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봄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병오년 기록.
[내용 및 특징]
1786년 봄에 작성된 세덕사 『考往錄』의 병오년 기록으로 세덕사에서 매입한 전답에 대한 사항과 건물보수에 관한 사항이다. 도기의 畓을 43냥을 소요하여 매입하였고, 庖舍 지붕 수리를 위해 기와 181장을 49냥을 들여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산장은 옥산서원 재임과 원장 등을 역임한 이정택이고, 유사는 양졸당파 이정화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李蕃(1463~1500)과 그의 2자인 李彦适, 1494~1553) 부자를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건립하였다. 따라서 세덕사는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경주 府北 지역에 설립되어 여주이씨 각 문중과 밀접한 관계 속에 운영되었다. 특히 세덕사가 설립된 덕동은 배향 인물인 이언괄의 후손으로 구성된 향단파가 세거하는 지역이다. 향단파는 원래 양동에 세거하였는데, 이언괄의 4세손 李壃(1621~1688)이 壬亂功臣 鄭文孚(1565~1624)의 孫壻가 되면서 덕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란 당시 이곳은 정문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가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손서인 이강에게 덕동의 四友亭·龍溪亭 등의 가옥을 양도하게 되었고, 그 후로 이강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따라서 세덕사 설립 초창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세덕사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의 마련과 더불어 강당을 건립할 재원은 확보하는데 있었다.
설립 초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세덕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접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 기록이 작성되기 이전인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무첨당계와 향단계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단계에서 田 43두락, 畓 114두 5刀落을 소납하였으며, 무첨당계에서는 답 20두락을 소납했다고 나타나고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으로 볼 때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생각된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는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추어 운영기금으로 각각 토지를 출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소출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재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금 사용되었다. 『考往錄』에 의하면 전답 매입은 설립 초창기 10여 년 동안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안강과 기계 일대의 평야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본 기록도 도기의 畓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784~1795년 약 10여 년 동안 전답을 집중적으로 매득하고 있다.
전답매입 등으로 확보된 재산은 이후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공사 및 물품 구입 등으로 지출되었다. 세덕사에서 행해지는 행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개최되는 춘추향례와 매년 정월 내·외 후손들이 참여하는 正朝參謁이 있다. 이때마다 사용되는 제기의 마련과 참여자에 대한 居接은 세덕사의 매년 행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춘추향례와 정조참알과 같은 정기적 행사 이외에도 세덕사에서는 백일장과 文會 등의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우 운영의 제반 경비는 언제나 부족한 형편이었고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세덕사가 묘우를 갖춘지 수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여타의 건물을 신축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포사의 기와를 바꾸는 정도의 공사만이 진행되어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우의 외형을 구축하지는 못한 시기의 기록으로 강당과 재실의 營建이 시작도 되지 못한 시점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료적 가치]
세덕사의 배향인물이 양동의 입향조의 이번과 그의 2자인 이언괄이었다는 점에서 그 운영에 여주이씨 전 문중이 절대적으로 주도하였다. 특히 향단파의 역할이 컸었는데 이는 향단파의 세거지인 덕동에 세덕사가 건립되었고 또한 세덕사의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의 대부분을 출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세덕사의 초창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과 사우의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