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갑자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4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갑자년 기록으로 사우의 서책과 捧用錢 및 기타 지출에 관한 내용이다. 3월에 追遠祠로부터 『孝經』1권이 移送되어 本所에 受置하였다고 하며, 본소에 별도의 捧用錢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殖利하여 捧用으로 삼을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것, 본소의 別給記小冊 2권을 5전을 주고 새롭게 마련한다는 내용이다.
세덕사 본소의 재정 운영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특히 세덕사 경제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殖利활동에 관한 사항을 알려준다. 세덕사에서는 큰 규모가 아니지만 앞선 시기에서도 殖利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793년 세덕사에서 소장할 도서를 구입할 명목으로 마련된 기금인 冊獎錢을 殖利하였고, 전답 放賣로 마련된 捧價錢 및 移買로 발생한 차익을 식리하기도 하였다.
『고왕록』을 비롯한 세덕사 소장 관련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보면, 세덕사가 서책을 마련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는 방법은 본 기사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다른 廟宇에서 移送해 본소에 受置하기도 하지만, 주로 인근의 문중 院祠에서 간행 도서를 印送 받고 있다. 특히 玉山書院에서의 일종의 기부 형식으로의 재원 보충이 간헐적으로 나마 지속되는데 이는 세덕사가 李彦迪의 아버지인 李蕃과 그의 동생 李彦适이 배향된 곳이기도 하며, 세덕사 설립 당시에 사우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의 마련을 무첨당계와 향단계에서 出資된 전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반 이래로 향촌사회에서는 朱子家禮의 보급과 실천을 강화하면서 嫡長子 중심의 宗法질서가 확립되고, 門中과 同姓村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문중기반의 사족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8세기 이후 각 문중 간 우위 경쟁도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각 가문의 先祖를 제향하는 門中院祠의 건립이었다. 17세기 말부터 경주지역에서는 龜江書院(1696년, 경주이씨)·龍山書院(1700년, 경주최씨)·東江書院(1707년, 경주손씨)·鶴南祠(1722년, 청풍김씨)·三綱祠(1736년, 옥구이씨)·雲泉書院(1738년, 여주이·안동권씨)·丹溪祠(1739년, 안동권씨)·章山書院(1780년, 여주이씨옥산파)·羅山祠(1780년, 김해김씨)·德淵世德祠(1779년, 여주이씨향단파)·龜山書院(1786년, 이천서씨)·虎溪祠(1786년, 안동권씨)·智谷祠(1786년, 창원황씨)·花川祠(1792년, 서산류씨)·聖山祠(1811년, 영일정씨)·德山祠(1828년, 경주김씨), 汶湖祠(1829년, 경주이씨)·北山祠(1830년, 경주이씨)·南岡祠(1831년, 경주김씨)·丹𣽎祠(1831년, 경주손씨)·景山祠(1840년, 여주이씨무첨당파)·花岡祠(1844년, 경산전씨)·活川祠(1846년, 김해김씨)·杜陵祠(1847년, 곡산한씨)·玉淵祠(1850년, 안동권씨)·南岳祠(1868년, 풍천임씨)·鶴皐祠(경주박씨)·光山祠(正祖代, 오산백씨) 등의 문중원사가 건립되었다. 이외에 수령(경주부윤)이 건립을 주도한 梅月堂祠(1670년)가 있으며, 당색에 따라 건립된 仁山書院(1719년, 노론계), 明山書院(1831년, 소론계)이 있다.
이러한 원사 건립의 추세 속에서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李蕃과 그의 2자인 李彦适 부자를 배향하며 설립되었다. 여주이씨는 영남에 정착한 초기에는 迎日에 살다가 이언적의 조부 李壽會가 李點의 사위가 되어 경주에 왔고, 이번이 먼저 양좌동에 정착하고 있던 孫昭의 사위가 되면서 양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후 李彦迪이 학문과 사환을 겸비하여 東方五賢의 한 분으로서 사후에 ‘宗廟配享’과 ‘文廟從祀’라는 人臣으로서 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향유한데서 이 가문은 17세기 이후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가문은 이번이 양동에 정착한 이후부터 급격히 족세가 번창하여 인근의 安康·杞溪·神光 등지로 확산되어 나가는 한편,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중 내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방계손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직계 현조를 모시는 원사 건립을 통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宣揚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738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주의 여주이씨는 1573년에 건립된 玉山書院을 거점으로 활동해 왔으나 이언적의 동생인 이언괄의 자손들은 이언적이라는 傍祖 보다는 자신들의 조상인 이언괄을 따로 봉향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안동권씨와 연합하여 1738년에 雲泉書院을 건립하였다. 이언적이 문묘와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고 하나 방계혈손은 이언적의 직계혈손에 비해 사회적 위상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어 1780년에는 여주이씨 서파들이 이 시기 적서 간의 갈등 속에서 적파에 맞서기 위해 그들의 조상인 李全仁(이언적의 庶)을 배향하는 章山祠(1797년 서원으로 승격)를 건립하였고, 1840년에는 옥산서원내 서파들의 入錄 문제를 둘러싸고 여주이씨 내에서 분쟁이 가열되면서 적파 쪽에서 이에 맞서기 위해 이언적의 孫인 李宜潤(무첨당파)을 배향하는 景山祠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덕동마을에 세거한 여주이씨 향단파 후손들도 향내에 그들만의 사회적 활동의 근거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세덕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언괄이 배향된 운천서원은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17년(1741) 173개소에 대한 대규모 院祠毁撤 때 대상에 올라 훼철되었다. 이언괄 후손들은 운천서원이 훼철되자 통한해 하며 배향 사우의 재건립을 위한 모색을 계속해 나갔고 그 결과 1779년 세덕사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덕사의 설립은 전적으로 여주이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면서 사우 설립 초기부터 계속 문중이 중심이 되어 사우운영의 물적, 인적 자원의 중심적 출처가 되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의 대표 사족 여주이씨 향단파의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재원 운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타의 문중사우와 달리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本所의 전답만으로 사우 운영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別所의 재용 및 여타의 경제 기반을 통한 운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