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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기미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799.4711-20180630.Y18504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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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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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799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1799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기미년 기록
1799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기미년 기록이다. 오랫동안 흉년 등의 일을 많이 당하여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들을 6월에 강당을 입주상량하고 같은 해 11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명흥당, 진덕재, 면수재, 입덕문으로 갖춰졌고, 세덕사는 시문은 강세황이 썼고 명흥당 편액은 이조판서 이익회로부터 받아 왔으며, 재호와 입덕문은 입암이 썼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어 소요된 재경비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사항을 열기하였다. 역사인 만큼 산장과 유사, 별유사, 성조도감 등의 인명이 연서되어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99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기미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799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기미년 기록이다. 오랫동안 흉년 등의 일을 많이 당하여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들을 6월에 講堂을 立柱上樑하고 같은 해 11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明興堂, 進德齋, 勉修齋, 入德門으로 갖춰졌고, 世德祠는 시문은 姜世晃이 썼고 明興堂 편액은 吏曹判書 李翊會으로부터 받아 왔으며, 齋號와 入德門은 立岩이 썼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어 소요된 재경비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사항을 열기하였다. 役事인 만큼 山長과 有司, 別有司, 成造都監 등의 인명이 연서되어 있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이번(李蕃, 1463~1500)과 그의 2자인 이언괄(李彦适, 1494~1553) 부자를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건립하였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그래서 세덕사는 건립 초기 전답의 매입을 통하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의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전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無添堂契와 香壇契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에서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보여진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에서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춰 운영기금으로서 각각 토지를 출자해 재원 확충을 위한 토대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所出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자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 사용되었다.
『고왕록』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18세기의 기록 중 상당 수가 세덕사의 재원확보를 위한 전답 買入 및 移買와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와는 별도로 別所田畓이 마련되어 있었다. 별소의 재산은 모두 별소 전답의 所出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강당 영건 공사 직전인 1794년에 작성된 『別庫小冊』에 의하면 별소 보유 전답은 4結 94卜으로 확인된다. 이는 1795년까지 세덕사가 직접 매입한 전답보다 1~2결 정도 많은 규모이다. 서원·사우에는 배향 인물의 후손들이 別所 내지 別庫라 불리는 독립된 기금을 마련하여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과 별소전답이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安康杞溪의 평야 지역에 산재한 것으로 나타나는 점 등을 보아 이 역시 세덕사 설립당시 배향인물의 후손들이 결성한 향단계와 무첨당계에서 출자한 전답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1799년 마침내 세덕사가 온전한 사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강당 및 부속 건물에 대한 논의는 2년 전인 179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었던 것이지만, 당해 년도에 이르러서야 필요한 재원이 마련이 되어 공사가 마무리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용된 총 공사 비용은 672냥 7전으로 비용의 내역을 살펴보면 本所 32냥 7전 5푼, 강당 基址開鑿貰 30냥, 運木貰 29냥 8전 6푼, 목수 工價 130냥, 冶匠鐵物及手價 67냥 8전, 鉅刀匠手價 26냥 7전 5푼, 盖匠手價 6냥, 椽木價 6냥, 土匠手價 7냥, 牛價 62냥 9전 8푼, 廟宇及瓦工價 3냥 5전, 落成宴 43냥 9전 3푼, 各色雜用 226냥 1전 3푼 등인데 堂役時 典穀兩入元數는 다음과 같다. 別所에서 辨備錢 657냥 7전, 龜岡書院 扶助錢 3냥, 玉山書院 扶助錢 3냥, 達田齋舍 扶助錢 5냥, 良洞孫氏門中 扶助錢 2냥, 楊月坊 李氏門中 扶助錢 1냥으로 별소 재원이 절대적이었다.
이렇듯 세덕사 재용의 운영은 별소에 대한 의존도, 즉 문중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세덕사가 문중사우로 설립된 까닭도 있겠지만, 본소 전답의 운영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재정확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경주지역 여주이씨 향단파의 문중사우인 세덕사가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데 있어 필요한 재용과 소모되는 비용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己未夏營建講堂盖 先父老用意營建旣勤且久
而但事鉅力綿年値亡歉迄未遑爲乃於是年夏一
門合講姳事於六月日木手及活土墻合十三人開基■
木皆令洞民給貰爲之其年至月始告訖至凡五間翼
以兩房而仍建正門三間 廟宇及瓦繼而爲之
堂役時錢穀所入元■
別所辨備錢陸百伍拾柒兩柒戔
龜岡書院扶助錢二兩
玉山書院扶助錢三兩
達田齋舍扶助錢五兩
東江書院扶助錢二兩
良洞孫氏門中扶助錢二兩
楊月坊李氏門中扶助錢一兩
合錢六百七十二兩七戔
三十二兩七戔五分本所移下三十兩講堂基址開鑿貰二十九兩八
戔六分運木貰一百三十兩木手工價六十七兩八戔冶匠鐵物及手
價二十六兩七戔五分釣刀匠手價六兩盖匠手價六兩椽木價
七兩土匠手價六十二兩九戔八分牛二十四石價三兩五戔廟宇及瓦
工價四十三兩九戔三分落成宴時用下二百二十六兩一戔三分家役
各色雜用白米二十九石四斗六刀半米十三石十四斗一刀用
成造都監李鼎寅
有司李鼎基
李麟祥
山長李憲敎
有司李岳祥
別有司李觀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