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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계해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803.4711-20180630.Y18504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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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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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803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1803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계해년 기록
1803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의 계해년 기사들로 정월, 5월, 7월, 8월에 있었던 세덕사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정월에는 마을 입구 양송당 역시 주량을 벌목한 후 남은 것이 희소한 관계로 소나무 수삼무를 묘우와 강당 뒤편 동쪽과 서쪽 면에 새로 심었다는 내용이고, 5월, 묘우 게판과 남북방 재호 및 입덕문 판액을 급가 4냥 5전으로 새롭게 마련하여 걸었다고 하였다. 7월 포사에 비가 새는 곳이 많은 이유로 기와 1눌을 류치, 와수가 5냥은 별소로부터 분급, 8월 연연루에 사와가 없을 수 없고, 또 비가 새는 곳이 있으니 기와를 새로 유치, 공가 2냥 5전은 별소로부터 분급하였다고 한다. 또한 춘추향례 때 본소에서 전수해 오던 원래의 기명이 없어, 공사하는 반기를 본동과 각리에서 수용하니 서실하고 분운하는 폐가 있어 이를 고쳐 별소로부터 분비해서 별도의 사기 20, 상소 8, 반 2죽을 급가 7냥으로 새롭게 마련하여 전수한다는 내용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803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계해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3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의 계해년 기사들로 정월, 5월, 7월, 8월에 있었던 세덕사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정월에는 마을 입구 養松堂 役時 柱梁을 벌목한 후 남은 것이 稀疎한 관계로 소나무 數三畝를 廟宇와 講堂 뒤편 동쪽과 서쪽 면에 새로 심었다는 내용이고, 5월, 廟宇 게판과 南北房 齋號 및 入德門 판액을 給價 4냥 5전으로 새롭게 마련하여 걸었다고 하였다. 7월 庖舍에 비가 새는 곳이 많은 이유로 기와 1訥을 留置, 瓦手價 5냥은 別所로부터 分給, 8월 淵淵樓에 沙瓦가 없을 수 없고, 또 비가 새는 곳이 있으니 기와를 새로 留置, 工價 2냥 5전은 別所로부터 分給하였다고 한다. 또한 春秋享禮 때 本所에서 傳受해 오던 원래의 器皿이 없어, 供士하는 盤器를 本洞과 各里에서 收用하니 閪失하고 紛紜하는 弊가 있어 이를 고쳐 별소로부터 分備해서 별도의 沙器 20, 床所 8, 盤 2竹을 給價 7냥으로 새롭게 마련하여 전수한다는 내용이다.
세덕사는 조선시대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여주이씨 가문에 의해 운영된 문중사우로 1779경주부 기계면에 설립되어 1868년 훼철될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하였다. 18세기 이후 유교적 종법질서의 정착과 문중의식이 강화되면서 각 문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서원·사우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문중서원·사우의 건립이 크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문중별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문별 또는 파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러한 서원·사우의 건립의 추세 속에 경주의 여주이씨 경우도 파별 분립이 뚜렷해졌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각 가문의 先祖를 제향하는 門中院祠의 건립이었다. 17세기 말부터 경주지역에서는 龜江書院(1696년, 경주이씨)·龍山書院(1700년, 경주최씨)·東江書院(1707년, 경주손씨)·鶴南祠(1722년, 청풍김씨)·三綱祠(1736년, 옥구이씨)·雲泉書院(1738년, 여주이·안동권씨)·丹溪祠(1739년, 안동권씨)·章山書院(1780년, 여주이씨옥산파)·羅山祠(1780년, 김해김씨)·德淵世德祠(1779년, 여주이씨향단파)·龜山書院(1786년, 이천서씨)·虎溪祠(1786년, 안동권씨)·智谷祠(1786년, 창원황씨)·花川祠(1792년, 서산류씨)·聖山祠(1811년, 영일정씨)·德山祠(1828년, 경주김씨), 汶湖祠(1829년, 경주이씨)·北山祠(1830년, 경주이씨)·南岡祠(1831년, 경주김씨)·丹𣽎祠(1831년, 경주손씨)·景山祠(1840년, 여주이씨무첨당파)·花岡祠(1844년, 경산전씨)·活川祠(1846년, 김해김씨)·杜陵祠(1847년, 곡산한씨)·玉淵祠(1850년, 안동권씨)·南岳祠(1868년, 풍천임씨)·鶴皐祠(경주박씨)·光山祠(正祖代, 오산백씨) 등의 문중원사가 건립되었다. 이외에 수령(경주부윤)이 건립을 주도한 梅月堂祠(1670년)가 있으며, 당색에 따라 건립된 仁山書院(1719년, 노론계), 明山書院(1831년, 소론계)이 있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그래서 세덕사는 건립 초기 전답의 매입을 통하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의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전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無添堂契와 香壇契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에서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보여진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에서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춰 운영기금으로서 각각 토지를 출자해 재원 확충을 위한 토대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所出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자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 사용되었다.
『고왕록』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18세기의 기록 중 상당수가 세덕사의 재원확보를 위한 전답 買入 및 移買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와는 별도로 別所田畓이 마련되어 있었다. 별소의 재산은 모두 별소 전답의 所出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강당 영건 공사 직전인 1794년에 작성된 『別庫小冊』에 의하면 별소 보유 전답은 4結 94卜으로 확인된다. 이는 1795년까지 세덕사가 직접 매입한 전답보다 1~2결 정도 많은 규모이다. 서원·사우에는 배향 인물의 후손들이 別所 내지 別庫라 불리는 독립된 기금을 마련하여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과, 별소전답이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安康杞溪의 평야 지역에 산재한 것으로 나타나는 점 등을 보아 이 역시 세덕사 설립당시 배향인물의 후손들이 결성한 향단계와 무첨당계에서 출자한 전답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해 년도에 발생한 재원 지출의 세목은 모두 別所에서 所出된 비용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19세기에 접어든 세덕사는 자연적인 시간의 경과 등으로 인해 건물에 대한 수리 및 보수가 꾸준히 발생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거의 모든 공사 경비는 세덕사 본소의 재원이 아닌 별소전답의 소출에서 충당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세덕사 자체적으로 祭祀 및 居接 용품의 마련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803년의 본 기록에 器皿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고왕록』에 드러나는 전후의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房燭, 紙, 筆墨 등은 옥산서원으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 規例였다고 할 정도였으니 건물을 유지하고, 각종 資材를 구입하고 工價 및 雜用 등으로 사용되는 비용은 세덕사에 있어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세덕사처럼 개별 문중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재원의 소모가 발생할 때에 타문중 및 관청의 부조가 거의 없어 별소전답에서 자주 變通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의 대표 사족 여주이씨 향단파의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재원 운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타의 문중사우와 달리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本所의 전답만으로 사우 운영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別所의 재용 및 여타의 경제 기반을 통한 운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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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癸亥正月日洞口養松堂役時柱樑䂨伐後餘存稀路切植
松數三畝廟宇講堂後東西面種竹
七月日庖舍多有添漏故以留置瓦一訥餘反瓦手價五兩
八月日淵樓■每莫沙瓦亦有漏處切以留置瓦價反■
工價二兩五戔自別所價給
春秋享禮時本所元無傳受器皿供士盤器收用於本洞各里頗
有閪失紛紜之弊切自別所加備別沙器二十床以入盤二竹給
價七兩新備傳受事
同年五月日 廟宇揭飯及南北房齋號入德門飯額給價四兩五
戔以爲新揭
山長李鼎興
有司李驥祥
別有司李龜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