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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M.1789.4725-20180630.Y185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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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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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작성시기 1789
형태사항 크기: X 34.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93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160

안내정보

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庬村 황희를 제향한 옥동서원의 1789년(정조 13) 사액과정 전말이 기록된 疏廳日記이다. 옥동서원은 1580년(선조 13) 황희의 영당을 건립하고 춘추향사를 봉행하여 오다가, 1714년(숙종 40)에 沙西 全湜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이어 1715년(숙종 41)에는 신덕리에 위치한 방촌 황희의 영당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 후 1783년(정조 7)에는 황희의 후손인 畜翁 황효헌과 槃澗 黃紐를 추배하였다. 이어 1789년(정조 13)에는 영남 사림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옥동서원이라 액호를 받았다. 본 서원은 고종 연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있었던 서원 훼철령에도 제외된 미훼철 사우(祠宇) 47개소 중 하나로 지금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본 소청일기는 옥동서원 창건록에 부록된 자료로 1789년(정조 13)에 5월 27일부터 다음해 3월 24일까지 청액 준비 후 상경, 청액 시도 및 활동 그리고 활동 과정에서 만나 다양한 사람들과 정치적 사건, 청액 후 상황 등 서원 청액과 관련해서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된 중요한 일기이다. 현전하는 사액 관련 자료들도 그 내용이 소략하여 단편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옥동서원에서 행해진 사액 과정과 진행 상황을 기록한 본 일기는 이를 규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옥동서원의 구체적인 사액 관련 여러 절차를 확인하는 작업은 한국 서원 문화의 발굴과 소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道, 東에서 꽃피다』, 달성군청,달성문화재단,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소청일기는 옥동서원 창건록에 부록된 자료로 1789년(정조 13) 5월 27일부터 1790년(정조 14) 3월 24일까지 청액 준비와 소행(所行) 및 상경(上京) 활동 등 서원 청액 전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庬村 황희를 제향한 옥동서원의 1789년(정조 13) 사액과정 전말이 기록된 疏廳日記이다. 옥동서원은 1580년(선조 13) 황희의 영당을 건립하고 춘추향사를 봉행하여 오다가, 1714년(숙종 40)에 沙西 全湜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이어 1715년(숙종 41)에는 신덕리에 위치한 방촌 황희의 영당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 후 1783년(정조 7)에는 황희의 후손인 畜翁 황효헌과 槃澗 黃紐를 추배하였다. 이어 1789년(정조 13)에는 영남 사림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옥동서원이라 액호를 받았다. 본 서원은 고종 연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있었던 서원 훼철령에도 제외된 미훼철 사우(祠宇) 47개소 중 하나로 지금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서원에는 방촌 황희의 둘째 아들인 黃保身상주로 내려와 정착할 때 모사하여 온 영정 원본과 1752년(영조 28)의 사본, 1844년(헌종 10)의 모사본, 1857년(철종 8)의 모사본 등이 보전되어 있다. 현재 상주 옥동서원은 사적 제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청일기는 옥동서원 창건록에 부록된 자료로 1789년(정조 13)에 5월 27일부터 다음해 3월 24일까지 청액 준비 후 상경, 청액 시도 및 활동 그리고 활동 과정에서 만나 다양한 사람들과 정치적 사건, 청액 후 상황 등 서원 청액과 관련해서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된 중요한 일기이다. 날짜별로 그 일정을 따라서 사액 과정을 검토해 보자.
먼저 청액 시도 시점은 영남에 호의적이었던 정조 재위기간으로 선정 되었다. 정조 13년 5월 27일 청액소 임원으로 疏首 趙奎鎭, 院長 黃聖休, 齋任 黃弼熙, 黃宅坤이 차정되어 상경길에 올라 6일 만에 入城했다. 먼저 宗親인 監察 黃瑗과 청액 예절을 의논 했다. 황원의 자는 仲玉, 본관은 장수로 자기를 엄격히 해 공무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날로 명성과 공적이 드러난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 나라에서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막아 조정의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아뢰는 것을 一切 정지시켜 때는 아니지만 헛되이 되돌아 갈 수 없다"하며 힘써 돕겠다고 호응해 주었다. 숙소를 板井洞의 閭舍로 정한 뒤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다. 우선 泮村의 영남 유생들과 청액소 올리는 일을 대략적으로 의논한 후 청액소를 도와줄 인사들을 찾아 다닌다.
6월 9일 우의정으로 남인 영수 채제공의 집을 방문해 "오늘 유생들이 올라온 것은 오로지 대감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감께서 만약 이끌어주시지 않는다면, 영남의 선비들은 어디에 가서 아뢰겠습니까?"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이에 채제공도 근심하는 낯빛 없이 반드시 疏廳을 설치해야 한다고 답변을 해주었다. 같은 날 다시 반촌에 가서 영남 출신 조정 대신과 유생들로부터 사액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나 성균관과 사학이 비어 통문 할 곳이 마땅하지 않는 답답한 형편을 토로했다.
6월 12일 상소문을 관장하는 承旨 洪仁浩를 만나고자 京營에 갔으나 출근한 그 대신 동생 교리 洪義浩를 만나 청액소 진달 방도를 논의했으나 의례적인 답만 듣고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別檢 宋翼魯를, 6월 15일에는 참판 李獻慶을 방문했다. 소청 설치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재차 채제공 집으로 걸음 해 공의를 누구 막을 수 있느냐며 걱정 말라는 말을 듣고 소청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홍인호를 다시 찾았으나 헛걸음 하였다.
6월 20일 상소문을 짓기로한 黃監察이 기존 청액소 사례를 요청했고, 이때 부족한 제반비용을 지인을 통해 봉산현에서 100냥을 빌려왔다. 다음날 반촌 典籍 金紘에게 상소문을 지어 줄 것을 촉탁하자 허락받고, 네 선생의 實記를 드렸다. 그러나 태학이 空官하여 통문 받기가 요원했다. 7월 1일 김굉이 청액소 초안을 완성했는데 배향 인물 중 元位만 거론하고 配位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또한 태학에 통문을 써 星州崔鵬海의 저택에 놓아두었다. 그래서 館任이 선출되기를 기다린 후에 답장의 통문을 받기로 하였다.
7월 8일 황원이 상소문 초안을 작성했는데 김굉과 마찬가지로 원위만 언급되어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해 "서울에서의 최근 사례는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찌 규정 이외의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또한 元位가 사액의 恩典을 입게 되면, 중요한 것을 들어 가벼운 것을 포함하는 것이 되니 조금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따르게 되었다.
7월 11일 상소문 초안 2부에 대해서 문의한 결과 김굉이 지은 것이 더 낫다는 여론에 따라 그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12일 무신 난 60년을 맞아 영남 유생들이 상경해 창의록 소청을 설치하여서 그 일과 관련해 며칠을 간여했다. 7월 22일 드디어 성균관 답통이 도착하였다. 7월 24일 상소문 초안 2부를 채제공에게 자문 차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교리 홍의호에게 가서 질의 하였다. 최종적으로 황원의 초안으로 낙점 후 소청 임원을 선임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疏首에 조규진을 필두로 掌議 安東柳鳳祚善山鄭台東, 疏色 玄風의 進士 金重燁永川鄭夏纘, 製疏 進士 李宗洛, 寫疏 尹相烈, 讀疏 李翼遠, 都廳 尙州의 趙允浩가 추천되었다. 그리고 會員은 黃聖休 외 16명으로 구성되었다.
7월 26일 거듭 채제공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고, 다음날에는 工曹의 直房에다 疏廳을 정하였다. 반촌에서 실무진에게 편지가 왔는데 한 道에서 두 가지 상소를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접한 실무진은 논의 끝에 창의록과 함께 하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시비가 이어지는 가운데 8월 5일 황희를 배향한 장수현滄溪書院에서도 사액을 청하러 왔다. 다행히 3일 후 창계서원에서 청액소를 먼저 시작한 옥동서원에 힘을 실어주기로 하고 양보해 주었다. 8월 6일 처음으로 상소문을 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8월 7일부터는 승정원에 청액소 요지를 진달하고 되받는 지난한 과정이 반복된다. 승정원에서 받아들 수 없는 이유를 업무 과다, 담당자 결석·병가·오침, 임금 행차에 따른 수용 불가, 과거시험일, 무응답 등 다양한 사유로 반려되었다. 또한 國忌日에는 아예 대궐문 밖에서 호소가 불가하였다. 당시 창의록 소청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8월 29일 경복궁에 들어가려 했으나 제지당하자 원장 황성휴는 "저희들은 翼成公을 모시는 書院에 사액을 청하는 일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5월에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에 일이 있어 답장의 통문을 받지 못해 여러 달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비로소 답장의 통문을 받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한 지가 이미 보름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임금에게 상소하여 허가를 받을지의 여부가 상부의 결제에 있고, 어떻게 받들어 들이게 하는 도리는 오직 여러분께 있습니다"라고 절절한 마음을 호소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는 청액소를 관장하는 동부승지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날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정오에 한번 더 요지를 넣자 관원이 임금이 幸行하므로 6일 후 재개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하지만 하루가 급한 실무진은 곧바로 호소를 이어갔다. 다만 요지는 승정원에 납입하지는 않았다. 반면 창의록 소청 측에서는 9월 2일 행행하는 임금의 수레 앞에 엎드려 호소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에 옥동서원에서도 9월 6일 중종의 능인 靖陵 가기 전 여러 편의 상소 가운데 하나로 글을 올렸다.
9월 8일 갑자기 金淡을 배향한 순흥부丹溪書院에서 사액을 요청하는 일로 대궐밖에서 호소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 행위는 격식에 어긋남을 들어 꾸짖었으나 여러 날 계속해 나갔다. 여전히 상소문 요지는 수용되지 않고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9월 10일 동부승지 李敏輔를 직접 만나 상소를 받아줄 것을 여러 번 간청했다. 그럼에도 이민보는 혼자 처리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만 밝혔다. 9월 13일 본 사안에 사전 협의한 이조참판 黃昇源를 찾아 주선을 요청했고, 힘써 주겠다는 답을 얻었으나 전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동부승지만 두 차례 교체되면서 상소가 수용되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9월 23일 창의록 소청 측에서 승정원이 세 가지 상소를 取捨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들어 자신들이 앞서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창의록 상소를 두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소는 비록 하루 이틀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더라도 마땅히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상소는 비록 이삼년을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속히 물러가라"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9월 29일 고향에서 상주목 道南書院의 先例에 따라 정위와 배위 모두 거론하는 상소문을 재작성하자는 의견이 올라와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이러한 상태에 더해 10월 9일 옥동서원의 또 다른 배향자 全湜의 후손들이 상소문 내 선조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들어 연명에서 탈퇴하는 등 논쟁이 일었다. 원장의 중재로 황원은 이 사안에 대해 기존의 견해를 제시했다.
10월 14일 令公 李亨元으로부터 동부승지 南鶴聞이 "참판 황승원이 그 자손으로서 승정원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데, 영감님께서는 어찌 그렇게 힘써 권하시느냐고 하며 동부승지는 상소문을 받아들일 뜻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말을 전해 들었다. 원장은 즉시 황성원에게 이 말을 전달하니 승정원에 힘써 말하겠다고 확답을 주었다.
10월 30일 승정원 書吏가 상소문과 疏首의 이름을 세 번 베껴 써서 들여보내라고 하여 변통이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변통은 전혀 없었다. 반면에 11월 6일 임금이 창의록을 열람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날 배위 세 선생의 事蹟을 지어 상소문의 원본을 고쳤다. 다음날 예조에서 창의록을 위한 상소의 소청에 임금이 재가를 알리는 의견문이 전해졌고, 11월 11일 임금은 비답을 내렸다. 비답의 핵심은 趙德鄰黃翼再의 죄명을 歲抄에서 특별히 깨끗이 없애주도록 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11월 21일 李獻慶, 兪恒桂, 丁範祖 남인계 인사들과 상소의 일을 상의했다. 그리고 11월 24일 義州의 林慶業 將軍을 모시는 書院에 기이한 일로 특별히 사액 받은 부러운 일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앞서 창의록 여파로 옥동서원의 악재로 작용하였다. 승정원에서는 "일찍이 영남의 창의록을 위한 상소의 일에서는 여러 번 율령으로 죄상을 추궁 당했다. 그런데 임금의 교시 중에 '법에서 금한다'는 두 글자 아래에 만약 멋대로 거두어들였다가 또 죄상을 추궁하게 되면, 이것은 참으로 두렵다. 그러니 사액의 상소문을 받아들일 뜻은 결단코 없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또한 영의정 金致仁, 좌의정 李性源 등 노론에서 조덕린의 伸冤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정국이 크게 냉각되고 승정원 관리 6명이 모두 파직당해 사실상 상소 진행이 불가한 처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단계서원 사액을 요청하던 유생들도 낙향 한다.
