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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1779) 2월 12일에 작성된 세덕사(世德祠)『고왕록(考往錄)』수록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Z.1779.4711-20180630.Y18504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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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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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작성시기 1779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현소장처: 경주 세덕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안내정보

기해년(1779) 2월 12일에 작성된 세덕사(世德祠)『고왕록(考往錄)』수록 기사
기해(1779)년 2월 12일에 작성된 것으로 세덕사『고왕록』에 수록된 기사이다. 강당과 재실이 미처 건립되지 않은 이유로 사의정을 임시 강당으로 사용하고, 일체의 제기와 향로 1합은 옥산서원에서 봉납하며, 양동평에 있는 별소답 40두락 중, 30두락은 본소에 납속하고 10두락은 별소에 그대로 두어 후일 강당을 영건하는 비용으로 쓴다는 내용이다. 산장은 이헌탁이고 유사는 이정응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기해년(1779) 2월 12일에 작성된 세덕사(世德祠)『고왕록(考往錄)』수록 기사.
[내용 및 특징]
기해(1779)년 2월 12일에 작성된 것으로 세덕사『考往錄』에 수록된 기사이다. 강당과 재실이 미처 건립되지 않은 이유로 四宜亭을 임시 강당으로 사용하고, 일체의 제기와 향로 1盒은 옥산서원에서 奉納하며, 良洞坪에 있는 別所畓 40斗落 중, 30두락은 本所에 納屬하고 10두락은 別所에 그대로 두어 후일 강당을 영건하는 비용으로 쓴다는 내용이다. 山長은 李憲鐸이고 有司는 李鼎凝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에 위치한 세덕사는 조선시대 경주지역을 대표했던 驪州李氏 가문에 의해 운영된 문중사우로 본 문서가 작성된 1779년에 설립되어 1868년 훼철될 때까지 90년간 존속되었다.
경주지역은 경상도 列邑 중에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경주부 사족들은 16세기 중·후반에 西岳·玉山書院을 건립하였고 또한 본읍의 邑誌를 편찬하였으며 향안 작성을 통한 유향소 운영과 향교 및 院·祠를 출입하면서 향촌사회를 영도하였고, 한편으로는 이를 매개로 지방유림을 조직·동원하여 그들의 이해를 관철해 나갔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士林의 활동에 서원의 역할이 점차 커지자 각 문중들은 향중 공동의 서원이 아닌 개별 문중 중심의 원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18세기 이후가 되면 각 문중, 더 나아가 문중의 파별로 더욱 세분화되어 각기 자기 조상을 위주로 한 서원·사우·鄕祠·精舍 등을 경쟁적으로 건립하여 지역적·종족적 유대를 강화하고 향촌 내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주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많은 수의 서원과 사우가 濫設되었다. 양좌동의 孫·李 良姓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경주를 대표했던 경주김·이·최·손씨 및 청주안씨, 영일정씨, 이천서씨, 곡산한씨, 풍천임씨, 영양남씨, 안동권씨 등 유력 사족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입향조, 中始祖, 현조 가운데 1祖 또는 공동의 조상을 주향 또는 배향·추배 등의 형식을 통하여 서원·사우를 설립하고 있었다. 이들 원사 대부분은 18세기 후반~19세기 사이에 건립된 문중사우이다.
세덕사는 여주이씨 양좌동 입향조인 이번(李蕃, 1463~1500)과 그의 2자인 이언괄(李彦适, 1494~1553) 부자를 배향하고 있다. 여주이씨가 영남에 정착한 이후 이언적(1491~1553)이 학문과 사환을 겸비하여 東方五賢의 인물로서 사후에 ‘宗廟配享’(명종)과 ‘文廟從祀’라는 人臣으로서 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향유한데서 이 가문은 17세기 이후 경주뿐만 아니라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잡았다. 이 가문이 양동에 정착한 이후부터 급격히 족세가 번창하여 인근의 안강·기계·신광 등지로 확산되어 나갔다. 한편 이언적·이언괄 형제의 아들·손자 대에 걸쳐 모두 9개의 분파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분파는 18세기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종적 유대관계의 강화와 문중 내 각 파별로 직계 조상을 내세워 가계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당대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방계손의 경우 가문 내 영향력이 후대로 갈수록 약해짐에 따라, 각 방계는 직계 현조를 중심으로 분파·결속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방계손은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직계 현조를 모시는 서원·사우 건립을 통해,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고 파조를 선양하여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 서원과 사우는 여주이씨의 근거지인 경주 府北 지역에 설립되어 여주이씨 각 문중과 밀접한 관계 속에 운영되었다. 세덕사가 설립된 덕동은 배향 인물인 이언괄의 후손으로 구성된 향단파가 세거하는 지역이다. 향단파는 원래 양동에 세거하였는데, 이언괄의 4세손 李壃(1621~1688)이 壬亂功臣 鄭文孚(1565~1624)의 孫壻가 되면서 덕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란 당시 이곳은 정문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가 전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손서인 이강에게 덕동의 四友亭·龍溪亭 등의 가옥을 양도하게 되었고, 그 후로 이강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세덕사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778년부터 여주이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문중에 통서를 보내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하였고 종중의 인원들이 참여하여 터를 잡고 상량을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세덕사와 옥산서원과의 관계이다. 본 기록에 언급되는 바와 같이 제기와 향로를 奉納한 것뿐만 아니라 세덕사는 옥산서원으로부터 강당 영건 시에 부조를 받았고, 춘추향례 때마다 물품을 빌려다 사용하였다. 또한 옥산서원은 『近思錄』, 『晦齋集』, 『九經』, 『求仁錄』 등의 책을 세덕사에 印送하였다. 이는 옥산서원과 세덕사의 배향인물이 부자·형제 간인 것도 있지만, 양 원사의 운영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중첩되고 있었기 때문에 옥산서원의 세덕사에 대한 원활한 지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 세덕사의 山長과 有司를 역임한 인물은 모두 211명인데, 이중 34명이 옥사서원의 院長 또는 유사를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데서 두 서원과 사우와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본 문서가 작성될 시기의 세덕사의 산장은 옥산서원의 원장직을 역임한 이헌탁이고, 유사는 사의당의 4세손으로 옥산서원의 재임직을 역임했던 이정응이다.
[자료적 가치]
사우는 서원에 비해 문중에 의한 운영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서원과는 또 다른 사회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우는 서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물 건축비용과 운영비의 부담이 적었고, 배향 인물의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의 명문벌족이 아니라도 문중 조직을 통해 보다 쉽게 설립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국가의 서원 신설 금지라는 금령을 피해 서원 설립의 전 단계로서 사우를 설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18세기 후반 이후 건립된 원사는 대부분 문중사우였다고 보여지며 따라서 조선후기 사회적 변화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향촌활동은 서원보다 사우에서의 활동이 좀 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기록은 당시 경주지역의 여주이씨 문중사우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慶州 世德祠 연구」,『민족문화논총』45,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0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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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己亥二月十二日丁卯立 世德祠
廟宇十月二十六日丙子
奉安
左贊成公以 察訪公配 享
講堂及齋室未及營建故以四宜亭爲臨時講堂
祭器一切香爐臺盒自玉山書院奉納別所畓總四十
斗落中三十斗落納屬本所十斗落姑置別所爲後日
講堂營建之資耳在良洞坪 山長李憲鐸
有司李鼎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