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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경주(慶州) 동강서원(東江書院) 첩정(牒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C.0000.4713-20180630.Y18801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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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첩정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정치/행정-보고-첩정
작성주체 부윤, 동강서원 당중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형태사항 크기: 66 X 5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갑진년 경주(慶州) 동강서원(東江書院) 첩정(牒呈)
1883년 10월 경주 유학 이옥상·이재황·이능립 외 171명이 분향례를 방해한 이재겸 등의 신유들을 감영에서 직접 조사하여 처벌하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본 상서는 경주에 거주하는 여주이씨 후손들이 연명하여 10월 초하루의 향례시에 신유들이 난입하여 분향을 방해하고 구유들을 폭행하는 사건에 대하여 해당자들을 처벌해주길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상서는 10월 3일에 작성하여 발송한 것으로 12일에 감영에서 회송되었다. 상서에서 보면 적서시비는 이미 60년 전부터 있어왔다. 당시에는 감영과 경주부에서 구유들을 옹호하면서 신유들의 활동을 제약하였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신유들이 적극적으로 원임 진출과 서원 운영권을 장악을 위해 무력 시위도 불사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무리를 지어서 강당에 난입하고, 신문을 에워싸서 구유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신유들이 선출한 유사가 재복도 입지 않고, 묘지기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들어가 분향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나아가 문제가 되었던 10월 초하루 분향례에서는 구유들을 구타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후손의 집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무단행위가 있었다. 이에 분란을 일으킨 무리의 수괴로 지목된 이종수, 이재겸과 신종해, 손성환 등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경상감사 조강하는 이전의 판결문을 회수하고 다시금 철저히 조사하여서 문제를 일으킨 자들에 대하여 엄히 처벌하도록 판결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甲辰年 正月에 東江書院 士林이 院屬들을 軍伍에서 蠲頉해 달라고 慶州府尹에게 올린 牒呈
1883년 10월 慶州 幼學 李玉祥·李在璜·李能立 외 171명이 春享을 闕享하게 한 李在謙 등의 新儒들을 監營에서 직접 조사하여 처벌하길 요청하는 上書이다. 본 상서는 경주에 거주하는 여주이씨 후손들이 연명하여 10월 초하루의 향례시에 신유들이 난입하여 焚香을 방해하고 舊儒들을 폭행하는 사건에 대하여 해당자들을 처벌해주길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상서는 10월 3일에 작성하여 발송한 것으로 12일에 감영에서 回送되었다. 상서에서 보면 적서시비는 이미 60년 전부터 있어왔다. 당시에는 감영과 경주부에서 구유들을 옹호하면서 신유들의 활동을 제약하였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강당에 난입하고, 신문을 에워싸고, 신유들이 선출한 유사가 齋服도 입지 않고, 묘지기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들어가 분향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아울러 10월 초하루의 분향례에서는 100여 명을 모아 미리 강당에 진을 치고, 서원의 모든 문을 닫아걸고 구유들의 접근을 막았으며, 유사도 ㅤㅉㅗㅈ아내었다. 서원의 진입로인 송단에 진을 치고 구유들을 몰아내고, 당일 저녁에 서원 인근에서 식사하려는 것도 난입하여 분탕질을 하면서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신유들이 현재 감영과 경주부에서 자신들을 規戒하지 않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리를 지어서 서원을 드나들고, 여기저기에 돈을 분배하여 거두면서 자신을 살찌우고 질서를 해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발생시키는 것은 溪亭이 아니라고 했다. 즉 계정을 차용하여 서원의 지척에 세력을 두고 있으면서 일부의 신유들이 사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후손으로 하면 李鍾壽李在謙이 수괴가 되고, 마을 사람으로 하면 辛宗海孫星煥이 수괴가 된다고 적시하였다. 이들이 거칠고 사납게 행동하면서 술을 마시고 호기를 부리며, 웃통을 벗고 위세를 부리기에 구유들은 그들에 견줄 자가 없다고 했다. 