상경한지 반년이 지난 시점에 남인계 승지 洪仁浩와 접촉하면서 상황이 급진전 되어 간다. 12월 13일 그를 찾아 상소문을 받아들여 줄 것을 간곡한 요청에 마땅히 특별히 잘 주선할 것이라며 실무진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후 일들을 홍인호와 긴밀히 조율 속에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12월 22일 홍인호가 체직되는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그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추진하겠다며 소청 실무진을 안심 시켰다. 새해 1월 12일 마침내 고대하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승정원 서리가 상소문을 받을 것이라 말한 다음 疏首가 신을 가죽신과 函을 들 사령이 입을 直領을 미리 준비하고, 상소의 글 아래에 있는 유생의 명단에 몇 사람이 있으며,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두 장의 상소문 요지를 요구했는데 1장은 승정원에 들일 大槪狀이며, 다른 1장은 兵曹에 바칠 大槪狀이었다. 대궐문 밖에서 호소한지 8달 만에 이루어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월 14일 상소 실무진의 승정원 입시를 허락하였다. 그 과정이 다소 길지만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수 조규진은 함을 들 사령인 億彬으로 하여금 함을 들게 하고, 문을 지키는 서리로 하여금 길잡이를 하게 했다. 소수는 선비의 두건에 푸른 옷과 검은 가죽신을 신고 그 뒤를 따랐다. 돈화문 동쪽으로 들어가 進善門을 통과하여 인정전을 거쳐 숙장문을 지나 承政院에 들어갔다. 소수가 政堂의 툇마루에 서면 執禮書吏가 "曲拜"라고 외쳤다. 소수가 이에 서쪽을 향해 곡배를 마치자 집예서리가 이끌고 정당에 들어갔다. 한 승지가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가 상소문을 받들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소수로 하여금 크게 읽게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서 나서 곧 물러나와 돈화문의 호소하던 장소에서 부복하여 내려질 비답을 기다렸다. 한참 지난 뒤에 승정원의 書吏가 "상소에 대한 批答이 이미 내려졌습니다. 疏首 당장 승정원에 들어가 비답을 받드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소수가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니, 승정원의 서리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곡배청에 놓고는 "곡배"라고 외쳤다. 소수가 곡배하는 것을 바치고 상소에 대한 비답을 옮겨 적으려 할 때 홍인호가 뵙기를 청했다. 홍인호는 "상소의 일이 마침내 이와 같은 데까지 왔으며, 임금님 또한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주셨으니, 우리 유학의 학문적 행운이 이보다 성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수가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의 이 상소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영감께서 주선하신 힘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홍승지가 이렇게 말했다. "저의 힘이야 그 사이에 뭐가 있었겠습니까?" 소수가 말했다. "만약 영감이 아니었다면, 오늘 상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홍승지가 "이렇게 된 것은 진실로 괴이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비답의 내용은 "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 진실로 너희들의 말과 같이 翼成公의 공로는 제사를 받들어 높이 받들 만하다. 그런데 扁額이 빠진 것은 보기 드문 典禮로 흠이 되는 일이다. 해당하는 관아에서 당사자들이 제출한 문서와 장부에 대해 상세히 검토해서 아뢰고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이후 사액 소식을 들은 영남 출신 인사들의 축하 내방이 잇달았다. 1월 23일 예조에서 문의한 비답이 당도했는데 그 내용은 "翼成公의 院宇에 아직도 扁額이 빠져 있는 것이 어찌 흠이 되는 일 가운데도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扁額에 쓸 이름을 지어 바치기를 文任에게 명하노라. 그리고 賜額의 날에는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고, 祭文은 마땅히 친히 지을 것이다. 일찍이 들자니 坡高에 翼成公의 자손이 있다고 하던데,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거기에 있는지 경기도 監司는 찾아보고 보고하도록 분부하노라"하였다. 이에 경기 감영에 자손 黃道源의 인적사항을 적어 보내 주었다. 1월 25일 예문관 당상 이병모에게 세가지 액호 즉 玉洞·德峯·道溪를 써 올린 결과 지명에 부합하는 옥동이 낙점되었으며, 액호 撰者에는 副司直 尹行元으로 선정되었다. 2월 2일 사액에 동반하는 경제적 혜택 즉 법전에 근거하여 復戶와 位土田을 받기위해 예조에 글을 올려 호조와 경상감영에 하달되어 본건 관련 關文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액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홍인호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사액례 날짜는 최종 4월 1일로 결정되어 임금의 승낙을 얻었다. 치제관은 승지 兪恒柱로 정해졌으나 건강 악화로 朴天衡으로 교체되었다. 부청일기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서원에 대한 연구 성과는 상당히 축적되었음에도 사액 관련 연구는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그 연구가 부족하다. 현전하는 사액 관련 자료들도 그 내용이 소략하여 단편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옥동서원에서 행해진 사액 과정과 진행 상황을 기록한 본 일기는 이를 규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옥동서원의 구체적인 사액 관련 여러 절차를 확인하는 작업은 한국 서원 문화의 발굴과 소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道, 東에서 꽃피다』, 달성군청,달성문화재단,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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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소청일기(疏廳日記)
附疏廳日記
請額始事月日。
議定凡節。見上本院日錄。趙斯文奎鎭旣許行。會中多士莫不欣。然庶幾大事之有成。留院三日始發行。
五月二十七日。
趙斯文奎鎭發行。黃院長聖休以本孫隨去。黃弼熙以本所齋任從行。黃宅坤管行陪去。拘於院力凋弊。未設疏廳儀節。行色蕭然。盖欲入城後。始設疏廳故也。到新安。柳亭安平老少諸人。預待路左。暫議入城後凡節。
六月初二日。
行到沙平。趙斯文患阿睹。且有泄症。此是炎熱所致。發行六日始入城。先訪鄭都事下處。因到黃泰熙舍館。孫斯文潤慶在座。千里逢故人。欣悅可量。日暮黃監察來訪。夕後趙斯文泄候漸加。度數煩頻。急用薑湯。夜深終不止。方營大事。而病勢如此可悶。
三日。
仁同張宣傳趾遠來訪。趙斯文泄候。自午後度數少減可幸。黃聖休黃弼熙等回謝。黃監察瑗議請額凡節。黃監察曰。方今國家坊啓廷臣疏啓一切停止。今此請額。恐非其時也。若預知此奇。則自此當專人通告。而事已至此。不可空還云云。盖黃監察之意。素非歇後於此事。而量時度勢十分詳審。而言之也。然千里裹足而來者。亶爲請額一款。則事之成否。固當任之於天。而在我之道。設施而後已可也。於是黃聖休。以額疏捧入之道。諸般應酬之節。專委於黃監察。黃監察曰力所及處。敢不奉以周旋耶。昨以宗侍曁疏儒。入城之意。已通于貞台云云。貞台卽黃參判昇源也。是夜趙斯文泄候。又復發可憫。
四日。
趙斯文泄症。終未快可。可憫。鄭都事基煥。朝前來訪。食後黃宅坤持會中書。往于翼成公宗孫西江黃道源家。黃道源報以翌日入城之意。黃宅坤瞻拜翼成公家廟而歸。
五日。
黃道源來訪。寒暄外。卽以主張請額之意屬托。則答曰。義不敢辭。而當採京居宗意。以爲更報云。同來四人奴馬。當留數日。以觀事機動靜。而經費極艱。故遂裁鄕書。食後還送。
六日。
黃弼熙患癨症。針藥卽效。黃道源又來訪而去。疏行當與黃泰熙同舍館而以居處湫隘。移定下處于板井洞閭舍。午後孫潤慶安東李重祖來訪。
七日。
趙斯文前患眼疾卒劇。施藥無效。黃聖休泄症又卒發。用薑茶六一散等物。入城後。行中老少?次生病。不遑於疏事。可憫。始發疏行時。黃氏門中折簡于黃進士冕源。而入京聞之。則方在朔寧衙中云。故黃聖休裁書。奉請囑貞台。使京主人傳簡。
八日。
黃聖休趙奎鎭泄候。平復可幸。朝見貞台。畧陳設疏凡節。答曰。力所及者。敢不主張因謝。趙斯文冐暑遠來之意甚款。黃聖休袖傳黃氏門中書而歸。午後黃泰熙黃弼熙往。見在泮。嶺儒略議疏事而歸。張宣傳來訪。送黃宅坤于淸橋。訪黃長鬐翼振。不遇而歸。
九日。
朝前趙奎鎭黃聖休。往見兪承旨恒柱。借得下人。因往蔡相濟恭家以閽阻。先見其胤子弘遠。。夤緣納啣。而進拜乘間。言請額事顚末。蔡相答曰。士林之事。吾何知之云云。奎鎭起而請曰。今日儒生之上來者。專恃於大監。大監若不指揮。則嶺士於何稟質。蔡相賜顔。無甚落落。奎鎭又起而請曰。京中諸議多言。非特今日設疏與否。一聽大監指揮而決之。蔡相答曰。須爲之也。辭歸之際。奎鎭又請曰。種種稟達計。非不切而寒士蹤跡。齟齬於相門。伏望分付閽人。特爲勿禁。蔡相笑而許之。其眷注嶺人之意。亦可見矣。食後。黃聖休趙奎鎭黃泰熙黃弼熙。齊進泮村。是日留泮。嶺中朝士與靑衿。齊會於碧松亭。遂以請額事面議。咸曰。翼成公書院請額。必無不成之理。但館學俱空館中。通文不知出於何間云云。盖設疏之擧。無館通。則不成故也。黃道源同宿而歸。
十日。
黃弼熙於黃海道鳳山郡。時李鼎揆。爲鳳山倅。呂友俊復在其衙中。與呂友俊復。面議貸官錢計。是時齎來之物已盡。疏資無以經紀故也。黃道源來訪。爲雨所阻。又經宿。
十一日。
黃聖休趙奎鎭訪黃監察。議疏事。黃長鬐亦來參座。楊根黃星源來訪而去。
十二日。
