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병인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6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병인년 기사이다.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안동의 孤竹書院에서 『雙節錄』1권을 발간하여 보내와 本所에 備置하였고, 松壇의 松楸가 엉성하여 그곳에 1,000餘 그루, 좌우의 공터 북쪽에도 柿木 30餘 그루를, 강당 계단 남쪽에도 百日紅 한그루를 심고, 강당의 서쪽 담장 3~4把가 무너져 내린 관계로 수리하였고, 本祠의 經用이 여러 해에 걸친 흉년으로 심히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公儀를 ㅤㅉㅗㅈ아 堤山員(堤內員)의 使字 畓 3斗落을 팔아서 얻은 40냥과 冊錢 130냥에서 어렵지만 보태어 사용하고 여기서 100냥은 無忝堂에 出送하고 70냥은 本所에 두어 聚食한다는 내용이다.
고죽서원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白巖 金濟·籠巖 金澍 등 善山金氏 2현을 배향한 곳인데 보내온 서책은 고려말의 문신으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中國과 海島에 은거한 김제와 김주 형제의 遺文 약간과 遺事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당시의 山長은 1791년 8월부터 1792년 1월까지 옥산서원 재임을 역임하였으며, 1809년 8월부터 1810년 1월까지 옥산서원 원장을 역임한 李鼎樸이고, 有司는 李文祥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李蕃과 그의 2자인 李彦适 부자를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건립되었다.
당해 년도의 기록은 세덕사 운영의 면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당시에 교우하고 있는 지역 원사와 건물 수리 보수를 통한 운영, 재정 확보의 수단 등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세덕사 재용 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설립 초기에는 문중사우로서 후손들이 出資하여 전답을 매개로 재용을 확대 재생산하는 모습을 이어왔었지만,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工事 및 물품 구입, 居接 등등의 제반 영역에서 소모되는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점차 드러나는 시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本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殖利활동을 영위하고, 冊錢을 변통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부 여주이씨 문중사우인 세덕사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本所와 別所, 冊錢 등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던 재용의 세분 운용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