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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경신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800.4711-20180630.Y18504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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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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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800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1800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경신년 기록
1800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의 경신년 기사이다. 춘, 4월, 11월 등의 기록이 열기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 본소의 식정 1좌가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고쳐서 새롭게 마련하였다. 4월, 강당이 기성되고, 낙연을 잉설하였다. 원근의 친우와 문중 노소가 많이 참여하여 하였는데, 수백여 명이었다. 달제문을 이설하였다. 낙성일에 백일장을 시행하였는데 그 납권의 청절이 하나 같이 병진(1796)년 설장 때와 다르지 않았고 시부를 초출한 많은 선비들이 모이니 그 광경이 심히 볼 만하였다. 11월 별소로부터 110냥을 제출하여 『강목』 70권과 『주자대전』 60권, 『성리대전』 27권을 구입하였다는 내용으로 세덕사에서 필요한 물품, 서책을 구입하는 것과 백일장 개최 사실 등을 기록한 것으로 비정기적인 운영과 관련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800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경신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800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경신년 기사이다. 春, 4월, 11월 등의 기록이 열기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 本所의 食鼎 1座가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고쳐서 새롭게 마련하였다. 4月, 講堂이 旣成되고, 落宴을 仍設하였다. 遠近의 親友와 門中 老少가 많이 참여하여 하였는데, 수백여 명이었다. 達齊門을 移設하였다. 落成日에 白日場을 시행하였는데 그 納卷의 淸節이 하나 같이 丙辰(1796) 設場 때와 다르지 않았고 詩賦를 抄出한 많은 선비들이 모이니 그 광경이 심시 볼 만하였다. 11월 別所로부터 110냥을 除出하여 『綱目』 70권과 『朱子大全』 60권, 『性理大全』 27권을 구입하였다는 내용으로 세덕사에서 필요한 물품, 서책을 구입하는 것과 백일장 개최 사실 등을 기록한 것으로 비정기적인 운영과 관련된 자료이다.
조선후기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사족인 여주이씨는 18세기 이후 원사 건립이 문중, 더 나아가 파별로 더욱 세분화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파별로 원사의 분립 현상이 뚜렷해졌다. 여주이씨는 賜額書院인 옥산서원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었으며, 이후 그의 父·弟·庶子·孫을 배향하는 雲泉書院(李彦适)·世德祠(李蕃·李彦适)·章山書院(서배, 李全仁)·景山祠(無添堂派, 李宜潤)·杜谷影堂(守拙堂派, 李宜潛)을 설립하여 각 파별로 문중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주이씨는 18세기 초까지는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 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언적이라는 傍祖보다는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사우를 건립하여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派祖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덕동마을에 세거한 여주이씨 향단파 후손들에 의해 세덕사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의 입향조인 李蕃과 그의 2자인 李彦适 부자를 배향하는 문중 사우였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문중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재원을 확보해 나갔다. 이전의 『考往錄』의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대부분이 전답을 매입하거나 移買하는 등의 전답확보를 통한 재산 축적 관련 기사가 많이 때문이다. 세덕사 설립 후 10여 년 동안 꾸준히 전답을 통한 所出 자금을 확보했고 그를 바탕으로 1799년에는 강당을 비롯한 부속건물들을 완성하였고, 당해년에는 이를 기념하는 落成日에 백일장을 실시한 것이다. 이해에 실시한 백일장에는 4년 전 병진(1796)년 설장 때와 비교해도 다르지 않을 정도였고, 많은 선비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私廟로서 제향의 공간이 아닌 비록 정기적인 행사는 아니었지만 문중의 老少와 內外孫 및 지역 인사들의 文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학문 활동의 장으로서도 기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세덕사 관련 자료로 남아있는『考往錄』의 기록에 의하면 세덕사에서 행해지는 행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개최되는 春秋享禮와 매년 정월 내·외 후손들이 참여하는 正朝參謁에 사용되는 祭器의 마련과 참여자에 대한 居接이 행사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세덕사 자체적으로 제사 및 거접 용품의 마련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 기록에서는 파손된 솥의 재용에 대해 명확하게 하고 있지는 않지만, 11월의 서책구입과 관련해서는 별소로부터 재원을 충당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렇듯 세덕사 재용의 운영은 별소에 대한 의존도, 즉 문중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세덕사가 문중사우로 설립된 까닭도 있겠지만, 본소 전답의 운영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재정확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의 대표 사족 여주이씨 향단파의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재원 운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타의 문중사우와 달리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本所의 전답만으로 사우 운영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別所의 재용 및 여타의 경제 기반을 통한 운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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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庚申春本所食鼎一座破不用切新備
山長李憲敎
有司李岳祥
同年四月十八日講堂旣成仍設落宴遠近親友及門中老
少多至壽百餘員前四日移設達齊門接似五首文罷接後
落成日設白場於島樑下而基納券諸節一如丙辰設場例
抄土詩賦典右夙合三十人呼中於講堂庭下棟宇新成多士
咸集一場光景甚盛事也自別所加出三十餘券錢賞給
同年日自別耶除出冊錢四兩貿置小學具諸解合九卷
山長李鼎漢
有司李麟祥
別有司李觀祥
庚申十一月自別所除出一百十兩貿置綱目七十九卷朱子
全六十卷性理大學二十七卷
山長李鼎扶
有司李鼎大
別有司李觀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