黃聖休趙奎鎭黃泰熙馳往京營。見洪校理義浩于觀豊閣。時義浩大人。爲圻伯。議額疏捧入之道。則答曰。此疏異於他疏。非捧入之難。而但此非封章之時姑爲遲延。無妨政院。所見必與我同云云。盖此行專欲見洪承旨仁浩。而在政院未出故。不遇而歸。歸路訪貞台。復申先容之道。則答以更議朝班云。轉訪吳參判大益。時吳令適往美洞。只見其允子而還。夕後。黃聖休黃泰熙會洞。宋別檢翼魯家略論疏事。滯雨經宿而還。
十三日。
終日雨。
十四日。
黃長鬐來訪。黃宅坤中部洞。謀出債。未果。
十五日。
監察行茶禮。以餕餘齎送。俄而又自來。厚意可感。午後。趙奎鎭黃聖休。訪大廟洞參判獻慶李台。以血痢之症。不能迎接外客云。而强入進拜。則果病臥矣。叙寒暄外。畧陳疏事。李台吟呻酬酢曰。翼成書院。尙無賜額處者。實爲慨然。若登徹。似無不成之理云。乘暮還歸。李重祖來訪。
十六日。
都事來訪。黃弼熙西行後。雨勢連日。潦炎且酷殊。可念也。
十七日。
黃聖休趙奎鎭。復往右相家。拜起居外。因陳疏事。初以不知政院之意爲言。右相答曰。政院之事。吾何以知之。趙奎鎭等起而請曰。窃伏聞京中諸議。則皆以設疏遲延。爲慨然。右相答曰。此言誠然矣。須從速設疏可也。奎鎭等又以政院捧入之未可必。爲言。右相賜顔而答曰。近聞一承旨之言。則他疏雖難捧入。而此疏誰可防塞也云。此亦公議。須勿慮也。奎鎭等末乃曰。此疏若登徹。必聚議於大臣。右相曰。必無聚議之事。而當下該曺云。黃聖休趙奎鎭。迭相禀白。無異相。同鄕知舊。酬酢如響。其眷眷之意。終始如一。間多有閒酬酢。大臣之言。旣如此。故遂決意設疏。是日轉往畿營。洪承旨昨出卽入。故又不遇。只見其弟校理校理多以疏擧之非。其時有所防塞。乘暮還。黃道源黃翼振來訪。
十八日黃聖休黃泰熙往見貞台。備陳疏事挭槩。答以設疏之非其時。又請製疏。答曰。此時封章。事涉如何。吾則不可製疏云。黃長鬐貞洞來。略傳貞台意向。
十九日。
黃聖休趙奎鎭黃泰熙宋翼魯家。議疏事。經宿而歸。
二十日。
受黃監察書。奉邀楊州黃夏鎭。盖此人爲先生本孫。而慣於此等事故。與相議故也。黃監察來訪。因議製疏。答曰。吾欲搆草。而素昧於此等文字。前此某院額疏一本得見。則似好云。星州淸川書院請額。儒生宋應璧等來訪。黃弼熙鳳山還。累日炎程。無事回程。且得債錢百兩。可幸。鳳山守裁書於疏廳。五緡銅二斤草伴至。同道之誼。可感。
二十一日。
黃聖休趙奎鎭黃泰熙黃弼熙。以製疏事。齊進泮村典籍紘舍館。申卽嚮勤奉請。金典籍辭。不獲已遂許之。以四先生實記。奉置於金典籍几上而還。因轉往慶州別檢鼎秉舍館。以受出館通事。招致都首僕洪五番。分付。則五番對曰。太學方空曠。掌議主出席然後。可以修答。而館任備員。似在晦初間云。乘暮還歸。
二十二日。
黃長鬐張宣傳來訪。日暮後黃夏鎭來到。論疏事。因留宿。
二十三日。
炎熱太甚。不得出入。
二十四日。
以製疏事。裁書于金典籍。答書託以病。未搆草。又多撝謙之辭。但所托實記。不爲還送。其終不牢辭可知。夕後黃聖休趙奎鎭黃泰熙檜洞。議疏事。留宿而歸。
二十五日。
雇馬。送黃宅坤。還鄕。
二十六日。
楊州黃生來傳。太學今夕又捲堂云。掌議備員漸遲。可憫。
二十七日。
終日大雨。黃宅坤下去後。雨勢如此。可念。
二十八日。
以製疏事。又裁書於金典籍。其答書曰。身病少差。姑俟數日。搆送云。
二十九日。
大雨。不得出入。
七月初一日。
黃聖休趙奎鎭黃夏鎭黃弼熙。訪金典籍。則疏草已成。但疏中只擧元位。不及配位。盖以京議。援據近例。而嶺人爭之。不得故也。雖曲從京議。而心甚未安。卽袖來就質京中諸處計。又書太學通文。留置于星州直講鵬海舍館。以爲待館任薦出後。受答通之地。又與首僕洪五番有所酬酢事。因與金典籍往于李別提龜錫舍館。自疏行略設酒肴。會員南監察必錫李斯文重祖孫斯文潤慶孫正字會慶李進士宗洛尹斯文相烈。凡數十餘人。歸時。轉訪南監察基萬申直講宅和金進士重燁舍館而來。
初二日。
大雨。不得出入。
三日。
黃道源來訪。
四日。
會中僉議。以爲金典籍旣搆疏草。重其事之義。不可無存問云。故畧備紙束裁書。送之金典籍。書謝不受。
五日。
京居李明謙來訪。
六日。
過東宮禫事大駕寅時幸新門內大闕。忙出鍾街。則御駕已過矣。不得昵瞻天顔。可歎。
七日。
李宗洛孫潤慶尹相烈來訪。
八日。
監察將搆疏草。黃聖休趙奎鎭曰。疏中只擧元位。終覺未安。黃監察曰。京中近例。皆然。僉賢豈可作規外之事乎。且元位蒙額。則擧重抱輕。少無如何之端云。鄕儒不閑於此等事體。故不得已從之。因謄出一秩。竝與金典籍所製疏草。將欲就質於京中諸處。
九日。
太學尙未頓整。其間經費不少。而無一事就緖。可憫。
十日。
黃聖休黃泰熙黃夏鎭黃弼熙。爲謁翼成公。家廟往三浦。趙奎鎭爲謝黃道源。隨行暮還。趙奎鎭眼疾。比上來時少減。而文字披覽甚艱。可憫。
十一日。
黃泰熙袖疏草二本。就質於京中數處。則金典籍所搆草。勝似黃監察所製。故黃聖休趙奎鎭黃泰熙黃弼熙。袖兩草。囑金典籍以爲鍊削之地。
十二日。
京居李儒珍來訪。孫正字會慶送傳壽峰瀰川書。而獨不見葛田書。只及趙雲慶毒慽之報。盖緣便因忙迫。而殊覺驚慘泄薨。嶺儒以戊申倡義。叫閽事。備疏任設疏行。盛張威儀而來。疏首李鎭東吾鄕趙錫簡趙龜然孫必慶。亦帶疏任。千里逢故人。且聞鄕信。欣悅不可言。
十三日。
黃聖休趙奎鎭黃泰熙黃弼熙。齊進泮村。參倡義疏廳。定凡例。留宿於南監察必錫舍館。李重祖亦來會。月夜團話。稍慰客懷也。
十四日。
黃泰熙黃弼熙。訪趙錫簡舍館。諸議以爲定廣舍。會多士書尙州倡義錄冊子云云。如其言。卽定泮中廣舍。尙人齊會。始書役。黃弼熙獨還板井下處。黃聖休趙奎鎭黃泰熙。留宿泮村
十五日。
黃聖休趙奎鎭黃泰熙。以尙州書役未畢。又留泮村
十六日。
泮中書役。雖未畢。而院事亦多拘榦。故午後黃聖休趙奎鎭還板井舍館。黃夏鎭以家有所看。强請暫歸卽來。故治送。黃泰熙黃弼熙留宿泮村
十七日。
尙州倡義錄書役始畢。黃聖休黃泰熙黃弼熙還舍館。
十八日。
鄕信久阻。留資垂絶。可憫。黃夏鎭過期不來。可怪。
十九日。
趙奎鎭黃泰熙。爲見倡義疏事。往泮村。夕還。
二十日。
京居李儒珍來訪。黃夏鎭還。趙允浩留宿。
二十一日。
太學又生事。定配一進士。收刷漸遲。爲疏事。可憫。
二十二日。
太學收刷。薦出東一房掌議。黃夏鎭躬往洪五蕃家。議太學答通事而來。是日答通果來。
二十三日。
趙奎鎭患泄症。卽有減漸。而餘症尙爾。可憫。趙錫簡孫必慶趙允浩李翼遠來訪。畧議疏事而歸。黃弼熙往見平市直長柳範休。轉貿疏紙而來。
二十四日。
趙奎鎭訪其宗人趙承旨廷鎭。黃聖休趙奎鎭袖疏草二本。將就質於蔡相。以氣不平。門卒不納名卸。冒暑虛來。可歎。是日始裁疏紙。而舍館甚狹。故借黃道源妹壻李大將家外堂。裁疏紙。先書名帖二丈。暮還舍館。黃泰熙又袖疏草二本。往質于洪校理義浩。
二十五日。
黃夏鎭黃道源黃弼熙。率寫疏書吏。復往李大將家。日暮時寫畢。而寫手輕且不精。多未盡處。可歎。疏。則京議皆取黃監察所製。故果用黃疏。黃聖休趙奎鎭黃泰熙。以請額疏任薦出事。齊往泮村倡義疏廳。於是嶺儒開坐於泮中。姜典籍世鷹呼出曺司二員[善山尹相烈尙州李翼遠]。又出公事員二員[尙州孫潤慶醴泉朴漢德]。公事員朴漢德呼疏首。首薦尙州幼學趙奎鎭。公事員孫潤慶呼。副薦順興進士成彦根。班首眞寶權兌昌呼。末薦安東進士李宗洛。首薦六分。副薦三分。末薦二分。呼薦圈點之際。趙奎鎭李宗洛。皆避坐於隣舍。圈點畢。曺司來。傳趙丈準點。因請出座。趙奎鎭三辭不獲。遂出席座中。請薦出疏任。趙奎鎭曰。今日嶺士固多會。而各有所營而來。則非奎鎭之所可詳知而薦出也。惟在僉君子商量薦出。僉曰。諾。於是自會中薦出。掌議二員[安東幼學柳鳳祚善山幼學鄭台東]。疏色二員[玄風進士金重燁星州進士崔柱浩]。薦出後崔進士呈故。卽遞代出[永川幼學鄭夏纘]。又出製疏一員[進士李宗洛]。寫疏一員[幼學尹相烈]。讀疏一員[幼學李翼遠]。都廳一員[尙州幼學趙允浩]。會員黃聖休權兌昌趙奎鎭趙龜然金重燁權檾趙允浩黃泰熙李翼遠趙錫簡孫潤慶崔柱浩李宗洛朴漢德尹相烈柳鳳祚鄭台東。諸任員皆出席。行相揖禮。遂罷座。期以疏廳設施之日。而各歸舍館。楊州黃象源來。
二十六日。
黃瑗黃道源來。奉審疏寫卽還。疏首與黃聖休袖疏草。往美洞蔡相。以氣不平。門卒不納名卸。又空還。京居李儒珍來訪。掌議鄭台東自泮村來。以私故卽還。黃瑗黃道源來。終日議凡節。
二十七日。
疏色金重燁鄭夏纘來會。延安黃氏答書來到。而無所送。却恨齎糧發伻也。黃夏鎭黃弼熙率平市下人。往闕門外。定疏廳于漢城府直房。竟以大路當門多紛踏。移所于工曺直房。折簡于泮村。疏任。答以夕後出來云。而日暮不來。可怪。黃弼熙留仁峴舍館。盖爲在此而出納疏資計也。旣設疏廳。財力已乏。而鄕便不來。憂憫不可言。京鄕黃氏諸人一席會議。黃道源得出月利錢七十兩。爲疏事如得千金。夕後疏首與一行持疏具。移去工曺直房。以爲明日伏閤之地。
二十八日。
疏首及兩疏色。折簡于泮村疏任諸處。其書略曰。疏事。今將伏閤。而僉尊齊臨着御然後。可以封章。望須趁早朝來。會于工曺直房云云。少間趙錫簡趙龜然權檾孫潤慶聯名。修答便疏色鄭夏纘袖傳。其書略曰。卽聞疏事。以今朝伏閤云。信否。。大抵一道兩疏不可。無相議之道。而有此輕先之擧。非但有駭聽聞。道理決不當。如是日昨薦出疏任。旣藉道論。及其伏閤。不謀道儒。有若爭先者。然儒林之事。豈如是耶。自聞此奇。道論朋興。播任之員。一無行任之意。如是而可以伏閤耶。請額旣是吾鄕之事。則弟等爲院之誠。豈下於僉尊。而道論如是。則不可無通奇之道。故如是詮告。幸須俯諒。無至相激之地。如何。非但疏任道儒名帖。亦有還推之意。更須十分善處云云。見書駭異之際。疏任柳鳳祚尹相烈李翼遠李宗洛。自泮中來。柳尹曰。吾輩各爲先事入京勤苦者。惟望彼疏之速成。而此疏先爲伏閤吾輩。則彼疏未封章之前。不可爲此疏先伏閤。李翼遠請割去名帖。柳鳳祚同然一辭。疏首與黃聖休黃夏鎭答曰。名帖割去。任意爲之。疏首又顧謂李翼遠曰。年少輩何妄言至此。疏事各異入京。有先後。則今此道論。實未可知也。柳鳳祚尹相烈李宗洛李翼遠諸人曰。文字之過言語之失。皈之於妄發。莫如思得好道理。盖好道理云者。欲與彼疏一時竝擧也。究厥始終。在我無所失。且泮中書。又出於吾鄕人之手。可怪。亦可慨也。如是詰辨之際。日已至於申退。伏閤之計不得如意。以此栽書于黃監察。其答書略曰。疏事自前未遑之事。今始辦得。故疏中亦言其未遑。而適與彼疏相値。同時伏閤。則跡涉借便。事欠全一。而進退措縱。關由於人。亦甚苟且苟且。一時幷呈。則決無俱捧之理。可謂兩相妨害。其亦未及深思而然矣。疏行旣有先後。受通又有先後。則此先彼後。小無所妨。更以此意。詳細相議。終若持難。決意中止如何。鄙見不欲苟且爲之。而道內名帖。幷還之說。恐欠穩當云云。鄭都事基煥崔進士柱浩來訪卽去。呂俊復自鳳山來訪。孫潤慶權檾。自泮村來。謝曰。俄者答書。雖書吾輩姓名。書札往來。元無參見云云。盖答書書送之時。吾鄕之人。或有把筆書之。而不着姓名者。或有書送姓名。而元無參見者。未知錄何致。此可怪可慨。
二十九日。
又折簡于泮中。答書不來可怪。京中黃氏諸人及京儒。以兩疏幷擧堅執。不可。黃監察又裁書于疏廳。略曰。疏事進退。未知僉意何以處之。而鄙見疏擧發論。疏行治來。及關通受答。自有先後。則事當次第爲之。而衆議不一至。有疏帖還送之說。則決不當。苟且等待。且會同時伏閤。亦有借便之嫌。此疏。則必須停止。容竢後日如何。措縱屯久。不能自由者。在此可羞。推帖之擧。亦非厚風。以此以彼。不可隨人指揮。幸卽掇歸。無至曠日。咨趄云云。觀此辭意。極言罷歸。京中議論。不可不從。故黃聖休黃夏鎭。還板井舍館。探京中物議。則是非崢嶸。多有更設京外疏之意。疏首與疏色鄭奭東都廳趙允浩姑留疏廳。盖爲更通于泮中。必欲調定計也。日暮疏首。又以相議伏閤之意。折簡于泮中疏廳。則答以疏任齊會後。裁送答書云。其意必欲延他時日。使不得先爲伏閤計也。
八月初一日。
李翼遠柳鳳祚。自泮中疏廳來到。而兩度所送之書。終無所答。可怪。疏首趙奎鎭掌議鄭奭東。訪李都事龜錫於禁府直房。慶州別檢鼎秉。掌議柳鳳祚。次第來到。因說額疏罷歸事。則李都事大言曰。泮中疏廳。有何正見。出此大損體貌之書乎。今於翼成公請額事。冠儒服儒者。有此携貳之論。而豈可謂士林乎。因語柳鳳祚曰。歸傳吾言於泮中疏首。此疏若罷伏閤。則其疏亦不可。伏閤勿爲多費校院財力。斯速罷去。又謂趙疏首曰。彼此如有好道理。則可矣。疏首曰。學宮事。雖繫士林。而本孫之意。亦不可不顧。黃氏昨已罷歸。則吾輩不可獨坐疏廳。其勢不得不從此逝矣。因還疏廳。則黃夏鎭率來使喚。撤送疏具。將待疏任同歸。朝飯後。以疏廳罷歸之意。送人于泮中疏廳。而還來板井下處。玄風金進士重燁。自太學而來。李翼遠又自泮中疏廳而來。卽還。
二日。
鄕信尙不來。疏事多支節。不可無相通之道。故治送奴子。而兩意爲關。如此還心處也。呂俊復來到。藝洞黃泰熙。舍館請黃聖休趙奎鎭黃弼熙。欲爲一場穩話之計。齊往暮還。因得呂生自鳳衙下去錢百金。
三日。
黃泰熙自泮中來。言倡義疏首李鎭東。出示答此疏廳書。而無使喚。姑未傳之云。是亦可怪也。
