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예안(禮安) 유학(幼學) 이중오(李中五) 등 상서(上書)
1883년 11월 예안 유학 이중오 외 15명이 순상에게 일전의 제음에서 언급한 관칙을 빨리 내려주길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원사실』을 보면 본 상서가 작성되기 이전인 11월 5일에 감영 아래에서 옥산서원 신유 사변에 대한 해결을 논의하는 도회가 열렸다. 당시 올린 상서에 대한 감사의 판결문이 신유사변에 대한 해결의지가 부족하다고 도내 유생들은 판단하였다. 그래서 재차 상서를 올려서 경주부에 신유들의 처벌을 명령하는 관칙을 내리겠다는 판결을 다시 받았다. 그 후 대부분의 도내 유생들은 돌아갔지만 상서를 주도한 인물들은 관칙이 발급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받은 후에 헤어지기로 했다. 그러나 관칙의 발급이 늦어지면서 본 상서를 감영에 올리게 되었다. 상서를 접한 감사는 말을 내어놓고 많은 선비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였으니 두루 부끄러우나 겨를이 없었던 것이라고 제음을 내렸다. 이후 옥산서원 유생들은 감영의 관칙을 직접 받아서 돌아갔으며, 12일에 경주부에 직접 전달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8~19세기 慶州 玉山書院 院任職을 둘러싼 嫡庶간의 鄕戰」, 『古文書硏究』16·17, 이수환, 韓國古文書學會, 2000
『옥원사실(玉院事實)』, 경주 여주이씨 무첨당 소장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