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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병진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796.4711-20180630.Y18504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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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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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796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1796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병진년 기록
1796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병진년 기사이다. 4월과 7월, 9월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4월의 기사는 백일장을 개최하였는데 회원, 향원, 본손들이 많이 참석하여 광경이 심히 성거하였다는 내용이고, 7월의 기사는 본동의 연정으로 전소에 운치케 묘우 번와를 둔 후에, 장외 포사와 원장에 썩고 무너진 것을 구제에 따라 보축한다는 내용이다. 9월의 기사는 묘내 원장 10여 양소가 무너졌으니 구제에 따라 보축하고 누각 3방에 비가 새니 수리 하며 포사에 비가 새는 곳은 부녀와 수십장으로 보즙하고, 송단 1주목이 썩어 손상되었으니 향례 때 작벌하여 후에 강당의 대량으로 사용하고, 본소는 일찍이 책전을 모아 취식하고 원수는 부이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별임 이낙상이 별소전 10냥을 제출하였으니 첨보하여 취식한다는 내용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96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병진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796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병진년 기사이다. 4월과 7월, 9월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4월의 기사는 白日場을 개최하였는데 會員, 鄕員, 本孫들이 많이 참석하여 광경이 심히 盛擧하였다는 내용이고, 7월의 기사는 本洞의 烟丁으로 前所에 運致케 廟宇 燔瓦를 둔 후에, 墻外 庖舍와 垣墻에 썩고 무너진 것을 舊制에 따라 補築한다는 내용이다. 9월의 기사는 廟內 원장 10餘 兩所가 무너졌으니 구제에 따라 보축하고 누각 3方에 비가 새니 수리 하며 庖舍에 비가 새는 곳은 夫女瓦 數十丈으로 補葺하고, 松壇 1株木이 썩어 손상되었으니 香禮 때 斫伐하여 후에 講堂의 大樑으로 사용하고, 본소는 일찍이 冊錢을 모아 取息하고 元數는 不移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別任 李洛詳이 別所錢 10냥을 除出하였으니 添補하여 取息한다는 내용이다.
조선후기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사족인 여주이씨는 18세기 이후 원사 건립이 문중, 더 나아가 파별로 더욱 세분화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파별로 원사의 분립 현상이 뚜렷해졌다. 여주이씨는 賜額書院인 옥산서원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었으며, 이후 그의 父·弟·庶子·孫을 배향하는 雲泉書院(李彦适)·世德祠(李蕃·李彦适)·章山書院(서배, 李全仁)·景山祠(無添堂派, 李宜潤)·杜谷影堂(守拙堂派, 李宜潛)을 설립하여 각 파별로 문중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주이씨는 18세기 초까지는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 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언적이라는 傍祖보다는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사우를 건립하여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派祖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덕동마을에 세거한 여주이씨 향단파 후손들에 의해 세덕사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의 입향조인 李蕃과 그의 2자인 李彦适 부자를 배향하는 문중 사우였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문중에 의해 건립되고 운영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재원을 확보해 나갔다. 이전의 『考往錄』의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대부분이 전답을 매입하거나 移買하는 등의 전답확보를 통한 재산 축적 관련 기사가 많이 때문이다. 세덕사 설립 후 10여 년 동안 꾸준히 전답을 통한 所出 자금을 확보했고 그를 바탕으로 백일장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에 실시한 백일장에는 회원뿐만 아니라 향원, 본손들이 많이 참석하였고 우수한 詩賦를 納券한 이에게는 賞給도 주었다고 하였다. 단순한 私廟로서 제향의 공간이 아닌 비록 정기적인 행사는 아니었지만 문중의 老少와 內外孫 및 지역 인사들의 文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학문 활동의 장으로서도 기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본 기록이 작성되기 이전부터 세덕사에서는 꾸준히 전답을 통한 재정 확보라는 기조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고 세덕사 설립 직후의 전답은 본 기록이 작성될 시점에 이르러서는 본소와 별소를 합친 규모가 약 10결 정도로 여타의 문중 사우에 비해 상당하였다. 물론 별소 전답의 경우 배향 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조성된 일종의 기금 형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10결 내외의 전답 모두가 세덕사의 소유로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시기 설립되었던 미사액 서원이나 사우의 보유 전답과 비교해 보면 규모가 큰 편이다.
한편 세덕사는 건립되고 일정기간이 지나면서 건물도 퇴락하면서 때때로 간단한 수리와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해년에 시행된 공사에도 別所의 재용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건립되지 못한 강당의 재원이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덕사 본소의 재산으로는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屬村의 烟役이 제공되었지만, 자재 구입 및 工價, 식대 등으로 소모되는 비용이 세덕사에 있어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세덕사 재용의 운영은 별소에 대한 의존도, 즉 문중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세덕사가 문중사우로 설립된 까닭도 있겠지만, 본소 전답의 운영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재정확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경주의 대표 사족 여주이씨 향단파의 문중사우인 세덕사의 재원 운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타의 문중사우와 달리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本所의 전답만으로 사우 운영에 있어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別所의 재용 및 여타의 경제 기반을 통한 운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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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丙辰四月二十二日達齋居接後回設日場於七卜所會員鄕
員及本孫多至數百設場於樓前島樹下以長繩越洞往
來釣納券軸卽時光景甚盛擧也
七月日使本洞炯丁運致前所燔瓦置于 廟宇後墻外
庖舍垣墻而兩頹圮切仍舊制補築
山長李鼎凝
有司李鼎贊
九月日廟內垣墻十餘把爲兩所圮切仍舊制補築樓閣三
方衡椽添漏切召工及改庖舍亦有添漏處夫女瓦數十丈補葺
松壇一株木有朽傷未切 享禮時䂨伐裁斷以爲日後講堂
大樑計
本所曾有冊錢加出取息而元數不多準事未易別任
李洛祥除出別所錢十兩添補取息
山長李憲程
有司李鼎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