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辰年 正月에 東江書院 士林이 마음대로 有今里 동민들을 院屬과 班戶로 속여서 군역을 면제받고, 나아가 자신들을 誣告하는 상소를 올려 이전 수령의 명령을 어긴 頭民 權東守 등의 죄목을 열거한 후 이들을 엄히 처벌해 주길 新任慶州府尹에게 요청하는 牒呈
甲辰年 正月에 東江書院 士林이 마음대로 有今里 동민들을 院屬과 班戶로 속여서 군역을 면제받고, 나아가 자신들을 誣告하는 상소를 올려 이전 수령의 명령을 어긴 頭民 權東守 등의 죄목을 열거한 후 이들을 엄히 처벌해 주길 新任慶州府尹에게 요청하는 牒呈이다.
첩정은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으로 올린 보고서의 일종이다. 이 첩정이 제작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군포의 문제가 점차 커져가던 19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갑진년은 1844년으로 볼 수 있다. 東江書院은 비록 사액서원은 아니지만 玉山書院, 龜岡書院과 더불어 경주 부북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유금리에 위치한 동강서원은 경주의 명문사족인 慶州孫氏의 孫仲墩을 제향 하였다. 동강서원에서 첩정을 올리게 된 것은 서원이 위치한 유금리에서 洞民들의 避役과 관련한 비리가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동강서원의 院屬들에게도 피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첩정을 보면 동강서원 원속들에 대한 軍布를 면제하는 일로 지난달에 文報로 진정을 하였고 그에 대하여 제음으로 거듭 엄중히 타이르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有今洞民들이 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반대로 빈번하게 소장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원속을 軍伍에서 빼어서 守護하는 것은 지난날부터 정해져온 법칙이었다. 그러나 관에서 蠲頉해도 되지만 모두 다른 遊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前前의 관에서 별도로 사정을 헤아려서 三廳에 신칙하여 일정기간 동안 조사하여 얻은 遊閑으로 蠲頉者를 대신하여 충원하도록 해주었다. 그 당시 일을 주관하였던 수령이 비록 교체되어서 갔지만 當日의 제음이 있는 公文과 三廳에서 거행한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軍伍에서 원속으로 빼내어 서원을 수호해도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지난번 수령이 한가히 노는 자들을 조사하여 군오를 대신하여 서원에 더 충원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遊閑은 첩정을 보면 임의로 班奴나 婢夫 내지 冒錄를 의탁해서 면역한 자들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원속으로 받아들여 신공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첩정에는 이러한 遊閑들이 13명이 있다고 했다.
첩정에서는 한 고을의 軍伍는 모두 家座元軍 뒤에 假役을 겸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려오는 규례라고 했다. 즉 군역을 담당하는 원군들이 가짜 역을 담당하면서 실제 군포를 면제 받고, 자신들의 이름을 거짓으로 올린 곳에 身貢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당시 일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강서원 위치한 유금리에는 48명의 元軍이 있었는데, 이 중 22명이 동강서원 원속들의 이름을 빌려서 蠲頉하였고, 26명은 당초 그 동네에서 성명이 성책에 있는 자들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하였다. 즉 실제 軍名을 은닉하고 거짓으로 이름을 채우고 미혹하였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班戶 즉 양반집이라고 말하고 蠲減한 곳이 53가구였다.
이처럼 첩정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蠲頉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문제는 군포 등의 세금을 안내는 자들이 증가할수록 당시 동리별로 책정되던 군포는 군적에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 되었다. 이에 양민들은 民狀을 통해 다양한 핑계를 되면서 세금을 견감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동강서원을 誣告하는 사태까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동강서원은 이처럼 수취체제를 어지럽히고, 서원을 무고하여 소송으로 동네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頭民 權東守와 葛㥧三 무리를 지목하였다. 한편으로는 三廳에서 당일에 조사한 것을 문의한 후 顚末을 헤아려 살펴주길 요청하였다. 이를 통해 권동수 등이 마음대로 침입하여 일으킨 범죄에 대하여 엄격하게 처벌하여 다시는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주길 요청하였다.
즉 동강서원 원속과 그 외 세금납입자의 이름을 빌려다가 군포를 면제받고, 거짓으로 신분을 속여서 면제받는 등의 일을 막아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동강서원은 서원 원속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더많은 원속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첩정에서 삼분의 일을 더하여 보충하는 법은 대개 한 고을을 두루 관통하는 것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각 서원의 원속들이 서원의 동네에 거주하지 않고 각처에 흩어져 있기에 겸감하는 것을 비교하여 바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첩정은 19세기 초반 서원 운영에 필수적인 원속의 수호 노력과 이를 확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동강서원의 구체적 실상을 알려준다. 나아가 당시 경주지역에서 군역을 면제받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본 첩정은 19세기 초반 경주지역 향촌사회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