나아가 이들이 힘으로 더욱 방자하게 구는 것은 감영과 경주부에서 징계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원을 어지럽히는 습속이 갈수록 더해져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관부를 비판하였다. 나아가 이들의 행태를 그대로 둔다면 수백 년간 이어져온 香火를 그치게 한 죄로 관찰사 역시 그의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즉 李彦迪과 관찰사 趙康夏의 先祖 趙宗敬과의 관계를 내세워서 회재 후손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길 바랬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감사 조강하는 앞서의 제음에서 말한 것처럼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면 선비로서 대접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책임은 訴狀을 쓴 선비, 즉 후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전의 제음을 회수한 후에 일의 유무를 조사하여 사실대로 보고하라고 판결하였다. 자신의 선조까지 거론된 상서로 인해 다소 격앙되었던 감사는 사건을 조사하여 거짓이 들어나면 소장을 제출한 자들도 엄히 처벌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감영에서 경주부로 이 사안에 대하여 조사하도록 관문을 내려 보내자, 경주부에서는 신유와 구유측의 인물들을 관청에 불러 대질하였다. 대질 심문과 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다시금 신유와 구유간의 대립이 발생하여 보름날 분향례도 정지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주부윤은 두 세력을 힐책하는 한편 그간의 조사된 결과를 감영에 다시 송치하였다. 감영에서는 10월 25일 다시 제음을 보내와서 신유과 구유를 모두 힐책하며, 분향례의 파행은 두 세력 모두의 잘못이라고 보고 향후 같은 일이 재발하면 두 세력을 모두 엄히 처벌하겠다고 판결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19세기 말 옥산서원의 원임직 소통을 두고 발생하였던 적서시비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손들이 조상과 관련된 시비에 나서는 것은 해당 고을 수령을 거쳐서, 감영으로 진정서를 올렸다. 그러나 公議를 수합한다는 명분에서 후손들의 진정서 이전에 향내 사림들이 연명한 상서를 먼저 올렸다. 본 상서는 적서시비의 과정에서 제향자인 이언적의 嫡派 후손들의 참여 범위와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慶州幼學李玉祥李在璜李能立等謹釁沐再拜大聲疾呼于
觀察閤下伏以生等先祖玉山書院新儒事變面稟之狀訴之不一而不二矣向伏承洞見城府之題敎感誦 大君子包含之盛德而今不敢恭竢究竟
復事煩瀆者以變怪之愈往而愈甚也彼輩氣焰忽地增倍攔入仁堂圍匝神門渠所出有司者不着齋服不須廟直潛入謂焚香而又於今朔
則招引無賴百餘前期屯據院堂而四鎖院門每門分隊設燎捧挺以守之使名爲舊儒者無敢一跡近厠驅逐自官敦還之任可少不憚忌又於入路松
壇終日等候欲蒙以不不潔而爲驅打之會暮而罷甚至夕食而不淂供億生等族親有一居院村者不得已於此乎食而比其方食又有持杖數十輩突
入內庭隨手打碎盤盂薤粉飮食塗籍又以執此之故而欲毁其家掀棟支宇打成一場廝倒世上豈有如此極變怪乎盖自六十年今日而渠輩之作鬧
院中不或無之而尙賴前後 營府家嚴明尊衛之至猶有所顧怵而不敢者矣至於今番則渠亦曰 營官之至爲如此吾輩之不規也亦如此曠載
一遇而吾安淂不盡吾所欲爲乎一方呼聚一方排欽揚揚以出入也以左右取而肥吾身又不無憑藉逞行於其間者而當初玆事之釀出實不在溪
亭而借溪亭爲主者以溪亭在院有肘掖勢也就以溪亭全門而言之其宗孫也其門長也執義不然其中稍有識慮者亦知知其原儒之一不顧而自渠
輩擅使則蓬蒿轉成貶損祖廟之爲大未安而潛懷憂歎頓不與議者比比之矣今所以如此者不遇以孫則李鍾壽李在謙以鄕則辛宗海孫星煥
三數人爲之魁而其無賴鹿暴祗知以使酒生豪袒臂作威生等直不與之較而愈肆以力 營府又不爲之懲而愈習以亂至於如此之極者也生等
痛痛迫迫之情自今日永辭祖廟而洋洋陟降之靈其不曰爾逢 典翰公賢孫爲按使而不能保守祖院使四百年淸香一朝焉而不得升馨也云
爾則生等九原他日又無以藉手歸白矣爲子孫地不待鄕省儒之次第爭訴而先此鳴寃惟 閤下罪生等則罪之罪彼則罪之無使 閤下
觀風地而使一邦儒風而掃地盡千萬血懇號訴之至
癸未十月 日 前護軍李遵祥
幼學李孝祥
李說祥
護軍李在敏
同敦寧李在永
幼學李在潞
李在說
李在沃
進士李在韶
幼學李在曜
李在澔
李在寅
李在燦
李在奭
李在喆
李在性
李在白
李在泓
李在嶠
李在杰
李在斗
李在彛
李在周
李在淑
李在瑨
李在景
李在熺
李在祺
李在鍾
李在基
李在宜
李在愈
李在承
李在沆
李能洙
護軍李能銓
幼學李能杓
李能一
李能曾
李能錫
李能運
李能秉
李能珏
李能鑽
李能簡
李能斗
李能{氵+奎}
李能漢
李能世
李能受
李能呂
李能政
李能晟
李能遇
李能仁
李能章
李能譧
李能馹
李能琇
李能容
李能俊
李能濬
李能凞
李能勳
李能翊
李能坤
李能白
李能福
李能燁
李能新
李能杰
李能任
李能家
李能修
李能敦
李能哲
李能牧
李能耆
李能昌
李能琦
李能駱
李能溥
李能厚
李能允
李能典
李能淳
李能烈
李能燾
李能鈺
李能洛
李敏格
李道久
李晩久
李元久
進士李寅久
幼學李望久
李楨久
李海久
李龍久
李林久
李台久
李韶久
李華久
李翰久
李棟久
李勉久
李重久
李翼久
李尙久
李瓚久
李棣久
李應久
李鉉久
李善久
進士李邁久
幼學李相久
李漢久
參奉李容久
幼學李澄久
李仁久
李炳久
李潤久
李東久
李根久
李珍久
李鳳久
李冣久
李柦久
李斌久
李彬久
進士李庭久
幼學李晉久
李性久
李聖久
李源久
李挺久
李宅久
李熙久
李宣久
李錫基
李錫楨
李錫模
李錫佑
李錫岐
李錫弼
李錫奎
李錫龜
李錫周
李錫一
李錫正
李錫謨
李錫任
李錫洪
李錫璜
李錫英
李錫翰
李錫華
李錫應
李錫範
李錫禹
李錫雨
李錫九
李錫愚
李錫元
李錫龍
李錫禧
李錫馨
李渼源
李渭源
李祚源
李淸源
前題不云乎
眞有是事
則不可以儒者
待之 苟無是
事 則責有所
歸於狀儒 前
後兩邊甘題
一倂還收後
事有無査
實報來事
初十日
慶州官
初九日 午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