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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예안(禮安) 유학(幼學) 이중오(李中五) 등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B.1883.0000-20180630.Y18601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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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정치/행정-보고-청원서
작성주체 이중오, 순상합하
작성시기 1883
형태사항 크기: 102 X 59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안길

안내정보

1883년 예안(禮安) 유학(幼學) 이중오(李中五) 등 상서(上書)
1883년 11월 예안 유학 이중오 외 15명이 순상에게 일전의 제음에서 언급한 관칙을 빨리 내려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원사실』을 보면 본 상서가 작성되기 이전인 11월 5일에 감영 아래에서 옥산서원 신유 사변에 대한 해결을 논의하는 도회가 열렸다. 당시 올린 상서에 대한 감사의 판결문이 신유사변에 대한 해결의지가 부족하다고 도내 유생들은 판단하였다. 그래서 재차 상서를 올려서 경주부에 신유들의 처벌을 명령하는 관칙을 내리겠다는 판결을 다시 받았다. 그 후 대부분의 도내 유생들은 돌아갔지만 상서를 주도한 인물들은 관칙이 발급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받은 후에 헤어지기로 했다. 그러나 관칙의 발급이 늦어지면서 본 상서를 감영에 올리게 되었다. 상서를 접한 감사는 말을 내어놓고 많은 선비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였으니 두루 부끄러우나 겨를이 없었던 것이라고 제음을 내렸다. 이후 옥산서원 유생들은 감영의 관칙을 직접 받아서 돌아갔으며, 12일에 경주부에 직접 전달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83년 11월 禮安 幼學 李中五 외 15명이 巡相에게 日前의 題音에서 언급한 關飭을 빨리 내려주길 요청하는 上書
1883년 11월 禮安 幼學 李中五 외 15명이 巡相에게 日前의 題音에서 언급한 關飭을 빨리 내려주길 요청하는 上書이다. 『玉院事實』을 보면 본 상서가 작성되기 이전인 11월 5일에 監營 아래에서 道會가 열렸다. 당시 도회에는 70여 명이 참여하였다. 다음날인 11월 6일 감영에 호소문을 올렸다. 당일 저녁 받은 제음에서 신유들의 이른바 有司라는 자를 물리치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유야무야하여, 엄히 단속하여 영원히 막을 뜻이 없다는 것이 보이므로 다시 호소문을 올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다음날인 11월 7일에 호소문을 다시 올렸는데, 이때의 狀頭는 漆谷의 幼學 李相獻, 仁同의 幼學 張來遠, 禮安의 幼學 李中五였다. 당일 저녁에 다시 제음이 내려졌다. 이때의 제음에서 신유들을 막고 단속하는 도리는 마땅히 해당 부에 關飭으로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유생들이 만족해 했다. 11월 8일에 여러 사람들이 잠시 기다렸다가 한두사람이 關旨를 가지고 간다면 도리상 마땅함을 얻고 굳게 결속함이 오래갈 수 있다고 했다. 11월 9일이 되었지만 關旨가 일찍 나오지 않아서 뒤에 머물던 道儒들이 감영에 호소문을 올렸다. 본 상서는 11월 9일에 올렸던 것이다. 이를 보면 日前에 다시 호소문을 올린 것에 대한 제음에 關飭이 있을 것이라고 한 후 府의 敎示가 진실로 大君子께서 어진 선현의 서원을 호위하고, 선비의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성대한 생각과 넓으신 局量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모든 사람이 돌아가면서 열람하며 감격하여 경의를 표하며[頂手] 기다리려 했지만 각자 먼 곳에 살아서 한번 돌아가면 홀로 떨어져 있어 關文에서 말씀하신 뜻을 얻어 받들 길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려 하였는데, 다시 이렇게 번거롭게 아뢰게 되어 더욱 송구하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순상은 말을 내어놓고 많은 선비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였으니 두루 부끄러우나 겨를이 없었던 것이라고 제음을 내렸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19세기 말 옥산서원의 원임직 소통을 두고 발생하였던 적서시비에 관한 것이다. 허통이후 신유들이 옥산서원을 장악한 가운데 그들을 견제하려는 원유 즉 구유들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禮安幼學李中五善山幼學金泌東安東幼學柳東運等謹齎沐再拜仰籲于
巡相閤下伏以生等伏見日前再呈 題音有 關飭該府之 敎固知 大君子衛賢院正士趍之盛念弘度出於尋常萬萬輪閱銘感
頂手以竢而但生等各在遠地一歸落落無從以擭奉 關敎辭旨故姑蹲將發之行而更此煩稟尤不任悚惶懇祝之至
癸未十一月 日
醴泉幼學李元浩
安東幼學李庭鐸
義城幼學金壽璜
寧海幼學南夏朝
尙州幼學李時憲
洪道變
星州幼學鄭在璿
玄風幼學金永運
郭志根
仁同幼學張濬相
漆谷幼學李鍾淵
密陽幼學孫昌鉉
永川幼學鄭致五
出言而使多
士不信 方愧
恧之不暇向

初九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