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11월 15일 安東 花川書堂 會中에서 謙菴 柳雲龍을 제향하는 花川書院의 毁撤과 관련하여 11월 25일에 道會를 개최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
1870년 11월 15일 安東 花川書堂 會中에서 謙菴 柳雲龍을 제향하는 花川書院의 毁撤과 관련하여 11월 25일에 道會를 개최하니 玉山書院에서도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이다.
1868년 대원군의 원사 훼철령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 그 대상은 미사액 서원과 사우였다. 화천서원도 당시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71년의 사액서원 훼철 시까지 영남의 훼철된 서원 중 그 고을을 대표하는 서원 내지 名儒를 제향하는 서원에서는 復設을 추진하였다. 다만 禁令으로 인해 이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기에 道會를 통해 여론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일례로 1870년 윤10월의 尙州 愚山書院은 愚伏 鄭經世를 제향하는 곳이었으나 훼철된 후 다시금 복설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안동의 화천서원에서도 복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鄕會를 거쳐서 보다 폭넓게 여론을 모으기 위해 道會를 개최하려고 본 통문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통문을 보면 화천서원 회중에서는 편액을 서원에 내리는 것은 조정에서 崇獎하는 것이며, 서원에서 賢人을 높이는 것은 士林의 依仰하는 바라고 했다. 그러면서 花川書院은 곧 文敬公 謙菴 柳雲龍을 主享하는 곳으로 특별히 賜額을 받을 겨를도 없이 毁撤하는 것에 섞여 들어갔다고 했다. 그 이후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서원이 없어지자 일반적인 여론이 안 좋아졌으며 그것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고 했다. 즉 미사액 서원으로서 훼철된 후 계속 여론이 안 좋게 흘러왔던 그간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천서당 회원들은 서원을 훼철하는 것은 여러 임금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높여 장려하던 지극한 뜻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안동의 유생들이 충분히 의논하여 宮門에 다가 부르짖으러 가기로 하고 이번달 25일에 안동부 陵洞의 河上齋舍에서 道會를 개최하기로 정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현을 尊衛하는 정성은 서로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한을 넘기지 말고 도회에 임하면 다행이겠다고 했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들어오면서 훼철되었던 서원과 사우의 복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였기에 대부분 한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나 강력한 경제력을 갖춘 가문에서 추진되었다. 이 통문은 당시 복설의 한 사례로서 유림의 공론을 바탕으로 복설의 당위성을 갖추려는 사족들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