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무진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8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무진년 기사이다. 2월과 6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본소 재용 중 일부를 殖利한다는 것과, 庖舍 西邊의 層角이 風雨로 손상되어 椽盤과 女夫瓦 60丈을 새롭게 보수하였다는 것, 祭器 일부와 植樹 작업을 수행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덕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경주부의 임내였던 기계현에 속했으며, 세덕사 설립 당시에는 面里制 개편으로 경주부 기계면의 덕동으로 편제된 곳이다.
1779년에 설립된 세덕사는 조선시대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여주이씨 가문에 의해 운영된 문중사우로 1868년 毁撤될 때까지 약 90년 간 존속하였다. 대원군 때 훼철된 이후 복설되지 않았고 현재는 세덕사 講堂으로 이용되었던 용계정만이 남아 있다. 세덕사의 건립과 운영에 관련된 자료는 배향자인 이언괄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덕동마을 내의 민속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 하나인 『고왕록』에 수록된 기사로서 19세기 초반 세덕사의 실질적인 운영 관리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17세기 중반 이후로 향촌사회에서는 朱子家禮의 보급과 실천을 강화하면서 嫡長子 중심의 宗法질서가 확립되고 문중과 同姓村이 확대되었다. 문중기반의 사족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8세기 이후 각 문중 간 우위 경쟁은 심화되었고, 그 결과 각 가문의 先祖를 제향하는 中門院祠가 남설되었고, 세덕사도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건립된 문중사우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李蕃과 그의 2자인 이언괄 부자를 배향하고 있다. 이언적 사후 人臣으로서 또한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향유한 데서 이 가문은 17세기 이후 경주뿐만 아니라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가운데 설립된 세덕사는 이언적의 父와 弟를 배향한 사우로 여주이씨 가문의 주도로 운영되었다.
세덕사는 건립되고 일정기간이 지나 건물이 퇴락하면서, 그때마다 크고 작은 수리와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설립 초기 재원이 부족하여 묘우를 제외한 여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1799년 강당을 비롯한 각종 건물이 건립되면서부터 사우가 훼철될 때까지 공사는 수시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건물의 수리·보수는 資材의 구입, 工價와 食代 및 雜費를 추가로 발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세덕사에 있어 작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9세기 중반으로 가게 되면 건물에 대한 수리와 보수가 세덕사 소유 재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 대부분의 문중사우에 있어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본 기록이 작성된 시점이 2월과 6월임을 비추어 볼 때 통상적으로 행해지던 세덕사의 주요 행사를 앞두고 점검을 거쳐서 시행된 일들로 보여진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부 여주이씨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운용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