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신유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1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신유년 기사이다. 3월에 작성된 것으로 담장을 改修하는 役이 있었는데 役處가 浩大하여 洞의 軍丁 수백 명과 他洞 군정을 동원하여 5월 초에야 역을 마칠 수 있었으며, 工價 및 雜用으로 비용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세덕사 설립 이전 경주지역은 경상도의 여러 읍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경주의 사족들은 16세기 중·후반에 西岳·玉山書院을 건립하였고, 또한 본읍의 邑誌를 편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향안 작성을 통한 유향소 운영과 향교 및 院·祠를 출입하면서 향촌사회를 영도하였고 한편으로는 이를 매개로 지방유림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그들의 이해를 관철해 나갔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士林의 활동에 서원의 역할이 점차 커지자 각 문중들은 향중 공동의 서원이 아닌 개별 문중 중심의 원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18세기 이후가 되면 각 문중, 더 나아가 문중의 파별로 더욱 세분화되어 각기 자기 조상을 위주로 한 서원·사우·鄕祠·精舍 등을 경쟁적으로 건립하여 지역적·종족적 유대를 강화하고 향촌 내에서의 위치를 견고히 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원사의 분립이 뚜렷해졌으며 이러한 문중원사의 확대는 이 시기 문중의식의 확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주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많은 수의 서원과 사우가 濫設되었다. 良佐洞의 孫·李兩姓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경주를 대표했던 경주김·이·최·손씨 및 淸安李·迎日鄭·利川徐·谷山韓·豐川任·英陽南·安東權氏 등 유력 사족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入鄕祖, 中始祖, 顯祖 가운데 1祖 또는 공동의 조상을 주향 또는 배향·추배 등의 형식을 통하여 서원·사우를 설립하고 있었다. 이들 원사 대부분은 18세기 후반~19세기 사이에 건립된 문중사우이다.
이러한 원사 건립의 추세 속에서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여주이씨도 파별로 분립현상이 뚜렷해졌다. 여주이씨는 사액서원인 옥산서원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父·弟와 庶子·손자를 배향하는 운천서원·세덕사·장산서원·경산사를 설립하여 각 파별로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수졸당파는 파조인 李宜潛의 영정을 모시는 사곡영당을 건립하고 있었다. 도내 유림의 공론으로 설립되었던 옥산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주이씨 각 파가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것이다.
세덕사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778년부터 여주이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문중에 통서를 보내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하였고 종중의 인원들이 참여하여 터를 잡고 상량을 했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따라서 세덕사 설립 초창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세덕사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의 마련과 더불어 강당을 건립할 재원은 확보하는데 있었다.
설립 초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세덕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접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에서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추어 운영기금으로 각각 토지를 출자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소출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재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재사용되었다. 전답매입 등으로 확보된 재산은 이후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공사 및 물품 구입 등으로 지출되었다.
세덕사 운영과 관련하여 『考往錄』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본 기사의 내용과 대동소이한 사우 건물의 유지를 위한 수리·보수에 관한 것이다. 세덕사는 건립이 된 이후 꾸준하게 수리와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세덕사의 경우 보유 노비의 수가 10구 미만으로 전답에 비해 매우 규모가 적은 편이다. 서원·사우 노비의 경우 17세기 이전까지는 전답과 더불어 2대 경제적 기반으로 중요시 되었으나 18세기 이후 노비도망이 광범위해지면서 점차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현격히 떨어지게 되었고 각 서원·사우는 전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재정력을 충당을 주력하였다. 세덕사 소속 노비는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1780)에 8口, 병자(1816)년 정월 경주부 세덕사 戶口單子에 7구가 기재되어 있다. 『세덕사전답안부노비안』에 기재된 노비 중 절반이 15세 미만이고, 호구단자에 기재된 노비 중 2구는 외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상시로 차역할 수 있는 실재 노비는 더욱 적었을 것이므로 이들 노비들은 奴는 庫子 및 庫直으로 각종 잡역을 담당하였고, 碑는 飯婢 또는 食母로써 客來時나 세덕사의 대소사 때 供饋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세덕사 노비는 재산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사우 내 각종 잡역을 담당할 최소의 노동 인력으로 확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덕사는 관으로부터 획급받은 屬村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 기사의 내용대로 사우의 공사 시에 洞의 軍丁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이는 세덕사 운영에 있어 중요한 인적, 물적 도움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대규모의 공사라고 하여 실체적 역동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속촌에서 동원된 군정에 더하여 다른 동의 군정도 동원된 사실로 보아 적어도 당시의 세덕사 운용과 관련되어 관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자료라고 하겠다.
[자료적 가치]
경주지역의 여주이씨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건물 유지와 관련된 사항이 기록된 자료로 운영을 주도한 인물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문중사우로서는 드물게 屬村을 획급 받아 사우 내 공사를 洞丁·軍丁 등으로 불리면서 덕동의 동민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때 약간의 役價도 지급받고 있는 양상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