四日。
黃夏鎭欲還家。疏廳應酬之節。專委於此人。故一行强挽之。
五日。
趙錫簡權檾孫潤慶趙龜然孫必慶趙允浩李翼遠來訪。趙錫簡曰。頃日泮村答書裁送之時。吾合參坐。而書中辭意。專然不知。孫必慶曰。其答書吾果書之。而不知事機之至於此。不幸莫大焉。諸人勸更設伏閤之意。長水滄溪儒生陸洪鎭南原黃學洙。爲滄溪書院請額而來。黃道源曰。滄溪玉洞俱是一體。而玉洞之事設施。已至三朔。必有相議之道云。僉議皆然。陸洪鎭黃學洙曰。亦當相議云云而去。倡義疏廳尙未得太學答通。封章無期。故乃以先爲伏閤之意爲言。於是調定京議。更治疏事。夕後疏首與都廳諸人奉疏。入于工曺直房。黃聖休黃夏鎭陪疏而行。黃弼熙留板井守舍館。黃瑗黃道源來參議設疏凡節而歸。
六日。
朝前。疏首趙奎鎭疏色鄭夏纘掌議柳鳳祚鄭奭東讀疏李翼遠。奉疏伏閤。黃泰熙黃道源黃弼熙來參。卽還。疏色金進士重瞱參太學朝食堂出來伏閤。申時後。奉疏退來。鄭夏纘柳鳳祚尹相烈李翼遠。爲見倡義疏事。入泮村。金進士重曄爲參釋菜。亦入去太學。夕前。鄭都事基煥章陵令呂奎明南原黃學洙來。
七日。
以釋菜之在明。停伏閤。館法釋菜正齋罷齋兩日。則儒疏不得伏閤故也。黃監察瑗往貞洞。覓來疏草。而有數處潤色。以爲改寫疏本之計。黃道源都事基煥。食後來訪午後還。掌議鄭奭東。有所看私事。入去泮村。約以明日早還。
八日。
以釋菜罷齊。停伏閤。朝前。李都事龜錫洪正字宅夏黃學洙。來訪卽還。食後。長水儒生陸洪鎭李斯文陸斯文梁斯文陸斯文黃學洙來。寒暄後。陸生洪鎭曰。吾輩不遠千里。裹足冒暑而來者。專爲滄溪書院請額事矣。尙州儒生先來伏閤。吾輩之行到此狼狽。且長水旣是先生姓貫之地。又是棲息之所。且建院亦在肅廟癸酉。則其視玉洞不無輕重先後。長水儒生旣已來此。則兩地儒生一席相會。爛熳相議而後。始事可也。而吾輩昨到。僉尊今日伏閤。有若爭先者。然未知是何事也。黃泰熙曰。僉執事之言誠然矣。而此疏已於去月念七日設施伏閤計。而不幸少有枝節。故姑爲停止矣。僉君子入京之日。此疏伏閤之議。適爲敦整於是日。故今日伏閤事機如斯而已。非有爭先之意。長水儒生又曰。曾聞玉洞入享四先生。而今見疏本。則只擧元位。何也。黃道源曰。請額近例。但擧主享不擧配位。故疏草如是。若近有正配幷請之例。則豈不樂爲之哉。然旣擧元位。則配位包在其中。疏之幷擧與否。不須論云云。黃夏鎭及京儒來會者。一如黃道源之言。而黃聖休黃泰熙曰。鄙等之見。實如陸斯文所言。而近例如此云。故不得已從之云云。長水儒生曰。鄙等不知近來請額之例。及本院之有正配位。故敢陳臆見矣。今得其詳。還覺淺見之妄率。黃學洙曰。長水旣爲請額而來。玉洞前此入京而伏閤。勢不可幷擧。進退之決。不可任之玉洞滄溪儒生而爭之。吾宗孫旣在此座。惟從宗孫之言而決之。何如。僉曰。此言是矣。黃道源曰。玉洞滄溪。俱是先祖妥靈之所也。兩院一時始事。幷蒙凖額。則子孫之心。慶幸莫大。而揆之事理。必無一時幷蒙之理。若以幷擧。入於勿施。則玉洞儒生之累月留滯。多費院力。姑舍兩院。永無更請宣額之地。滄溪儒生已爲後來。玉洞疏章。今至伏閤。滄溪。則待玉洞疏結稍。而明春叫閽。未爲晩也。亦可謂兩全。未知以爲如何也。滄溪儒生曰。吾輩此擧俱是爲先生之事。兩處儒生相與和同成事。是啚者是固事理之當然。先生宗孫之言如是。實正當公言也。玉洞之疏。須先爲之。而滄溪之疏。姑退可也。黃夏鎭曰。宗孫之言。誠是也。吾於滄溪烈成公入享。則亦不無私情。而疏行旣有先後。則宗孫之言。先獲我心也。滄溪儒生曰。此言。亦一公論也。吾輩更無異意。惟願貴院之蒙額也。疏首及黃聖休在傍曰。執事之於玉洞。湖嶺雖殊。而向慕。則無間。同治疏事如何。陸生等曰。敢不唯命。是日招禮曺書吏。改寫疏本。而其筆法甚精。可幸。午前始寫。午後寫畢。長水儒生及黃道源黃泰熙黃弼熙黃翼振黃學洙。罷歸私邸。
九日。
朝前。疏首掌議疏色。讀疏寫疏。都廳諸任及黃夏鎭。奉疏伏閤。入送疏槩。六承旨俱在政院。卽出送曰。院中多事。不得捧入。午鼓後。又送疏槩。則無一言退送。申退後。奉疏還邸。鄭奭東以胸腹痛。先退委臥。可憫。
十日。
朝前。疏首掌議疏色。讀疏寫疏。都廳諸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三承旨入直。以僚任不在。卽出送。午鼓後。又入送疏槩。則無一言出送。申退後。奉疏還邸。鄭奭東病。未參伏閤。黃宅坤運疏資入來。黃弼熙板井洞
十一日。
朝前。疏首掌議疏色。讀疏寫疏。都廳諸任。奉疏伏閤。掌議鄭奭東病未參。入送疏槩。則守門書員持疏槩出來曰。喉院答以同副洪令病狀不入直。故不得捧入云。是日三入疏槩。則所答終始如一。申退後。奉疏還邸。掌議疏色諸人爲見倡義疏廳。入泮村。成殷柱來訪留宿。
十二日。
以國忌齊日。停伏閤。趙錫簡來訪。成殷柱關雨留宿。
十三日。
又以國忌。停伏閤。南監察基萬申直講宅祀肉札來。京儒二人來訪。
十四日。
朝前。疏首掌議疏色。讀疏寫疏。都廳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退送。申退後。奉疏還邸。鄭奭東病未參伏閤。京儒三人來訪。
十五日。
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鄭奭東病未參。入送疏槩。則卽出送。午鼓後。又送。則答以明日大駕擧動新門內大闕。政院多事。不得捧入云。申退後。奉疏還邸。姜監察世鷹鄭都事基煥長水陸洪鎭南原黃學洙善山黃大一。來訪卽還。趙錫簡權兌昌。自泮村來訪。
十六日。
因擧動。停伏閤。黃學洙別檢聲秋孫潤慶。來訪留宿。
十七日。
大駕還宮。以國忌。停伏閤。京儒二人來訪留宿。
十八日。
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六承旨入直。而國忌罷齊日。元無捧入疏之規。申退後。奉疏還邸。李禧遠宋思智宋啓周宋堯心宋好心。來訪。入洛三朔得逢鄕人老少。半日穩叙。欣幸難量。
十九日。
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二次入送疏槩。則以同副洪令之不入直。退送。申退後。奉疏還邸。
二十日。
以大比科試日。疏儒齊入試門。方入門之際。羅卒持杖。衝突科儒。躙死者四人。不知誰某。而可慘可惧。一行同接。僅得納券而出。出門後聞之。則一所科儒亦躙。死者二人。上震悼。兩所試官及禁亂官。罷場後拿就之意傳敎。
二十一日。
疏首與一行。留泮村。黃潤[土+正]黃宅坤黃錫老。同宿。廬重文宋好心宋思智來訪。
二十二日。
觀終場。雨下如注。一行堇免曳白而出。
二十三日。
疏首與疏任諸人及黃聖休黃夏鎭黃弼熙。齊進工曺直房。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送于都承旨。都承旨時在藥房。見疏槩。只曰。納于政院。納。則政院無一言出送。申退後。奉疏還邸。是日貞洞參判昇源。爲左承旨。諸議以爲黃台以子孫。當喉院。其在體面。不可捧入是?。
二十四日。
以。國忌。停伏閤。讀疏李翼遠。呈故還鄕。掌議鄭奭東寫疏尹相烈。往泮村。李都事龜錫姜監察世鷹京儒五六人。來訪。
二十五日。
以國忌。又停伏閤。得見一二所榜目。則嶺儒俱未免落。莫可歎。黃道源黃學洙京仗二人來訪。
二十六日。
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送疏槩。則政院以僚任之多。不入直。卽爲出送。午鼓後。又送。則以該令之不入直。出送。申退後。奉疏還邸。李都事龜錫肉札來。京仗三人來訪。
二十七日。
以到記科。停伏閤。姜監察肉札來。倡義疏廳。始得館答通。午後出來闕門外。一道兩疏。同時伏閤。恐或相妨。而勢也奈何。掌議鄭奭東。以其伯氏宅東正言通淸。有爲親加資周章之事。身帶疏任。累日未參伏閤。爲未安。請遞任名甚懇。疏首敦勉不遞。倡義疏首及諸疏任。齊進于司僕寺直房云。黃學洙長水儒四人善山黃大一慶州孫進士鼎九。來訪。南監察基萬肉札來。黃承旨昇源遞任。而李敏輔以南行同副令云。
二十八日。
黃潤[土+正]黃宅坤黃錫老。還鄕。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倡義疏。亦同時伏閤。入送疏槩。則三承旨入直。而無一言退送。倡義疏槩。亦然。午鼓後。又入送。則托以政院多事退出。申退後。奉疏還邸。趙龜然權檾孫潤慶。來訪。黃聖休微有胸腹痛之漸。可憫。京儒三人來訪。
二十九日。
黃聖休病勢小減。日未明。黃聖休扶病與疏首及疏任諸人。齊進待漏門外。欲入門。則下人牢拒不入。黃聖休等。高聲呼籲曰。生等。以翼成公書院請額事。率嶺中多士。五月入京。以太學之有事。未得答通。滯留累朔。始得答通。伏閤已至一望。蒙允與否。在於上裁之。如何而奉入之道。惟在僉令公。故生等呼籲。至此一承旨答曰。此所非儒生所入之處。捧入。則同副所掌。而該令已爲入直。不在此座。勿爲久立冷地。速爲退去。則當與該令。相議爲之云。因退還疏廳。黃聖休久處冷地。宿患更爲大發。急用羌茶及蜜水後。小定。黃弼熙陪去板井洞下處。以爲調攝之地。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以該令之困睡。卽爲出送曰。該令起寢後。來納云。午鼓後。入送。則該令曰。來月初二日。大駕幸慕華關。初六日。幸靖陵。方定日設施。國家如是紛紜。其在事體。不可奉入。陵行前。更勿伏閤。以待六日後云。政院之言旣如此。故奉疏還邸。權兌昌孫潤慶權檾趙錫簡慶州孫進士鼎九京儒四人。來訪。
九月初一日。
黃聖休病勢少可。昨日政院雖曰。姑勿伏閤。而不可專廢。故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不入疏槩。申退前。奉疏還邸。金別檢聲秋權檾榮川金相寬安東權進士就度。來訪。李都事龜錫肉札來。疏色鄭夏纘。呈故還鄕。
二日。
大駕由新門內。幸慕華關。申時。還新門內。大闕經宿。是日停伏閤。黃聖休患候快復。可幸。疏首泄症卒發。可憫。倡義疏爲駕前伏地計。疏首李鎭東及諸疏任。齊進新門外路傍。未果。更爲六日。陵幸時伏地計。
三日。
疏首泄候小減。李鎭東來訪。是日又停伏閤。申時後。大駕還宮。京儒五人。來訪。
四日。
停伏閤。
五日。
倡義疏以伏地事。齊進沙平云。而通于黃泰熙黃泰熙發向沙平黃弼熙趙允浩隨行。板井舍館典守無人。故黃聖休與疏首及疏色金重燁。齊往留宿。而疏具。則堅封藏于直房。
六日。
罷漏後。大駕擧動。住輦於西氷庫津頭。夜間江水大漲。水滿兩岸。舡窓盡落。大駕不得渡。監役官京畿監司廣州府尹果川縣監工曹判書。一幷罷職。卽始船窓之役。午後船窓成。大駕越江。靖陵距津頭十五里。而日已向申。乃下令經宿。黃泰熙宿沙平。待疏行伏地。而終日不來。日暮渡漢江。宿江村。黃弼熙其翌日朝前。先還。京儒二人。來訪。
七日。
大駕自靖陵幸孝彰墓。食後。黃聖休趙奎鎭作伴。上孝彰左麓。則兵馬已至麓下。旗兵蔽野。大駕越江後。下上言令。黃泰熙將上言。而各道上言浩多。黃泰熙欲待他陵幸上言矣。大臣有勸之。故果上言。倡義疏。則初伏地於西氷庫路傍。再伏地於孝彰墓道傍。而終不捧入云。申時後。大駕還宮。日暮還邸。
八日。
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倡義疏亦伏閤。丹溪書院請額疏。卒然伏閤。黃夏鎭黃學洙。以疏體之不可幷設。據理呵噤。則其疏首李維黙曰。疏體若果如此。則當停止。而纔設卽撤。有怪瞻視。姑待明日而永罷云。入送疏槩。則政院以陵幸後。多事還送。申退後。奉疏還邸。權檾來訪。春川姜進士履燮京儒三人。來訪。
九日。
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順興疏又伏閤。黃學洙黃夏鎭。又以疏體之不然。據理峻責。則李維黙遜辭而請曰。明日當停止云。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申退後。奉疏還邸。善山黃大一京儒二人權檾。來訪。李都事龜錫肉札來。黃泰熙日前上言。姑未知下於何曺。彷徨道路。暫不安席。其誠意可透金石。令人感泣。
十日。
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順興疏又伏閤。黃夏鎭黃學洙挽之不得。任置不禁。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申退後。奉疏還邸。安東權褒來訪。李宗洛權檾京儒四人。又來訪。平市直長柳範休肉札來。疏首與黃夏鎭。往見同副承旨李敏輔。略陳疏事奉入之意。李曰。天恩罔極。雖當政院之任。吾以南行老承旨。擅參院事。敢捧儒疏乎。累請不許。日暮還邸。黃泰熙上言轉聞。下吏曺云。而姑未知眞假。
十一日。
