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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유학(幼學) 이재교(李在嶠)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B.1890.4713-20180630.Y1880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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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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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정치/행정-보고-청원서
작성주체 이재교, 성주합하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작성시기 1890
형태사항 크기: 60.5 X 94.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890년 유학(幼學) 이재교(李在嶠) 등 상서(上書)
1890년 4월 여주이씨 적손들이 옥산서원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도회가 개최되는데 신유들의 방해가 없도록 부윤이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본 상서는 이재교 외 49명의 여주이씨 적손들이 연명하여 올린 것으로서 1884년 옥산서원 원임직이 소통되고, 뒤이어 도산서원 원임직이 관권에 의하여 소통된 이후에도 서류허통에 대한 적파의 지속적인 반발을 확인시켜준다. 상서를 보면 옥산서원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획을 세우는 일로 도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날에 맞춰 입문하는 자들의 수를 점검한다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는 것이다. 적손들은 신유들이 도유의 수를 확인하는 조처가 도회 자리에서 소위 향유들의 출입을 통제한 가운데 자신들이 참석하려는 계략으로 판단하였다. 적손들은 도회에는 원유로 표현한 구유들의 모임이므로, 신유들이 참석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만약 신유들이 참석한다면 도회가 진행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신유들이 서원 노비를 이용하여 모든 향유들이 문 밖으로 쫓겨내고, 적손들의 출입을 막는 최악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러한 일을 주도하는 것이 계정의 후손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묘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매우 심하다고 질타하면서 적손에게 혹 다르게 대하거나, 원유들을 계정에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적손들은 부윤에게 상서하여, 계정의 이씨들을 엄하게 징벌해주길 요청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0년 4월 驪州李氏 門中에서 玉山書院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道會가 개최되는데 新儒들의 방해가 없도록 府尹이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요청하는 上書
1890년 4월 驪州李氏 嫡孫들이 玉山書院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道會가 개최되는데 新儒들의 방해가 없도록 府尹이 더욱 관심을 가져주길 요청하는 上書이다. 본 상서는 李在嶠 외 49명의 驪州李氏 嫡孫들이 연명하여 올린 것이다. 疏首인 內谷 李在嶠(1822~1890)는 1884년 옥산서원 사림이 주도한 복제개혁반대만인소의 소수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 상서는 1884년 옥산서원 원임직이 소통되고, 뒤이어 도산서원 원임직이 관권에 의하여 소통된 이후에도 서류허통에 대한 嫡派의 지속적인 반발을 확인시켜준다. 상서를 보면 자신들의 선조인 이언적을 모시는 서원인 옥산서원의 잘못을 바로잡는 계획을 세우는 일로 道內의 章甫가 한 목소리로 주창하여 통문으로 모두에게 알려서 道會 날짜를 정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날에 맞춰 入門하는 자들의 수를 점검한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신유들이 道儒의 수를 확인하는 조처가 도회 자리에서 소위 향유들의 출입을 통제한 가운데 자신들이 참석하려는 계략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후손들은 도회에는 原儒로 표현한 舊儒들의 모임이므로 新儒들이 참석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그들은 만약 신유들이 참석한다면 원유들의 옆에 앉아서 스스로 예의와 고을 즉 경주부를 침해하는 말을 한다면 공론을 수렴하는데 있어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나아가 신유들이 院隸를 협박하고 단속하여 구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모든 鄕儒들이 문 밖으로 쫓겨나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후손들 역시 한발자국도 서원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러한 자신들의 염려가 기우일 수 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실제 허통이전부터 적서간의 극한대립 과정에서 서파측이 원문을 폐쇄하고 적파를 쫓아낸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서원에서 도회를 개최하면서 어떤 체면과 예법이 있어서 향유라는 이름으로 도유를 기다리느냐고 반박하면서, 이러한 일은 있지도 않으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당시 도회를 준비하면서 신유들이 향유와 도유를 구분하여 수를 파악하고, 나름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일을 주도하는 것이 溪亭의 후손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묘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매우 심하다고 질타하였다. 그래서 계정에서 후손들에게 혹 다르게 하거나, 원유들을 계정에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후손들은 계정에 협력하는 원유들이 과연 원유인지, 나아가 그들이 士類인지 되물었다. 그만큼 당시 옥산서원을 계정의 후손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결국 모든 사안이 계정의 주도로 나아가자 嫡孫들은 부윤에게 하소연하여 습속을 어지럽히는 계정의 이씨들을 엄하게 징벌하여 현인의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길 요청하였다. 당시의 경주부윤은 欽齋 盧泳敬(1845-1929)으로 다양한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의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여주이씨 적파에서도 이런 부윤에게 기대어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길 희망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19세기 말 옥산서원의 원임직 소통을 두고 발생하였던 적서시비에 관한 것이다. 서류소통이 이뤄진 후에도 계속해서 적서간의 마찰이 발생하고 있던 당시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化民幼學李在嶠李能{氵+奎}李道久等齋沐上書于
城主閣下伏以民等先院玉山書院糾正規劃事道內章甫同聲響應飛章胥告定日來會馬首齊向而入門時到點明聽入有如省圍之照驗及其入坐則所謂原儒而附爲黨
者一鄕屛棄之老者而主座晏然一道聲討之任司而據席自若言侵貌褺無所不至甚至發論布公則沮索百端執以行不得之事而反加嚇恐操切院隷使不得隨令奉行至使一
省衿紳狼貝出門又使民等一倂不得入院門一跬盖彼亦自知其爲而難於民等之見對爲是一切防塞之計也儒宮聚會是何等體貌威儀之所在而名爲鄕儒而待道儒如是自儒
林會事而所未有也所未聞也所未見也彼溪亭之於民等猶或爲異而爲然而原儒而附爲溪亭者其恿㤤變幻粧出愈巧者甚於溪亭之爲溪亭是可曰院儒乎是可曰士類乎
如此悖乖之習在 城主主持風敎之地宜有以嚴懲痛治之聞斯不容矣玆以抱狀齊訴爲去乎伏乞衛賢院爲士林地另加風勵之千萬祈懇之至
城主 處分
庚寅四月 日 前同敦寧李在永
幼學李在瑝
李在泓
李在穎
李在瑢
李能立
李能運
前都正李能漢
幼學李能晟
李能輔
李能參
李能俊
李能勳
李能濬
李能任
李能夏
進士李能年
幼學李能學
李能修
李能耆
李能奭
李能昌
李能烈
李能駱
李能鈺
李敏久
進士李寅久
幼學李楨久
李元久
李台久
李英久
李華久
李漢久
縣監李容久
幼學李澄久
李潤久
進士李宅久
李庭久
幼學李弼久
李錫禾
李錫龜
李錫愚
李錫正
李錫一
李錫禹
李始源
李祖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