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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무신년 기록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788.4711-20180630.Y18504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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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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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788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1788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무신년 기록
1788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의 무신년 기록으로 세덕사에서 매입한 전답에 대한 사항과 건물보수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의 산장은 옥산서원 재임을 역임한 이정제이고, 유사는 이인상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788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무신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788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무신년 기록으로 世德祠에서 매입한 전답에 대한 사항과 건물보수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의 산장은 옥산서원 재임을 역임한 이정제이고, 유사는 이인상이다.
세덕사는 조선시대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驪州李氏 가문에 의해 운영된 문중사우로 1779경주부 기계면에 설립되어 1868년 훼철될 때까지 약 90년간 존속하였다. 18세기 이후 유교적 종법질서의 정착과 문중의식이 강화되면서 각 문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서원·사우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문중서원·사우의 건립이 크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문중별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문별 또는 파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러한 서원·사우의 건립의 추세 속에 경주의 여주이씨 경우도 파별 분립이 뚜렷해졌다.
17세기 중반 이래로 향촌사회에서는 朱子家禮의 보급과 실천을 강화하면서 嫡長子 중심의 宗法질서가 확립되고, 門中과 同姓村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문중기반의 사족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18세기 이후 각 문중 간 우위 경쟁도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각 가문의 先祖를 제향하는 門中院祠의 건립이었다. 17세기 말부터 경주지역에서는 龜江書院(1696년, 경주이씨)·龍山書院(1700년, 경주최씨)·東江書院(1707년, 경주손씨)·鶴南祠(1722년, 청풍김씨)·三綱祠(1736년, 옥구이씨)·雲泉書院(1738년, 여주이·안동권씨)·丹溪祠(1739년, 안동권씨)·章山書院(1780년, 여주이씨옥산파)·羅山祠(1780년, 김해김씨)·德淵世德祠(1779년, 여주이씨향단파)·龜山書院(1786년, 이천서씨)·虎溪祠(1786년, 안동권씨)·智谷祠(1786년, 창원황씨)·花川祠(1792년, 서산류씨)·聖山祠(1811년, 영일정씨)·德山祠(1828년, 경주김씨), 汶湖祠(1829년, 경주이씨)·北山祠(1830년, 경주이씨)·南岡祠(1831년, 경주김씨)·丹𣽎�祠(1831년, 경주손씨)·景山祠(1840년, 여주이씨무첨당파)·花岡祠(1844년, 경산전씨)·活川祠(1846년, 김해김씨)·杜陵祠(1847년, 곡산한씨)·玉淵祠(1850년, 안동권씨)·南岳祠(1868년, 풍천임씨)·鶴皐祠(경주박씨)·光山祠(正祖代, 오산백씨) 등의 문중원사가 건립되었다. 이외에 수령(경주부윤)이 건립을 주도한 梅月堂祠(1670년)가 있으며, 당색에 따라 건립된 仁山書院(1719년, 노론계), 明山書院(1831년, 소론계)이 있다.
여주이씨는 사액서원인 옥산서원에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었으나, 18세기부터 이언적의 父와 庶子·손자를 배향하는 雲泉書院(李彦适)·世德祠(李蕃·李彦适)·章山書院(庶子, 李全仁)·景山祠(孫, 李宜潤)를 설립하였고, 守拙堂派는 파조인 李彦潛의 영정을 모시는 社谷影堂을 설립하여 각 파별로 운영하고 있었다. 도내 유림의 공론으로 설립되었던 옥산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주이씨 각 파가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의 입향조인 이번과 그의 2자인 이언괄 부자를 배향한다는 데서, 여주이씨 문중에 의해 건립되고 또 여주이씨 문중에 의해 전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세덕사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山長과 有司가 모두 문중 인물로 임명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따라서 세덕사 설립 초창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세덕사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의 마련과 더불어 강당을 건립할 재원은 확보하는데 있었다.
설립 초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세덕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접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 기록이 작성되기 이전인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무첨당계와 향단계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단계에서 田 43두락, 畓 114두 5刀落을 소납하였으며, 무첨당계에서는 답 20두락을 소납했다고 나타나고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으로 볼 때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생각된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는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추어 운영기금으로 각각 토지를 출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소출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재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금 사용되었다. 『考往錄』에 의하면 전답 매입은 설립 초창기 10여 년 동안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안강기계 일대의 평야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1784~1795년 약 10여 년 동안 전답을 집중적으로 매득하고 있다.
전답매입 등으로 확보된 재산은 이후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공사 및 물품 구입 등으로 지출되었다. 세덕사에서 행해지는 행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개최되는 춘추향례와 매년 정월 내·외 후손들이 참여하는 正朝參謁이 있다. 이때마다 사용되는 제기의 마련과 참여자에 대한 居接은 세덕사의 매년 행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춘추향례와 정조참알과 같은 정기적 행사 이외에도 세덕사에서는 백일장과 文會 등의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우 운영의 제반 경비는 언제나 부족한 형편이었고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세덕사의 초창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과 사우의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세덕사의 배향인물이 양동의 입향조의 이번과 그의 2자인 이언괄이었다는 점에서 그 운영에 여주이씨 전 문중이 절대적으로 주도하였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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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戊申春燔瓦十訥餘於堤山下每訥價五兩式許給後只給塩衆
以爲日後考證事
山長李鼎躋
有司李麟祥
都監李鼎凝
有司李鼎勗
同年月日龍方員信字二十一畓七卜八束二斗落給價二十兩
山長李鼎躋
有司李麟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