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以國家多事。初不入疏槩。申退後。奉疏還邸。柳直長範休權檾李東旭京儒五人。來訪。
十二日。
以殿講停伏閤。始見慶尙右道榜目。則黃巖老黃磻老聯璧。而其兄居魁。可幸左副令遞職。而姑未知其代出也。疏色金重燁呈故還鄕。京儒二人來訪。
十三日。
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又以國家多事。卽爲還邸。都廳趙允浩黃泰熙。幷往貞洞黃參判家。則貞台頗有款意。而以差祭官受香事。方臨行。故略陳疏事而歸。京儒四人來訪。
十四日。
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倡義疏順興疏。一時幷伏。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申退後。奉疏還邸。權檾黃大一京儒三人。來訪。黃聖休與疏首。往貞洞黃參判家。則欣然迎接。進桂糖酒。因陳疏事。許以周章。要與更會相議。
十五日。
鷄鳴後。黃聖休與疏首疏任。進待漏門外。時承旨已會。欲入門。則下人牢拒。因呼籲曰。生等留京之事。向已仰陳。而生等留滯。已至四朔。目今薄寒中。人衣食俱艱。捧入無期。僉令公何不曲諒生等艱辛之狀。而捧入耶。且儒生之上來者。俱是七十六十老人。而艱苦至此。此則生等之私憫。實非仰告於令公之事。而生等之於令公。盡言不諱。故如是煩瀆。答曰。退去依幕。則當相議爲之云。卽還邸。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答曰。該令假寐。起寢後。來納。起寢後。入送。則該令曰。勿慮不捧。退在依幕。其言似有可望。而不勝訝惑。問京儒。則皆云雖在依幕喉院欲捧入。則自依幕捧入云。而是未可知也。申退後。奉疏還邸。景慕宮姜世鷹直講述老李重祖權正字文度京儒二人。來訪。
十六日。
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托以多事。還送。午鼓後。守門書員。屢招不來。申退後。奉疏還邸。榮川金應鍊來訪。同副承旨李敏輔遷右副。李校理弘載爲同副。以湖南掌試。尙未復命。以在外卽遞。
十七日。
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又以多事。退出。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書求助通文於興陽康津寶城順天等地。黃氏所居處。使各邑京主人爲傳送地。
十八日。
朝前。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以同副之未出代。退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黃聖休往宋別檢益魯家。略議疏事而來。京儒二人來訪。是日呈求助單子於守禦廳及五軍門。舊例有大疏。則有是例故也。守禦大將金鍾秀。見單子語人曰。黃翼成院疏。誰敢恝然。特書賻儀單子錢文二兩。具官啣送疏廳。五軍門次第有賻儀單子。具官啣書送。而賻錢。則或二兩。或一兩。
十九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又以該令之未出代。退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慶州孫進士鼎九崔進士柱浩。來訪。孫進士留宿。盖與都廳趙允浩同行計也。趙允浩呈故還鄕。是日金履正同副承旨
二十日。
鷄鳴後。黃聖休柳鳳祚尹相烈。進待漏門外。時諸承旨已入政院。獨數承旨在焉。黃聖休等又呼籲。則答曰。當入議云。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是時疏任次第還鄕。獨有掌議柳鳳祚寫疏尹相烈數人而已。入送疏槩。則無一言還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權檾來。
二十一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無一言退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京儒二人來。
二十二日。
以國忌停伏閤。金相觀權檾來。
二十三日。
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又如前日。金吾郞李龜錫自一闕內。來伏閤所。崔直長陽羽亦來。申時。奉疏還邸。柳鳳祚尹相烈。自倡義疏廳來言。聞政院之言。則三疏幷伏。取舍爲難云。故道意欲爲相先後伏閤。未知僉意以爲如何。疏首趙奎鎭曰。此政院退托之言也。三疏雖幷伏。若有捧入之意。則次第捧入。何難之有。雖然。道儒欲從院意。則相先後伏閤無妨。而伏閤自有先後。事體又有輕重。一從伏閤先後。而次第爲之可也。會員具曰。斯言是矣。柳鳳祚尹相烈。此意通于彼中。合席相議云云。而去。日暮。權檾繼至。欲先倡義疏而後本院疏。趙奎鎭曰。是則。不可也。欲先之意。彼此無間。而豈以斯文之疏。後倡義之疏乎。權檾亦曰。相議云云。而去。章陵令呂奎明。京儒二人來。
二十四日。
朝前。疏首與疏任諸人。奉疏伏閤。相先後伏閤之論遂止。盖以自此不許也。日晩。入送疏槩。則政院以多事退出。申退後。奉疏還邸。
二十五日。
朝前。疏首疏任諸人。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退出。如是者三。申退後。奉疏還邸。
二十六日。
破漏後。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退出。午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
二十七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退送。午鼓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尹相烈泮村孫潤慶都事龜錫來。
二十八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相議後捧入云。倡義疏槩。則退送曰。可捧之疏。雖一二日伏閤。卽當捧入。不可捧之疏。雖二三年伏閤。不可捧入。斯速退去。嶺儒聞不勝落莫。午鼓後。入送。則政院又謂相議後。捧入云。倡義疏槩。則工房書吏。初不捧納而却出。申退後。奉疏還邸。孫潤慶來言。明日還鄕云。
二十九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以該令之假寐。退出。午鼓後。入送疏槩。則該令以院議之姑未純同。退出。倡義疏槩。則初不捧見。申退後。奉疏還邸。權檾黃大一來。中牟伻信來。可幸。黃進士景榦黃瑞熙黃建中黃敬中。聯名。折簡于疏首。其略曰。向來製疏之日。只擧元位。而不及配位者。雖曰。請額近例。而於心終覺未安。近見道南書院。舊例。則一疏幷擧。初無單擧元位之事。以此言之。則本院製疏。未免錯料。京議雖一向持重。執事旣在疏首之任。必爲反覆消詳。期於改製疏本。幷擧配位之地。如何。寧掇疏而歸。不可以前疏而捧入。諒處爲望云云。疏首與黃聖休黃泰熙。輪示此書。相與謀曰。吾輩之見固如此。而在家僉議。又如此。當曉諭於黃監察。諸人某條周旋爲計。
三十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無一言退送。午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
十月初一日。
疏首疏任伏閤。送疏槩。則無一言退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寫疏尹相烈呈故還鄕。
二日。
大駕破漏後。幸宗廟。日晩還宮。是日停伏閤。倡義疏任權檾還鄕。京儒二人來。
三日。
朝前。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以同副令李敏普之辭職。不入直退送。午鼓後。一大臣三堂士及重臣。入侍多事。故不入疏槩。而奉疏還邸。黃道源來。
四日。
朝前。疏首與柳掌議鳳祚。奉疏伏閤。是時疏任皆散去。獨有二人。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午鼓後。入送。則以宣惠廳公事國家多事云。申退後。奉疏還邸。同副令病狀。不入直。京儒二人來。折簡于京居崔進士壽亨。議捧入事。
五日。
疏首及柳掌議。奉疏伏閤。守門書員。以事汰去。不得入送疏槩。申退後。奉疏還邸。京儒二人來。
六日。
疏首與柳掌議。奉疏伏閤。守門書員。姑未出代。故不入疏。卽退還邸。是日同副令又病狀。不入直。
七日。
朝前又伏閤。入送疏槩。則無一言還送。午後又如是。申時。奉疏還邸。金履正遞。左副李亨元代出。李敏輔遞。同副南鶴聞代出。黃夏鎭議出京掌議幼學趙學元趙學元辭。不獲已乃曰。雖未出座。若有事。則相議云。京儒二人來。
八日。
朝前。又伏閤。入送疏槩。則答以政院相議處之云。午後。入送疏槩。則又曰。方相議云。申退後。奉疏還邸。京儒二人來。黃夏鎭聞內患。欲還歸。一座若挽之。
九日。
又伏閤。入送疏槩。則以僚任之或有。未入直爲托。而還送。午後。所答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花開全達德來言曰。僉執事之留京。已至累朔。勞苦。則可想。而側聞吾先祖忠簡公不爲竝陳於疏中云。子孫之心不勝鬱抑。玆以裹足上來。又袖示道南書院請額舊例。又曰。家叔數日後繼至云云。疏首及黃聖休黃泰熙。自製疏之日。已有未安之議。及見中牟書簡。又聞全生之言。遂決意合疏。黃夏鎭及疏廳會員。皆以疏本之改製。爲未安爭辨。至日暮。未敦整而罷。
十日。
疏首疏任。將奉疏伏閤。全達德曰。若不合疏。則吾全氏名帖。割給可也。未割之前。不可伏閤云云。疏首謂黃監察曰。未知近來請額規例。而以道南舊例觀之。則全兄之言當然矣。黃監察曰。近來以請額之煩且多。近畿各書院之有正配位者於疏中。只擧首位。而未及配位。豈可捨近例。而從遠規乎。寧可中止。不可合疏。全達德終請合疏。黃聖休掌議柳鳳祚黃弼熙曰。伏閤時晩。先爲伏閤。從容相議。亦非晩也。全生許之。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六承旨入直。而無言還送。午後。入送疏槩。則大駕明日景慕宮擧動。政院多事云。而還送。申退後。奉疏還邸。以正配位幷請宣額之說。廣詢于京中則下及嶺儒。皆如黃監察之言。且曰。疏草重大臣皆已取賢。政院亦知單擧。到今改疏。極爲未安。雖中撤。不可幷請。京掌議及嶺儒之意皆如此。全達德黃聖休黃泰熙諸人。爭之不得。全達德割其叔名帖。而去泮村
十一日。
朝前。疏首趙奎錫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相議爲之云而還送。午後。入送疏槩。則政院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金應鍊來。
十二日。
又伏閤。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午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黃夏鎭爲見其內患告歸。京儒二人來。
十三日。
朝前。疏首疏任伏閤。京掌議趙學元。以爲今日似有捧入之道云。故疏儒懸望。卽爲入送疏槩。則政院別無變通之事。申退後。奉疏還邸。
十四日。
又伏閤。入送疏槩。則又復如前。申時還邸。黃聖休往見京掌議。答曰。昨夕李令亨元自政院來曰。今日力勸捧疏。則該令南鶴聞曰。黃參判以其子孫。無一言於政院。而令監何其力勸也。同副少無捧入之意云。黃弼熙往見黃監察。以爲送言于同副之地。夕後。更聞。則一如趙掌議之所傳云。黃聖休往見貞台。爲傳政院之言。則答曰。吾敢歇後於此事。當力言於政院云。景慕宮姜世鷹來訪。全達德又來。
十五日。
疏首趙奎鎭。奉疏伏閤。柳掌議出外未參。入送疏槩。則政院以多事退托。申時。還邸。黃聖休宿患復發。可憫。全達德泮村來。大覺其割名之爲。妄率謝過而去。李宗洛金應鍊金相寬來。
十六日。
黃聖休患候少減。可幸。掌議柳鳳祚還。李鎭東來訪。朝前。疏首掌議伏閤。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還送。午後又如是。申退後。還邸。黃監察爲見同副令。屢往鑄洞。不遇而還。金相寬李維黙權進士運標來訪。
