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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안동 화천서당(花川書堂) 회중(會中)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F.1870.0000-20180630.Y18801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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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옥산서원, 화천서당 회중
작성시기 1870
형태사항 크기: 103 X 6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870년 안동 화천서당(花川書堂) 회중(會中) 통문(通文)
1870년 11월 15일 안동 화천서당 회중에서 겸암 류운용을 제향하는 화천서원의 복설과 관련하여 11월 25일에 도회를 개최하니 옥산서원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통문이다. 1868년 대원군의 원사 훼철령 당시 사액 원사를 제외한 모든 서원과 사우가 훼철되었다. 화천서원 역시 미사액 서원이었기에 훼철되었다. 그러나 화천서당 회원들은 서원에서 賢人을 높이는 것은 사림의 우러러는 것에 의지한다고 하였다. 즉 서원의 건립은 사림의 자율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문경공 겸암 류운용을 주향으로 하는 화천서원이 사액을 받을 겨를도 없이 훼철되었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정부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안 좋아졌으며, 안동의 여러 유생들이 의논하여 궁문에 나아가 하소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목표는 정해졌지만 더 많은 공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능동재사에서 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옥산서원에 알려왔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70년 11월 15일 安東 花川書堂 會中에서 謙菴 柳雲龍을 제향하는 花川書院의 毁撤과 관련하여 11월 25일에 道會를 개최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
1870년 11월 15일 安東 花川書堂 會中에서 謙菴 柳雲龍을 제향하는 花川書院의 毁撤과 관련하여 11월 25일에 道會를 개최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1868년 대원군의 원사 훼철령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 그 대상은 미사액 서원과 사우였다. 화천서원도 당시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71년의 사액서원 훼철 시까지 영남의 훼철된 서원 중 그 고을을 대표하는 서원 내지 名儒를 제향하는 서원에서는 復設을 추진하였다. 다만 禁令으로 인해 이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기에 道會를 통해 여론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일례로 1870년 윤10월의 尙州 愚山書院은 愚伏 鄭經世를 제향하는 곳이었으나 훼철된 후 다시금 복설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안동의 화천서원에서도 복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鄕會를 거쳐서 보다 폭넓게 여론을 모으기 위해 道會를 개최하려고 본 통문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통문을 보면 화천서원 회중에서는 편액을 서원에 내리는 것은 조정에서 崇獎하는 것이며, 서원에서 賢人을 높이는 것은 士林의 依仰하는 바라고 했다. 그러면서 花川書院은 곧 文敬公 謙菴 柳雲龍을 主享하는 곳으로 특별히 賜額을 받을 겨를도 없이 毁撤하는 것에 섞여 들어갔다고 했다. 그 이후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서원이 없어지자 일반적인 여론이 안 좋아졌으며 그것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고 했다. 즉 미사액 서원으로서 훼철된 후 계속 여론이 안 좋게 흘러왔던 그간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천서당 회원들은 서원을 훼철하는 것은 여러 임금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높여 장려하던 지극한 뜻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안동의 유생들이 충분히 의논하여 宮門에 다가 부르짖으러 가기로 하고 이번달 25일에 안동부 陵洞의 河上齋舍에서 道會를 개최하기로 정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현을 尊衛하는 정성은 서로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한을 넘기지 말고 도회에 임하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들어오면서 훼철되었던 서원과 사우의 복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기에 대부분 한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나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가문에서 추진되었다. 이 통문은 당시 복설의 한 사례로서 유림의 공론을 바탕으로 복설의 당위성을 갖추려는 사족들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論事伏以 額以宣院 朝家之所崇獎也院以尊賢士林之所依仰也惟我花川書院文敬公謙菴柳先生主享之所而特
以未遑延 額混入於毁撤之中多士之瞻仰無地輿情之齎鬱愈湥而 列聖朝爲先生終始崇獎之至意可不思所報答
其萬一也哉玆與一方章甫爛商叫 閽之擧以本月二十五日定道會于本府陵洞之河上齊舍竊想 僉君子尊衛之誠必無
異同望源趁期光臨以敦大事倖甚
右通文
玉山書院
庚午十一月十五日花川書堂會中 公事員幼學安秉魯
金眞均
曺司 幼學金鍾八
金洛洪
製通 幼學李秉昇
權昌銖
寫通 幼學權準益
進士李卿佐
會員 幼學柳周睦
金性存
柳追詩
進士李秉綸
幼學安潤海
柳道璜
權璋
柳追夏
權應奎
柳道軾
金翰周
柳道重
進士柳追鳳
柳孝睦
李右哲
幼學柳致春
金鳳欽
柳政佐
柳靖祚
金日淳
前參奉柳宇睦
前承旨柳道墨
幼學鄭壽一
柳道洙
前正言柳道昌
進士金相寅
柳道夔
幼學權宗勳
柳道獻
柳愿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