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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2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림(士林) 서목(書目)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C.1839.4713-20180630.Y185010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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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서목
작성주체 옥산서원 사림, 경주부윤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57.5 X 44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안내정보

1839년 2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림(士林) 서목(書目)
1839년 2월 6일 옥산서원 사림들은 새로 부인하는 부윤 유장환에게 서목을 올려서 구인당의 화재를 알리고, 감영에 전보하여 강당 중건과 관련된 일을 알리고 지시를 내려주길 요청하는 서목이다. 서목에서는 1839년 1월 28일 화재로 강당과 그곳에 걸려있던 사액현판과 어제제문판등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보고했다. 강당 화재가 단순한 것이 아닌 국왕의 존엄과 관련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을 말하며 감영과 경주부의 도움을 서원이 건립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이를 복원하는 것을 의논하기에 앞서 일의 순서상 감영과 경주부에 알리고 지시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들어가는 건물 중건에 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자하는 의도도 있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39년 2월 6일 玉山書院 士林들은 새로 부인하는 府尹 俞章煥에게 書目을 올려서 求仁堂의 화재를 알리고, 監營에 傳報하여 강당 중건과 관련된 일을 알리고 지시를 내려주길 요청하는 書目
1839년 2월 6일 玉山書院 士林들은 새로 부인하는 府尹 俞章煥에게 書目을 올려서 求仁堂의 화재를 알리고, 監營에 傳報하여 강당 중건과 관련된 일을 알리고 지시를 내려주길 요청하는 書目이다. 옥산서원 강당은 건립이래로 임진왜란의 병화도 이겨냈지만 1839년 1월 28일 화재로 모두 불에 탔다. 그로 인해 강당에 걸려있던 賜額懸板과 備忘記, 정조의 御製祭文板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옥산서원에서는 2월 1일에 공회를 열어 죄를 심리한 후 院任들을 교체하고, 수직한 하인들은 장 50도와 함께 태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옥산서원은 건립 당시부터 부윤과 감사의 적극적은 후원 하에 서원을 건립하고, 사액을 받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강당의 중창을 결의하였지만 강당의 건립은 사림들만이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창건시부터 감영과 경주부가 받쳐졌기에 가능했다고 말하였다. 나아가 지금 화재로 다시 중건하는 것을 사림들이 의결했지만 처음 강당을 건립할 때 관의 힘이 매우 컸으므로 일의 순서상 감영과 경주부에 알리고 방법을 지시받아서 새롭게 중건하기로 기약하였다고 전했다. 이에 경주부윤은 화재를 안타까워하며, 즉시 감영에 보고하겠다고 전했다. 『구인당중건일기』에 의거하면 당시 신임 부윤 유장환이 감영에 보고하였지만, 경상감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사림들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2월 13일 西岳書院에서 鄕會를 개최하여 중건을 결의한 후 중건비용을 분배하고, 각자 업무를 분담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경주부윤과 도내의 사림들에게 알렸다. 그 이후 강당은 감영과 향내외의 적극적인 협조로 1년 만에 완공하여 1840년 3월 7일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문서는 옥산서원 강당 화재 이후 사림들의 대처를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자료로서 일정한 가치가 있다. 서원에 남아있는 『구인당중건일기』를 보완해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옥산서원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19세기 초 경주 옥산서원 강당 중건과 위상 변화」,『한국학연구』57, 이병훈,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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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玉山書院士林書目
本院以去月二十八日夜半失大正堂十間盡爲灰燼東西兩齋亦多燒燬而
御賜扁額及創建時備忘記揭板
正廟朝賜祭文奉 敎揭板俱未色慮熖中燒了斯文之厄會此極士林之依歸無所民等顚倒齊會罔知攸措而不謹典守任司
已爲鐫黜當次守直之院隷亦爲勘罪是在果大抵本院創設在於萬曆壬申宣 額在於翼年癸酉而事體之鄭重規
撫之縝嚴實與他 國學自別矣當初創建之時道伯任相公狀請而首唱之府尹李相公效力而體率焉繼以黃江金尙
書之狀聞而 宣額列邑諸守宰之捐稟而同事其他一經理一邑劃何莫非 營府之所拔力則本院院宇不徒爲一鄕士林一道
章甫之所尊崇而止矣典守二百有餘年龍蛇兵焚之亦所不及而一朝盡八於灰燼之中書院之不可一百無講堂而講堂重創固
非士林錦力之所可擔夯創始規劃院多營府之彈力則目序事勢亦係 營府之軫念玆敢從實仰報爲去乎幸伏望以本
院事體之有異院宇火變之罔測轉報 營門以爲指敎方畧及期重新之地事狀
己亥二月玉山書院士林李































觀此報辭
不勝傷恫爲先
轉報營門
初六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