎且先生有志於所事逃世於此山之間以終焉竊想淸
寒靈精陟降於此而亘百世而不沒也高山仰止孰不欽歎哉至於生等尤有別焉靜齋先祖秉節
而南歸也與先生志意相符誓同終始而分張永慶之間者良以此也以祖先之志志之則尊尙之意
尤爲何如哉今聞金烏祠墟 貴鄕金姓云者偸埋過年云此非世道之極變乎生等居在百里之內而
今始時聞一紙文論亦在人後不勝愧恧伏望 僉君子另念齊聲從逑掘去而且呈營邑徵其
頑習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乙亥四月初一日發文曺陽復
曺光復
曺慶萬
曺錫斗
曺文振
曺奎承
曺輔承
曺禹承
曺啓洪
曺聖承
曺秉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