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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1784)년 3월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수록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784.4711-20180630.Y18504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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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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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784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갑진(1784)년 3월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수록 기사
갑진(1784)년 3월에 작성된 것으로 세덕사 『고왕록』에 수록된 기사이다. 세덕사를 운영하기 위해 매입한 전답에 관한 사항을 열기하고 있다. 탑동을 비롯한 양동, 원당 등지에서 답을 급가한 비용이 총 295냥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나며 당시의 산장은 이헌광, 유사는 이정응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갑진(1784)년 3월에 작성된 세덕사 『고왕록(考往錄)』 수록 기사.
[내용 및 특징]
갑진(1784)년 3월에 작성된 것으로 세덕사 『考往錄』에 수록된 기사이다. 세덕사를 운영하기 위해 매입한 전답에 관한 사항을 열기하고 있다. 탑동을 비롯한 양동 원당 등지에서 畓을 給價한 비용이 총 295냥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나며 당시의 山長은 이헌광, 有司는 이정응이다.
세덕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경주부의 임내였던 기계현에 속했으며, 세덕사 설립 당시에는 面里制 개편으로 경주부 기계면덕동으로 편제된 곳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이번과 그의 2자인 이언괄 부자를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이언괄의 후손들은 독자적으로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 건립을 통해, 파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건립하였다. 따라서 세덕사는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경주 府北 지역에 설립되어 여주이씨 각 문중과 밀접한 관계 속에 운영되었다. 특히 세덕사가 설립된 덕동은 배향 인물인 이언괄의 후손으로 구성된 향단파가 세거하는 지역이다. 향단파는 원래 양동에 세거하였는데, 이언괄의 4세손 李壃이 壬亂功臣 鄭文孚의 孫壻가 되면서 덕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란 당시 이곳은 정문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가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손서인 이강에게 덕동의 四友亭·龍溪亭 등의 가옥을 양도하게 되었고, 그 후로 이강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설립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李鼎岳(1736~1792)과 李鼎凝(1743~1796)이다. 이정악은 양졸당파의 파조 宜澄의 6세손이며 이정응은 향단파의 파조 宜澍의 6세손이다. 이 두사람은 溫陽公과 門丈 등 문중의 여러 인사를 찾아 세덕사 설립을 설득하였다. 특히 이정응덕동에 정착한 이강의 4세손으로 세덕사 설립 초창기 有司를 오랫동안 역임하였는데 본 기록이 작성된 당시에도 유사의 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세덕사가 설립되고 묘우가 만들어졌으나, 재물이 부족하여 나머지 부속건물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강당은 묘우 아래에 위치한 龍溪亭을 임시로 썼다. 따라서 세덕사 설립 초창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세덕사 운영에 사용될 경제적 기반의 마련과 더불어 강당을 건립할 재원은 확보하는데 있었다.
설립 초기 세덕사는 전답의 매입을 통해 세덕사 재산을 확보해 나갔다. 전답 매입비용은 설립초기 문중에서 出資된 접답에서 所出되는 자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 기록이 작성되기 이전인 1780년에 작성된 『世德祠田畓案附奴婢案』에 따르면, 무첨당계와 향단계에서 각각 전답을 所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단계에서 田 43두락, 畓 114두 5도락을 소납하였으며, 무첨당계에서는 답 20두락을 소납했다고 나타나고 있다. 무첨당계와 향단계의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명칭으로 볼 때 각각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후손에 의해 결성된 族契로 생각된다. 문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족계는 자신들의 현조를 배향하는 세덕사 설립에 맞추어 운영기금으로 각각 토지를 출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전답에서의 소출은 세덕사 운영에 기본 재산이 되는 전답확충에 다시금 사용되었다. 『考往錄』에 의하면 전답 매입은 설립 초창기 10여년 동안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안강기계 일대의 평야를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본 기록도 탑동, 양동, 원당 일대의 畓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1784~1795년 약 10여년 동안 전답을 집중적으로 매득하고 있다.
전답매입 등으로 확보된 재산은 이후 세덕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와 공사 및 물품 구입 등으로 지출되었다. 세덕사에서 행해지는 행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개최되는 춘추향례와 매년 정월 내·외 후손들이 참여하는 正朝參謁이 있다. 이때마다 사용되는 제기의 마련과 참여자에 대한 居接은 세덕사의 매년 행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춘추향례와 정조참알과 같은 정기적 행사 이외에도 세덕사에서는 백일장과 文會 등의 학문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우 운영의 제반 경비는 언제나 부족한 형편이었고 이러한 양상은 세덕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중사우에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개별 사우의 운영을 독립시킬 수 있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문중으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아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세덕사의 초창기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세덕사의 배향인물이 양동의 입향조의 이번과 그의 2자인 이언괄이었다는 점에서 그 운영에 여주이씨 전 문중이 절대적으로 주도하였다. 특히 향단파의 역할이 컸었는데 이는 향단파의 세거지인 덕동에 세덕사가 건립되었고 또한 세덕사의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의 대부분을 출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이미지

원문 텍스트

甲辰三月日塔洞員忘字四十四畓一卜四束二十畓十二卜八束四斗五刀
落短字二十一畓十六卜一束六斗落合十斗五刀落給價八十五兩
同年月日良洞豆今員入字八畓十一卜三束四斗落給價四十兩
訓字五十一畓七卜五束三斗落給價二十六兩靑字
斗落給價五十兩元塘石橋員馳字四十畓四十畓合
四斗落給價四十四兩玄風員鑑字畓五斗落給價五
十兩
山長李憲光
有司李鼎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