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임자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792년 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임자년 기록으로 세덕사를 운영하기 위해 매입한 전답에 관한 사항을 열기하고 있다. 용전의 답을 給價한 비용이 100냥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나며 당시의 山長은 이헌순, 有司는 이정수이다.
17세기 중반 이래로 향촌사회에서는 朱子家禮의 보급과 실천을 강화하면서 嫡長子 중심의 宗法질서가 확립되고, 門中과 同姓村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문중기반의 사족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8세기 이후 각 문중 간 우위 경쟁도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각 가문의 先祖를 제향하는 門中院祠의 건립이었다. 17세기 말부터 경주지역에서는 龜江書院(1696년, 경주이씨)·龍山書院(1700년, 경주최씨)·東江書院(1707년, 경주손씨)·鶴南祠(1722년, 청풍김씨)·三綱祠(1736년, 옥구이씨)·雲泉書院(1738년, 여주이·안동권씨)·丹溪祠(1739년, 안동권씨)·章山書院(1780년, 여주이씨옥산파)·羅山祠(1780년, 김해김씨)·德淵世德祠(1779년, 여주이씨향단파)·龜山書院(1786년, 이천서씨)·虎溪祠(1786년, 안동권씨)·智谷祠(1786년, 창원황씨)·花川祠(1792년, 서산류씨)·聖山祠(1811년, 영일정씨)·德山祠(1828년, 경주김씨), 汶湖祠(1829년, 경주이씨)·北山祠(1830년, 경주이씨)·南岡祠(1831년, 경주김씨)·丹𣽎祠(1831년, 경주손씨)·景山祠(1840년, 여주이씨무첨당파)·花岡祠(1844년, 경산전씨)·活川祠(1846년, 김해김씨)·杜陵祠(1847년, 곡산한씨)·玉淵祠(1850년, 안동권씨)·南岳祠(1868년, 풍천임씨)·鶴皐祠(경주박씨)·光山祠(正祖代, 오산백씨) 등의 문중원사가 건립되었다. 이외에 수령(경주부윤)이 건립을 주도한 梅月堂祠(1670년)가 있으며, 당색에 따라 건립된 仁山書院(1719년, 노론계), 明山書院(1831년, 소론계)이 있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이번(李蕃, 1463~1500)과 그의 2자인 이언괄(李彦适, 1494~1553) 부자를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건립하였다. 따라서 세덕사는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경주 府北 지역에 설립되어 여주이씨 각 문중과 밀접한 관계 속에 운영되었다. 특히 세덕사가 설립된 덕동은 배향 인물인 이언괄의 후손으로 구성된 향단파가 세거하는 지역이다. 향단파는 원래 양동에 세거하였는데, 이언괄의 4세손 李壃(1621~1688)이 壬亂功臣 鄭文孚(1565~1624)의 孫壻가 되면서 덕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란 당시 이곳은 정문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가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손서인 이강에게 덕동의 四友亭·龍溪亭 등의 가옥을 양도하게 되었고, 그 후로 이강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설립 초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세덕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접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 기록이 작성되기 이전인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무첨당계와 향단계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단계에서 田 43두락, 畓 114두 5도락을 소납하였으며, 무첨당계에서는 답 20두락을 소납했다고 나타나고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으로 볼 때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생각된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는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추어 운영기금으로 각각 토지를 출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소출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재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금 사용되었다. 『考往錄』에 의하면 전답 매입은 설립 초창기 10여 년 동안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안강과 기계 일대의 평야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본 기록도 덕동 일대의 畓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784~1795년 약 10여 년 동안 전답을 집중적으로 매득하고 있다.
전답매입 등으로 확보된 재산은 이후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공사 및 물품 구입 등으로 지출되었다. 세덕사에서 행해지는 행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개최되는 춘추향례와 매년 정월 내·외 후손들이 참여하는 正朝參謁이 있다. 이때마다 사용되는 제기의 마련과 참여자에 대한 居接은 세덕사의 매년 행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춘추향례와 정조참알과 같은 정기적 행사 이외에도 세덕사에서는 백일장과 文會 등의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우 운영의 제반 경비는 언제나 부족한 형편이었고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세덕사의 초창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세덕사가 설립되었으나 재원은 부족하였고, 본 기록은 그러한 상황에서 세덕사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