十七日。
黃聖休患候平復。可幸。疏首掌議伏閤。入送疏槩。則所答如前。午後亦然。黃監察瑗以建元陵令謝恩。歸路來見。申退後。還邸。全達德來。
十八日。
疏首掌議。奉疏伏閤。午前午後。入送疏槩。則所答一如前日。奉疏還邸。金相寬李宗洛鄭基煥延安黃生二人。來訪。鄭得魯曹亨道。向海營而歷訪。一夜同宿。
十九日。
疏首掌議。奉疏伏閤。景慕宮姜世鷹送入問安。鄭得魯曹亨道發行。將欲入送疏槩。則守門書員。終日不見。奉疏還邸。金相寬李宗洛來訪。
二十日。
疏首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所答又復如前。申時。還邸。
二十一日。
又伏閤。入送疏槩。所答如前日。申退後。還邸。
二十二日。
又伏閤。如前日。全始玉來。以合疏事多陳所懷。京議持重。
二十三日。
又伏閤。政院所答又如前日。申退後。還邸。
二十四日。
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答以左副右副今日遞職。姑未出代。僚任未備。不可捧入云。而還送。午鼓後。入送。則無一言還送。鄭都事基煥奉疏。到闕門外。未知其疏辭之何如。而入送疏槩。則政院以日暮還送。而明日捧入云。延安黃氏一人助若干財而去。書通文。求助於信川瑞興居黃氏。同舍人河學浩。爲其先夫人旌閭事。同舍滯留累朔。尙未究竟。而以腫漸呻吟。其在累月同處之誼見之。憫憐。
二十五日。
以國忌停伏閤。朝前。聞之。則李祖承爲左副令。李弘載爲同副令云。平市直長柳範休坡州黃魯源。來訪卽還。午後。黃聖休疏首趙奎鎭。幷進生洞別檢家。略論疏事而還。
二十六日。
朝前。疏首與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所答又如前。午後。則守門書員。不知去處。未得入送疏槩。申退後。奉疏還邸。黃夏鎭自本家而還。全始玉全達德來。善山李進士憲愚來訪。
二十七日。
朝前。疏首與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所答又如前。午後。又送疏槩。則無一言退送。同舍人張宣傳還鄕。金應鍊全始玉叔侄來。坡州黃鉀。齎十斗米來訪。
二十八日。
疏首掌議。奉疏伏閤。三次入送疏槩。則政院皆如前還送。申退後。奉疏還邸。金應鍊全始玉來訪。夕後。黃鉀來宿。
二十九日。
朝。疏首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所答如前。午後亦然。申退後。奉疏還邸。累朔伏閤。旣傷風寒。又傷暑濕。疏首面部有浮氣。可憫。平市直長柳範休來訪。全始玉亦來。
三十日。
又伏閤。入送疏槩。政院無一言還送。午後。入送。則守門書員。持疏槩。還報曰。政院書吏謄三疏疏首姓名。而入去云。似有變通。申退後。奉疏還邸。黃道源金應鍊坡州黃量源來。
十一月初一日。
疏首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還送。午鼓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崔進士柱浩黃道源全始玉京儒二人來。
二日。
疏首疏任。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還送。午後又如是。申退後。奉疏還邸。李都事龜錫黃道源全始玉京儒二人來。
三日。
又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還送。午後又如是。李都事龜錫來訪於伏閤所。申時。奉疏還邸。金察訪龍見來。
四日。
又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還送。午後如是。申時後。奉疏還邸。是日李敏采爲同副全始玉來。
五日。
辰時大駕幸新門內大闕。因幸孝彰廟。未時還新門內大闕。經宿。是日下令上言。倡義疏儒及黃泰熙。俱上言。停伏閤。坡州黃世鎭來。
六日。
大駕還宮。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以多事退出。日暮還邸。昨日倡義疏上言。則進覽後。仍命禮判。使之招見狀頭。考見冊子。回啓爲批。黃泰熙上言。姑未知下於何曺。全始玉來。
七日。
朝前。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疏槩。政院以多事退送。是日三入疏槩。而政院所答。皆以多事退送。申退後。奉疏還邸。全始玉金應鍊來言。倡義疏廳上言。登徹後。上命禮判。召見狀頭李鎭東曰。曾知嶺南爲鄒魯之鄕。而不知忠義之如是矣。今而後詳知。因爲回啓。其辭意極。其褒獎。日暮后入啓。是日三更量。自倡義疏廳欲通信。而拘於夜禁。使直房女主人叩門。急傳小札。略曰。俄者自政院。使一書吏。來問倡義疏及請額疏。何月上來。何日伏閤。卽今疏儒之留存者。亦幾人詳査錄去。此必有大處分之期會。勿就寢而待之如何云云。疏首及滿坐見書。懽欣如醉如夢。因竊念正配位合疏。是吾輩之本意。全黃兩家。書諭面議。又如是懇到。失今不改。則必有後時之歎。故罷漏後。使黃弼熙邀掌議柳鳳祚及李進士宗洛。撰配位三先生事蹟。改書疏本。寫畢。夜已向曙矣。
八日。
疏首趙奎鎭。以四先生合疏之意。通告于道儒及京中黃氏諸人。黃瑗黃道源黃夏鎭。初雖持重。末乃純同。全始玉在泮中。故未及知也。朝前。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俄而自禮曹傳倡義疏下批。顚倒伏讀。十行絲綸。字字鴻恩。嶺南忠義。極加嗟賞。末乃曰。無論京外。雖探蹤守埤之人。皆給帖加資。至於別錄。特爲付籤。因入侍左右相及禮判。分等爲敎。其時該房承旨。自政院査出推考。嶺伯越俸一等。爲嶺儒者。孰不蹈舞於是日耶。俄而政院書吏。又來倡義疏廳。錄疏首姓名及伏閤日子而去。入送疏槩。則政院曰。院中多事。承旨入侍。姑停止云。意謂今日。則必有捧入之道。而又如是。可怪。三送疏槩。而終不捧入。還邸之際。政院書吏。出來伏閤所。又錄本院疏丹溪疏伏閤日子而去。全始玉來。
九日。
疏首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相議捧入云。午後。又送疏槩。則答曰。相議捧入云。申時還邸。
十日。
又伏閤。入送疏槩。則答曰。院中多事。勿爲頻頻入送。數日後。當捧入云。午后所答。又如是。還邸。
十一日。
疏首。奉疏伏閤。昨日三更量。自上下敎。開門後。倡義疏首率疏儒入侍。疏儒未明祗待于門外。平明又下入侍令。入侍。則問居地姓名後。上曰。嶺南事壯矣。嶺南事壯矣。汝等見。傳敎乎。疏首對曰。姑未承奉見。上曰。予固知如此。故入待汝等也。仍命承旨李敏采。出給傳敎。敏采曰。雖死不可以出給。上又命出給。敏采曰。死不奉敎。如是者三。上曰。汝之欲死者名節乎。汝以新入承旨。阿附何人。豈敢生心乃爾乎。敏采曰。院意如此。不敢奉敎。上命左右出給。上命疏首讀傳敎。時有誤讀處。則上親敎之。讀畢。上曰。汝等之意何如。汝必抱此傳敎歸。諭嶺中父老。使知予意如此也。。聖恩如天。嶺南人士聚首感泣而已。倡義疏儒李鎭東上言。批答曰。日昨輦路。因多士上言。付該曺稟處。俄筵聞禮判言。始取見之。纔開卷已聳目。以次逐張考閱。擊節嗟賞。自不覺夜漏之向闌。嶺南之爲鄒魯爲冀北。夙所稔聞。而壬辰已事尙矣。戊申之蹟。尤卓乎。凜如凜如。過一兩月。便非今歲。豈不後時乎。多士之封章。旣無一毫干恩之事。則許久。不捧烏在其惟允之義。該房承旨。使政院査出。一倂從重推考。觀於冊子。安東等十三邑。各自舊義而今春紀錄之擧。只及於贈參判柳升鉉。贈參議權萬有。不免班駁。外此贈職。或取存恤之典。至及於探蹤守埤之人。而安東前掌令金侃等。三十一人事蹟行誼。何等表著間。亦有至今生存者。而竝在勿論之科。尤豈成說乎。紙頭爲先付籤。以下問于大臣。分等稟處。前此旣許。隨聞追啓。因其疎漏。亦有推考之擧。則爲道伯何不盡。必擧行有此掩置乎。且況生存人。雖係應募之麾下。小卒無論京外。幷給牒加資。別錄中諸人。獨不一視乎。以此以彼。道伯事大失旬宣之責。當該道臣。越俸一等可也。傳曰。取見所進冊子。多示歎賞。仍命收議大臣。意豈徒然哉。欲使鄒魯之鄕忠賢之裔。得洗六十年積寃厚誣也。大抵詿誤場中。擧能超拔。至有爭先倡義之事。其氣節誠忱。可謂自別於他道。舊甲重回。舊功咸錄。以此時見此冊。烏得無拔例褒嘉之典。而今見諸議。雖有參差。亦何必求其苟同。令本道更査稟處事。撮要刊布事。竝依領左相議施行。而觀此冊子。其時號召安撫之功。趙德隣黃翼再。誠有之。翼再之橫罹。本有公證。德隣本事。雖未到底諦悉。而先朝下敎旣許以望士。晋秩擢用。置之近密。後十年。臺臣追提乙巳疏語請竄。而一故相以幾不免枉害忠良爲說。畢竟有給馬賜米。護其行之恩典。况自乙亥以後。國是大定。而亦下給牒之命。且况近日過於此之事。苟無關於大堤坊。猶且蕩滌而疏通。至於兩人事。先朝之恩眷若此。故相之擧措又如許。是年是人。政合紀錄。故承旨慶尙上道號召使趙德鄰。故牧使右道召募使黃翼再罪名。歲抄中特爲蕩滌。此乃仰述恢蕩之聖意。凡我嶺土人士。知予今日申諭之意。益勤絃誦之工。孝於家忠於國。萬子孫無斁。以答我先大王天地覆燾之盛德大恩事。知悉可也。黃泰熙爲通此奇于本家。急送奴子。故疏廳諸人。各付家書。
十二日。
朝前。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無一言出送。如是者三。還邸時。聞政院自前夜以倡義疏事。終宵待罪於挾陽門外云。院疏。則不遑於捧入。可悶。
十三日。
疏首掌議。奉疏伏閤。入送疏槩。則政院如前退送。申時。奉疏還邸。
十四日。
又伏閤。政院所答。復如前日。申時還邸。
十五日。
以國忌停伏閤。黃弼熙以倡義錄査卞事。還鄕。
十六日。
又以國忌停伏。黃泰熙以華齋公改題事。還鄕。
十七日。
京中諸議。皆以爲嶺疏纔蒙大霈之餘。嶺儒之又爲伏閤。似涉煩猥云。故果停伏。
十八日。
停伏。別檢權文度來訪。
十九日。
停伏。典籍南述魯來訪。
二十日。
停伏。
二十一日。
停伏。鄭得魯曹亨道。自黃州來訪。疏首與鄭得魯訪廟洞李台獻慶。因向苧洞訪兪令恒桂丁令範祖。相議疏事。皆曰。停伏得宜云。黃夏鎭約後期。下楊州
二十二日。
停伏。察訪鄭衡臣來訪。
二十三日。
停伏。鄭得魯曹亨道全始玉。還鄕。
二十四日。
停伏。聞政院消息。則自倡義疏批下之後。政院逞憾。嶺儒院疏期於不捧云。義州林將軍慶業書院。有奇異事。義州有林將軍院。一日齋任宿於講堂。林將軍夢告齋任曰。明日吾行當到此。汝其灑掃堂宇。設鋪陳以待。齋任以爲夢中偶然之事。不爲銘念。翌日午時。林將軍大張威儀。直到講堂。數罪齋任之不謹擧行。決掍曳出。此則萬目所同。灣尹以此音狀聞。上命近侍宣額賜祭。傳曰。宣額雖是禁典。而此院與他自別。遣承旨。致祭宣諭云云。自是諸承宣。以此執言曰。曾以嶺南倡義疏事。累被推考之律令。於聖敎中。禁典二字之下。若肆然捧納。而又爲推考。則此實惶恐處。萬無捧入之意云。
二十五日。
停伏。
二十六日。
停伏。壽峯安平書柬。轉便來到。刑曹判書尹蓍東上疏。極言趙承旨復職事。侵斥右相。不有餘力。又言趙進道削科事。自上批旨極嚴。又特下批忘記。而末端云。刑曹判書尹蓍東爲先罷職。不叙之典。
二十七日。
停伏。領議政金致仁箚子。以爲幷取見嶺儒所納冊子。則當戊申逆亂之日。十數邑前啣儒生。相率倡義。聚衆部署。雖無鏖兵斬賊之功。發通曉告。各自激厲。可謂不負鄒魯之遺俗。有足可賞。而第其上言措辭與捧納冊子。已是越格。別錄以下三十餘人。率多隨意崇獎。 別無公私證跡。猥越甚矣。况權榘。則累出逆招。節節可疑。安撫使朴師洙。自嶺還朝。以榘獄事之一。皆餙詐。力請更拿。此幷昭載於勘亂錄。而今乃全掩事實。許以忠節。卽此一事。可反三隅。今若專信其言。追加褒賞。則適足爲傷國體。而開倖門之歸。以此冊子下送本道。使之詳覈虛實論理。狀聞後。更爲稟處似宜。至於金聖鐸趙德隣黃翼再。皆在於罪籍。而聖鐸。則得罪名義。至於杖謫。德隣。則敢陳凶疏。語意陰慘。而肆然混置於諸人稱冤之中。欲售其嘗試之計者。情狀痛惡。狀頭李鎭東。不可不嚴加勘處。以徵日後云云。領議政金致仁箚子。伏以臣伏見。該曺收議草記批答下旨。至有趙黃罪名蕩滌之敎。臣不勝驚愕憂歎之心。翼再所坐。臣固未詳其虛實。德隣乙巳疏語。曾雖未見。第以丙辰疏啓與避辭見之。則其疏中無意匪心倉卒飮泣等語。人所傳道之三四句節外。其於正名實條。至謂之提說許多凶言指意叵測。爲賊檄掛書之張本云云。則其爲陰慘。槩可推知。逮捕命下後。下敎若曰。拿鞫趙德鄰。不過欲受其一通供辭。以破嶺人疑惑。果然善供。明本情之不然。則可矣。反其推問也。旣不自服其誤。又不自明其心。特以年八十。難於加刑。遽命放送。先臣力陳其異於疊罪。依前發配。其後臺啓提請加律。至翌年金聖鐸事出。始蒙允副矣。夫以先朝安反側之聖意。一疏三謫。尙在罪籍。則其負犯之深關係之重。何如也。今殿下不詢在廷徑下處分。喉院繳納責敎嚴截。視之如薄過。俾不得有言。不料聖明立世。有此過中之擧從此堤坊蕩然。世道之乖常。竊恐非細憂也。雖然臣於日昨收議。敢請狀頭嘗試之罪。而殿下不惟不從許。乃反竝本事而蕩滌之。於是乎臣之妄言之誅。無所逃矣。兢凜惶蹙伏俟勘。伏乞聖上亟賜斥退。仍降嚴譴。使公法行而私心安。千萬幸甚。取進止。批曰。今番兩臣處分。不惟逢舊甲紀舊勞。予之所裁量旣定者。以先王之心爲心。卿不可以先卿所執爲歸乎。其詳在記注。此不更煩。而日昨收議。卿雖盛論不當許。予見略有參差。果不得副施。此爲可歎。而在卿何有毫分難安之端。卿須安心勿辭。卽起視事。左議政李性源以爲。取見嶺儒所納冊子。則修載倡義時。上副將以下。部曲姓名及檄書通文。足見鄒魯之鄕士風之忠義激感。而第念此係私家私文書。固不可憑信。倡義外別錄等諸條附陳。已見不免挾雜。雖以倡義諸人言之。十三郡中安東爲首。安東之上副將。已於今春特降超秩贈官之命。則其餘十二邑。上副將。便是已蒙褒賞。今若遍加。則朝家恩典。反歸屑越。臣意。則令該曺考出各其邑可較文蹟。刪去繁蕪。只錄姓名諭撽文字。下送本道監營。使之刊布。則庶爲激勸感發之要矣云云。左相李性源。伏以臣日作。以嶺儒上言事。承命獻議。敢請倡義錄之令本道刊布。以示褒勸而已。至於卷末所列諸人之不係倡義者。初不及論。只以繁蕪之可刪。挾雜之宜斥略。有所陳及。其伏見批旨。下者有趙德鄰歲抄蕩滌之命。此非臣愚慮之所敢到也。德鄰乙巳疏。臣實未見。前席下詢之下。不能詳對。但以當拔冊中之意。私語僚相矣。卽見前後臺閣聲討之論。可見包莊之至凶關係之甚重。雖以我先王涵覆之聖德。而或鞠或察。一付公議。其名尙在冊書。其孫至拔科榜。不可以年久事宿。爲輕議曠蕩之典也審矣。重逢是歲。聖心興感。前後恩典。皆出於獎議酬功。而功罪不可相掩。彰癉不可相混。籍令德鄰奉使有功。所坐旣重。非功可贖。况號問之命出自朝廷與。挺身倡義者大有異焉。功無可記。罪有難赦。遽然全釋。奈大提防何。臣猥忝士官。旣不能明白敷奏於承問之初。又不能直截致討於收議之時。昏昧稽緩。罪不容誅。伏乞亟降感譴。以安私分。批曰。功。則有可記。罪不至難赦。彰癉未必爲相混。予雖憂於恢蕩。寧有一毫放弛於辛壬之大義大防而有是擧也。卿須勿慮。安心視事。右議政蔡濟恭以爲。嶺儒之必欲以戊申倡義。一塵睿覽者。其意非出於別有希望。盖欲暴白其嶺南士大夫當賊變之際。嚴於順逆之辨。而忠義所發。矢死靡悔之蹟也。其心雖苦。其徹無路。今乃於禮曺覆啓之批。洞悉其忠義所激。嗟賞其鄒魯餘風。十行辭旨。昭回日星。儒生輩抱此以歸。則六十年蘊結可洩。七十州志願斯足。他日殞結之報。庶可期。士士同然。雖以朝家酬報之意言之。華袞之褒。萬世可傳。又况所進冊子。將使之入梓廣布。以爲他道聳感之資。則其褒忠獎義。豈可與貼贈存恤之猶屬循序者。同日道哉。臣見如此之外。他無可達矣。下諸承宣。批傳曰。明天理正人心。存天下之大防。扶天下之大綱。予亦略有所得於宋賢東儒之說者。豈或歇後於此等處。有昨日處分乎。憧憧一念。輒於義理邊着眼。而至於趙黃事。切有斟量者存焉。黃固無論。趙亦可恕。先朝下敎若曰。文字罪其人。非王者美政。登筵諸臣。亦莫不贊揚。無一人立異者。其後聖敎。又若曰。乙巳疏中第九條。引於朱子甲寅封事第十條正名實三者。尤不可以爲罪。盖以是非分名實。協贊諸臣之所不免也。委官以下。同然仰贊。白放之請。至發於按法之列。逢今年述古事。有何不可之端。觀此承宣疏語。不識事實委折之如何。直以兩人名姓之罕見聞。眼瞠口呿。擾擾揚揚。殆若生出別般事端曲加疏釋者。然諸承宣事。殊大孤陋。苟有關於辛壬大義。則予之嚴防而嚴守者。其可不若今日不解事之承宣輩乎。今人昩事於典古爲痼疾。遇事輒如是顚倒。似此等人。難以常例。過加飭責。此上疏爲先還給。諸承宣。取考堂后所在乙巳丁未戊申丙辰丁巳戊午己巳丙子等年日記。以解滋惑之心。可也。是日六承宣盡爲罷職。掌令趙貞相疏上。論太學鳴鼓事。先是太學以倡義疏事。泮製時列書。嶺南倡義疏中人姓名。鳴鼓驅逐。然嶺儒不在逐中。至是趙掌令陳疏極言。又論救趙令事。上優批。而大司成洪文泳。爲先削職。付罰太學掌議。
二十八日。
李時秀南鶴聞。差假承旨。入守政院玉堂。又以此事聯啓。上特傳曰。學淺識蔑者。何可近於講筵。姑先遞差。退修三餘之工爲敎。又施尹蓍東削職之典。獻納金光岳削去仕版。放歸田里。又。命自今出秩歲抄。持平未記姓名疏。宜施嶺海竄配。而姑爲安徐金郊察訪補外。當日出送。正言忘未記姓名疏。又降嚴批放逐。孟山縣今補外。
二十九日。
停伏閤。太學掌議停擧。其餘生進及下齋儒生四十九人。封疏伏閤。盖論倡義疏事。卽下嚴批。館疏頭色掌。勿限年停擧。又以不能禁斷泮疏。東西成均館官員。盡爲罷職。蔡相多被侵責於章疏。故連上辭狀。又納符出南門外待罪。捽患吐瀉。症勢危劇。出伏私次。上卽還符。特命假承旨使之承命待次。病勢小緩後。偕來爲敎。故承宣連在下處待侯。又令史官奉遺敎。日三往來。命送御醫及人參等。藥御前親看製。送史官晝夜奉命。長在右相處。進藥飮粥等。節時草記。大司諫李獻慶上疏。極論時人之語逼聖主侵侮大臣之罪。疏意甚激切。上特降優批。至有士大夫風儀下敎。金鍾秀又上疏。又被削職之律。
十二月初一日。
停伏閤。蔡相在南門外病劇。御醫逐日診症。上特敎曰。聞此症勢。此藥宜矣。製下人參平胃湯。一貼一服。妥帖際遇隆重。近古無比。
二日。
停伏閤。蔡相入城。領相以趙貞相疏中。正人二字爲其故。相臣上箚卞誣云。
三日。
停伏閤。是日下次對。令諸臣未克早朝。待闕命。因備邊卽催促甚嚴。食後始次對蔡相。亦扶病入侍。傳曰。趙進道復科事。百官稟達。領相對曰。臣雖未知趙德鄰本事。德鄰旣蕩滌。則其孫之復科宜矣。百官俱奏當然。右相曰。臣以此等事。屢被百官之謬說。而百官之意如是。臣無異意。四更量吏曹書吏。奉復科命。下去英陽趙進道本家。
四日。
停伏閤。領相退伏金吾門。自上屢下勿待命之敎。因下罷職。傳旨曰。雖是老昏。豈不知君君臣臣之義乎云云爲敎。尹蓍東定配。
五日。
停伏閤。上批蔡相曰。趙德鄰事。非爲其人。又非爲卿。政院日記。考覽先朝處分與傳敎。則待之以林下之士。加之以旋招之禮。丁巳被譴也。特令勿搜勿械。出獄之日。賜以乘馬。又命庖人繼肉。廩人繼粟。原疏句語。逐段昭釋。旋以乙巳處分。曲加慰譬。及至乙亥以後。先正文正之從享也。下蕩滌罪名之敎。其後又曰。雖非復官。無異復官。俾息鬧端。今番事。非仰述而何。此謂非爲其人。又非爲卿也。卿之於此遭罹。豈足深嫌乎云云。以金鍾秀叙爲判義禁府事。與左右相。座禁府。命羅將都事俞彦鎬。牢囚南間。領相金致仁削職門外出送。蓍東金吾門定配。彦鎬安置大靜。百官三司交章。請鞠。請正刑彦鎬。請安置致仁蓍東載順等。以嚴君臣之義云。
六日。
停伏閤。昨日次對時。大臣以下欲進對。傳曰。無君無臣。已三日矣。卿等退去。連啓請對如是者四五次。入對後。有昨日處分。左右相亦不自安。退伏金吾待罪。三司合啓。力請亟刑四罪人之罪云。
七日。
停伏。三司合啓如前。上特敎曰。今番被殫臺官。一幷許遞。大司憲李獻慶掌令趙貞相獻納申禹相。皆遞差。黃監察以陵令下番。委訪倡義疏儒。移接於南門內舍館。
八日。
停伏。黃監察送酒肴及曆日。三司合啓。一向如前。
九日。
停伏。倡義疏儒及丹溪疏儒。撤疏還鄕。
十日。
停伏。
十一日。
停伏。
十二日。
停伏。是日洪承旨仁浩以右副。更入政院。或冀有捧入之路。更議伏閤事。
十三日。
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黃聖休。往洪令家。懇請捧疏之意。洪曰。纔入院中。未及相議。而豈敢歇後。第院意若不俱一。則托我一承宣。實難容手。然翼成公請額。則似無間於彼此。當拔例周章於院中。勿爲冒寒。更伏姑待。自此更通而伏閤云云。
十四日。
停伏。
十五日。
停伏。
十六日。
疏首往見洪令。又言捧疏事。洪曰。吾以此事。力言該房承旨。其意亦不邁邁。而但儒疏豈可容易捧納云云。明當更爲申囑。自明日更爲伏閤似好云。
十七日。
疏首疏任。奉疏伏閤。因文臣殿講及製述政院。終日入侍。故最後入送大槩。答以擾不得捧入云。
十八日。
又伏閤。鄭都事基煥來訪。申退後。奉疏還邸。送鄭都事于洪令家。探院中消息。
十九日。
以臘享大祭。受香致齋事。停伏。
二十日。
以都政。停伏。
二十一日。
以都政未畢。停伏。黃弼熙自本家來聞鄕信。可幸。
二十二日。
洪令昨以同副入院中。送言更爲伏閤。。故朝前伏閤。適値殿座。有新差官肅謝之命。疏槩出入。不得如意。申退後。猝聞洪令以搢紳疏捧入事。遞差云。洪令云。大人洪監司秀輔。自中和謫所。宥還[九月擧動時。以船窓未備事。有是命]。故黃聖休柳鳳祚往慰洪令家。洪令曰。今日期於捧疏矣。意外見遞。實非本意。而今乃如此甚無顔云。因曰。老人寒苦。如此無異自已當之姑。勿冒寒伏閤。以待後日。有可捧之路。然後更伏云云。其大人曰。汝亦自任乎。洪令曰。果自任而遷就至此。心甚不安。洪監司黃聖休曰。所謂承宣今日遞差。明日更出待。此兒更出。伏閤好矣。洪令曰。吾雖不入。若有周旋之路。則卽爲相通待之無妨云云。其誠意可感。永川鄭一僑成德龍鄭夏澗安東金宗鐸義城申鳳朝。來訪。靈山縣監李龜錫。肅謝後。卽訪。
二十三日。
停伏。
二十四日。
停伏。
二十五日。
停伏。黃弼熙奴馬還送。安東柳鳳祚本家奴馬來。
二十六日。
停伏。金宗鐸來訪。
二十七日。
停伏。柳鳳祚黃弼熙。往洪令家。洪令入侍未還。其大人令又言。勿以爲慮。家兒入院中。則當捧疏云。安東李重祚金始全尙州孫潤慶善山尹相烈坡州黃鉀。來訪。
二十八日。
停伏。鄭察訪衡臣來訪。
二十九日。
停伏。
三十日。
停伏。
己酉正月初一日。
安東李重祖金始全金宗鐸義城申鳳朝永川鄭夏澗。來訪。
初二日。
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黃聖休。往貞洞洪令。入直未還。其弟前修撰義浩。寒暄畢。極言疏事之尙此遲延。又曰。家兄纔有捧入之路。而適因國家齊戒之時。初八日以前。無伏閤之期。其間家兄之無事留院。又未可必是憫云。其誠意。可感。朝前。黃監察在職所未還。而裁書致問。自本家精備食物委送。厚意多謝。王先達允澤來訪。
初三日。
大駕爲參祈谷大祭。擧動于社稷。朝前。金始全李翼遠。來訪。是日停伏。
四日。
停伏。孫潤慶李翼遠李重祖金宗鐸尹相烈金始全。來訪。
五日。
慶安察訪金龍見江東縣令姜世綸。來訪。景慕令姜世鷹。使人問安。是日停伏。
六日。
韓晩裕爲同副承旨黃道源請疏首掌議及黃聖休黃弼熙板井舍館。精備食物。厚饋可謝。疏首及黃聖休。往見俞承旨宋檢別而還。大駕以宗廟春享大祭。辰時擧動。是日停伏。
七日。
罷漏後。大駕還宮。鄭一僑成德龍金宗鐸。來訪。是日停伏。
八日。
辰時。大駕展拜景慕宮。回變時。住輦觀旆橋牌。招藝文提學藝文提學未及來待。卽爲罷出。駕前除授李秉模。偕承宣未待設人日製於泮宮。以此停伏。
九日。
大駕殿座。後苑犒軍。是日停伏。金宗鐸鄭一僑鄭夏澗。來訪。
十日。
大駕殿座。春堂臺出身及堂下諸武弁試射。以此停伏。以疏事。疏任連日往來于貞洞
十一日。
行常參禮及大臣次對。同日不罷。故停伏。靈山倅江東倅發向任所。送人委問。各送二貫銅。仁同張先達守初義城主簿坊密陽朴主簿鼎明義城申鳳朝。來訪。
十二日。
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奉疏伏閤。入送疏槩。則守門書吏來言。食後當捧入。又令預備疏首所着靴子及擧函使令所着直領。又書疏下儒生名帖幾員而待之云云。俄而守門書吏來索疏槩二張。一則納政院大槩。一則納內兵曹大槩也。書吏卽出曰。明日大駕擧動永喜殿毓祥宮儲慶宮各所。故政院擧行煩劇。登覽無隙。明日擧動後。再明當捧入云云。此則李承宣鼎運洪承宣仁浩。在院周旋之力也。伏閤八朔。始聞捧入之言。可幸。李重祖金始全金宗鐸成德龍禮安權時標坡州黃宅文黃長耆翼鎭昌寧成萬基。來訪。
十三日。
辰時。大駕擧動新大闕。脯時還宮殿座。敦化門以軍門之不能整齊。拿入訓鍊大將徐有大。嚴敎曰。近來連日擧動。軍容行伍不齊。此是大將之責也。固當嚴處。姑觀日後安徐云云。李翼遠成德龍。來訪。
十四日。
朝前。疏首趙奎鎭掌議柳鳳祚黃弼熙。奉疏伏閤。以望日各陵廟受香事。終朝煩劇。小定後。入送疏槩。則政院答曰。都令以摘奸事。往宗廟及景慕宮。其還似未易。今日方?捧入而未果。明日。則大名日不可伏閤。再明當捧入云云。疏任因念寒事?緊。旣已伏閤。則不可徑退。苦待都令之還。朝移時後。都令果復命。旣見其入去。亟使守門吏隨其後。入送疏槩。少間守門吏來言。疏首陪疏入來云云。疏首急通此奇于各處舍館。黃聖休黃弼熙顚倒入來。同道人散在舍館者。聞風赴會。金宗鐸李宗洛諸人。皆來參。時擧函使令適出外。不知住在甚處。守門吏催督甚急。末乃曰。時哉不可失。而若失此時。則今日又不捧云云。疏首疏任奔走罔措。雖索擧函使令而四索。不見。在座諸人。四出搜訪。而金宗鐸亦親自搜門於諸各寺。同道之意誼。可感。移時後。果索擧函使令。而前日勢貰得直領。已還本主。故拘於直領多費。晷刻當日燥悶。不可言。守門吏再三催促。疏首趙奎鎭。使擧函使令億彬擧疏函。使守門吏指路。疏首儒巾靑衣黑靴隨其後。入敦化門東邊。由進善門。過仁政殿。由肅章門。入承政院。政院在肅章門內址邊。第一間守門吏先導入政廳門外。使政院工房書吏通于政堂。疏首立于政堂退軒。則執禮書吏呼唱曰。曲拜。盖[政堂西壁有啓板。故曲拜]疏首乃西向曲拜[單拜]訖。執禮書吏引入政堂。一承宣西向坐。奉疏入披于案上。使疏首大讀。讀訖。因出退。伏于敦化門伏閤所。將以待下批矣。移時後。政院書吏來曰。疏批已下。疏首當入政院。奉批云。故疏首更入院中。則政院書吏置疏批于曲拜廳。因呼唱曲拜。疏首曲拜訖。欲謄疏批之際。書吏來言曰。洪承宣令監在政堂後。請見疏首云。疏首隨書吏入去。則洪承宣笑迎曰。疏事已至此境。聖主又下優批。斯文文幸。莫此爲盛。疏首答曰。今此疏事得成。莫非令監周旋之力也。洪令曰。生之力何有於其間耶。疏首曰。若非令監。則今日之納疏。何由而得也。洪令曰。此?。則誠非怪也。因命書吏謄出疏批。以納又曰。回啓遲速。在於禮制。須速去禮判家相議云云。批曰。省疏具悉。誠如爾等之說。以翼成公之勳之勞。侑食之所尙。闕扁額。可謂曠典也。欠事也。許令該曺詳考曺在文蹟稟處。疏首奉批中來於伏閤。所讀批旨訖。與柳鳳祚黃弼熙北向四拜。退歸直房。是日午前。金宗鐸來。言疏事捧納之期。曾知在今日。故心甚鬱鬱來待云云。河學浩李翼遠成德龍鄭夏澗。亦來於納疏之時。同爲待候於批下之際。同道之誼。可尙。禮安權時表來。問傳李重祖書。大抵本院疏事上來之日。本非期於必成也。上來之後。又多中間支節。况自倡義上言登徹之後。朝著一場分騷。重。以疏資斷續無常。載罹寒暑苦狀。萬千在京者。咸言下去。如兪令者。恒言歸字。在鄕者。又裁書趣歸。而初。則蔡相勸伏閤。末。則洪令力挽。乃曰。此時下去之。後吾備中。如李鼎運權儼丁範祖諸公。趂此入政院。則必有捧入路。會君子半塗而歸。前功可惜云。故所恃者推此令。而排衆議蹲坐過歲者。此也。果有今日之事。倘非洪令之盡心於嶺事者。烏能至此耶。因伏念奉疏。承批率多曠日遲滯。而卽日下。批。蒙此鴻恩。此雖翼成公之勳之勞。我聖上曠世興感。而聖恩如天。嶺士之踏舞不可形言。疏首與黃聖休往見禮判沈豐之。只見其胤子而還。裁書通奇于三浦黃道源
十五日。
疏首更往禮判家。又出外未見而還。因往妙洞。見李參判獻慶。李台亟賀竣事。因曰。雖不見禮判。如是優批之下。有何他慮云云。李重祖金時全孫潤慶李翼運尹相烈。早朝來問。是日同道知舊之來問者。相續。仁同別檢昌胄慶州別檢鼎秉安東別檢文慶京居尹別檢行喆眉叟五世孫延川居許某禮安權時標密陽李輝淵善山金允文星州崔上舍柱浩安東李進士宗洛尙州察訪衡臣坡州黃宅文榮川鄭章簡安東金宗鐸永川成德龍鄭夏澗。來問。黃道源來。漆谷李翼運亦來問。建陵令黃瑗在職所委書致問。自本家送節日藥飯。勤意可想。柳鳳祚黃弼熙往禮曹直房。探問回啓遲速。禮吏所答。此後事尙遠矣。堂上方呈辭。新舊堂上出座。以宣額處分。回啓後。以院號備三望進之。又以書額員備望進之。俱落點後。宣額節次次降下。則此後未知幾許日更滯云。
十六日。
大駕擧動于新門內大闕。早朝裁書通于楊州黃夏鎭。建元陵令黃瑗京居李烜楊州尹勉翊永川鄭一僑成德龍都事基煥。來訪。
十七日。
疏首與黃聖休貞洞。致慰其奉疏委折於洪監司。而洪承宣座直未還。因與洪監司有多少酬酢。而眷意尤倍於前日。疏廳諸人往問李鳳山鼎揆於?洞下處。金宗鐸來訪。
十八日。
疏首爲先塋省掃。往豐壤安東權進士就度裵先生兄弟永川成德龍權時標連山虞候補明金先達弘喆成萬基。來訪。
十九日。
疏首自豐壤還。李重祖金時全金宗鐸孫潤慶李翼遠尹相烈肇慶令姜世規姜令世鷹義興申司藝宅和。送人傳肉札。禮曹堂上未差。故回啓曠日遲延。方以爲憫。今日政事。吳載純落點出座云。
二十日。
禮判呈遞。鄭昌淳以前望單子蒙點云。大駕擧動于景慕宮。以誕日茶禮經宿。以此回啓漸遲。悶悶。金宗鐸留宿。鄭夏澗申鳳朝金龍見。來訪。鄭都事基煥復職監察。肅拜後來訪。掌議柳鳳祚將以明日還鄕。故尋訪京中知舊。薄暮而還。
二十一日。
柳鳳祚食後發行。累月同事之餘。遞爾先歸。去留之情。不勝悵黯。黃弼熙往禮曹直房。見執禮書吏。則禮曹方修入回啓草。而考見書院錄。則尙州各院錄不在於禮曹。甚可怪也。書吏以此。多有難便之端云。以事機不然之事。累次申復。則書吏始搆回啓草。就贊於禮堂。因正書明日入啓云。啓草曰。因尙州幼學臣趙奎鎭等上疏。批旨內誠如爾等之說。以翼成之之勳之勞。侑食之所尙。闕扁額。可謂曠典也。欠事也。許令該曹詳考。曺在文蹟稟處事批下矣。取考等錄。則翼成公黃喜書院。只有尙州白玉洞長水之滄溪祠兩處。而俱未蒙賜額之恩是白如乎。今此儒疏宣額之請。宜有朝家許施之典是白乎矣。書院賜額。事體甚重。有非臣曺所可擅。便上裁何如云。黃道源成德龍鄭夏澗。來訪。
二十二日。
朝前。轉聞禮曹回啓改書云。故黃弼熙往禮曹直房。問其委折。則禮曹書吏曰。翼成公請額回啓。無德業二字可欠。故改書云。取見回啓改書草。則前啓草。俱未蒙賜額之典是白如乎。以下有乃以故相之德業。尙闕華額之恩典。則士林公議。宜有缺望。今此儒疏宣額之請。不在朝家疊設之禁是白乎矣。書院賜額係于恩典。有非臣曺所可擅。便上裁何如云云。黃道源來。
二十三日。
朝前。禮曹回啓批答來到。批曰。翼成院宇。尙闕扁額。豈非欠典之欠典乎。特令文任。撰。進額號。宣額日遣近侍致祭。祭文當親撰。曾聞坡高之間。有翼成子孫云。主祀者。在其地乎。分付畿伯。搜訪狀聞。伏讀批旨。聖意隆摯。至於搜訪子孫之境。倘非我先生德業之巍卓。豈有聖旨之若是懇懇耶。感頌無地。鄭監察基煥呂都事奎明肉札來。疏首持批答。親往畿營。以先生宗孫狀聞之意言及。則畿伯使禮房營吏送來于疏廳。錄去黃道源居住姓名年歲及父名。
二十四日。
疏首與黃聖休將往宋別檢家。歷訪鄭監察於霜臺直房而來。捧疏蒙批之後。雖有傳便於本院。而不可無直便通奇之道。且自上有親撰祭文之敎。則親撰之時。或慮有採錄正配位事蹟之命。故上來之日。雖已略略修錄。而自疏廳猝難詳記精書。罔夜走人于尙州。以爲修錄四賢事蹟之地。納疏之後。留在闕外。事體如何。故夕後還接於板井洞舊館。
二十五日。
疏首與黃聖休往見藝文堂上李秉模。書進院額三望單子[玉洞德峯道溪]。藝堂曰。藝文館下人。尙無擧例之事。甚是怪事。若有擧例之事。則卽當書進額號。且曰。製額之法。皆因書院近地地名而爲之。今此玉洞之號。極好云云。
二十六日。
朝前。吏曹使令自政院持傳敎。而來到仁峴黃道源所在處。傳敎內曰。令兩銓招見身手。吏兵曹間收用事。分付云云。會中諸人。或云黃道源。卽見吏判可也。或云未招見。前先往不可云。故只送言于吏曹書吏。以不見吏判之意。通于吏堂。黃弼熙往禮曹直房。見執禮書吏曰。額號撰進之意。尙不通于藝文館者。何事云爾則。書吏曰。自禮曹卽地越。送回啓文書。而未及擧行云。此必是該館下人之過。非禮曹不謹之責云。
二十七日。
黃瑗黃道源來。疏首與黃弼熙泮村。尋訪知舊而來。
二十八日。
河學浩李重祖黃瑗黃道源鄭章簡金始全孫潤慶權文度姜世鷹鄭基煥。來訪。當平黃時懋黃處長送其胤兄弟。袖書來問。
二十九日。
坡州黃宅文來。朝前。藝文館書吏以書院額號望納事。方往藝文堂上家而歷路。來見而去。
三十日。
孫潤慶黃道源來。藝文館書吏持。額號望記及書寫官望納規例而來。資憲大夫行龍驤衛副司直兼知經筵事藝文館提學臣李秉模製進。慶尙道尙州牧。翼成公黃喜書院宣額號。望玉洞德峯道溪。啓。乾隆五十四年正月三十日。落點玉洞。藝文館望納。慶尙道尙州牧。翼成公黃喜書院宣額號。書寫官望行副司直尹行元。啓。乾隆五十四年正月三十日。
二月初一日。
監察黃道源來。
初二日。
黃巖老作隨計之行。得見各處平信。可幸。以書院請額後。復戶位田受出事書呈文。使黃弼熙呈禮曹。呈文曰。慶尙道玉洞書院。儒生趙奎鎭柳鳳祚等。謹齊沐再拜。上書于大宗伯閤下。伏以賜額書院例。有給復之規。載在法典。故前後蒙額之諸院。皆得受出。今此玉洞書院。卽有宣額賜祭之恩典。則復戶之依例劃給。自是次第擧行之事。伏願自貴曺移文戶曹。行關本道。俾卽受出之地幸甚。題辭曰。旣是法典所載。移文戶曹。行關本道事。行關曰。禮曹爲相考事節呈。慶尙道尙州玉洞書院。儒生趙奎鎭等呈單內。今此本院旣蒙宣額之恩是如乎。位田三結。依法典劃給之意。發關本道事。呈單是置有亦。呈單內辭意相考。依法典劃給爲乎矣。到付日時。爲先回移宜當向事云云。移文戶曹上同。戶曹行關曰。戶曹爲相考事節。到付關內。節該尙州玉洞書院位田三結。依法典劃給事。賜祭書院。旣稅三結。雖載法典。此非民給。旣稅劃給之謂。以本院物力。買得土地。而自本道相考文記。狀聞啓下後。亦自本曺覆啓免稅。自是法例是如乎。以此知委本院宜當事。守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爲到付事。尙州玉洞書院。位田依法典劃給事。關子到付事。是日黃學洙黃祕洙黃道源來。
初三日。
朝前。黃得中黃秘洙來。禮曹書吏持呈文題辭及慶尙監營行關來。宋思仁以自家先事來到。仍與同舍。稍慰客懷。黃學洙來。貞洞承旨前不可無一番謝儀。故略備三種物。裁書送人。生洞別檢家。又備三種物。裁書送人。兩處答書俱來。尙州趙聖然以隨計之行來訪。黃夏鎭自本家還。
四日。
黃翼鎭來。
五日。
尙州趙卞然計偕來訪。河學浩來訪。趙奎鎭黃聖休訪宋別檢益魯。轉向貞洞承旨家。謝前日捧疏事而來。前日所送京伻。自本院還來。四先生實錄精書而來。延額日子。又以四月初一日定。送各處書簡俱來。但下去路資元無所送。京中債路。亦無可得處。以此了事後。累日留連。可悶。
初六日。
黃弼熙與黃監察有相議事。往健元陵直所。孫潤慶韓海益。來訪。
初七日。
黃弼熙自陵所還。黃巖老河學浩。來訪。
初八日。
是日翼成公忌日。黃聖休黃弼熙黃夏鎭丕擬進參矣。黃道源家有産故。不得行祀將進參而未果。日晩黃道源使小婢持酒及油蜜果而來。甚是鄕曲所未嘗之物也。黃學洙來。
初九日。
李重祚金始全。來訪。全始玉全承德叔侄。以向來四先生事蹟收錄事。有所考見而上來云。
十日。
疏首欲發行還鄕。而拘於路資。可悶。
十一日。
黃弼熙因北道求仕人。得債錢十三兩。若雇人貰馬。則無餘資。適李瑛徐撛羑。以尙州應講儒生上京。還送奴馬。故約日借乘計。李重祖金始全孫潤慶別檢文度姜正言世鷹。爲別疏首而來。
十二日。
疏首與黃聖休。朝前發行。黃弼熙以延額時酬應事留京。可悵。▣行。黃得中黃學洙持錢一百五十文而來別。黃長鬐翼振父子。亦來別。
十三日。
黃弼熙獨留京。入泮村以爲消日之計。大駕幸高陽洪州坡▣地。輦路過翼成公墓所。自上親製祭文。使近侍致祭。又曰。揭揭翼成。咎夔者匹。玉戚朱絃。有煌黼黻。泰山不動。功利及民。何處得來。展如之人。輦路西出。云過墓門。靈其顧歆。我酒崇撙。致祭前承旨金履正。大祝察訪金龍見
十四日。
黃夏鎭黃弼熙板井。▣▣▣▣弼熙往見黃巖老於泮中而來。
十六日。
會試開場。黃弼熙▣▣▣▣。
十七日。
十八日。
黃弼熙連在板井洞
十九日。
卽會試發榜日也。爲▣▣巖老黃磻老兄弟及道內知舊榜。入泮村日未暮。黃磻老榜奴來。可幸。而其仲見屈。可歎。
二十日。
二十一日。
二十二日。
黃弼熙連在板井。以位田事▣▣戶曹直方。
二十三日。
黃弼熙往戶曹直方。袖位田關文而來[關文及本道回移見上]。
▣十四日。
黃弼熙板井洞黃道源監察瑗來。
二十五日。
黃弼熙爲觀▣望試。初更量入場。入場時。自上分付通化宣仁弘化。東西挾門四門洞開。科儒入門。無顚覆之患。此誠近古所無之事也。
二十六日。
上以榜中無鄕儒之參。榜設三日。製於翌日。
二十七日。
二十八日。
二十九日。
黃巖老兄弟下去云。故黃弼熙修鄕書付之。延額日子隔在一月。而嶺營狀文不未。可怪。宋思仁全始玉全升德。下鄕。
三月一日。
二日。
三日。
黃弼熙連在板井洞
四日。
黃弼熙往禮曹直方。小間嶺營關文來。關文曰。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節。到付曺關內用良。道內尙州玉洞。翼成公書院宣額日子探問。本院指的牒報之意。知委該▣是如乎。以來四月初一日擇定是如爲有去乎。詳考施行向事。禮曹書吏▣復啓。則該曹多事無暇。連額日子甚遠。數日後當覆啓云。
五▣▣▣。
黃弼熙泮村知舊。暮還。
七日。
黃弼熙往禮曹直方禮。曹書吏▣▣▣▣▣。草啓曰。曺節。到付慶尙監司關粘連。尙州牧使牒呈內▣▣▣▣▣▣。書院宣額致祭祗受日子。以來四月初一日。推擇云。祭物▣▣▣▣▣▣▣差定進排事。知委擧行何如▣▣。啓曰。依允。
八日。
黃弼▣▣▣▣▣▣▣▣。出示本曺令本道。進排致祭官。請執事關文。關曰。禮▣▣▣▣▣▣▣▣▣▣▣單子節。到付。慶尙監司關粘連尙州牧使▣▣▣▣▣▣▣▣▣▣院宣額致祭祗受日子。以來四月初一日。▣▣▣▣▣▣▣▣▣本道差定進排事知委擧行何如。啓依所▣▣▣▣▣▣▣▣▣▣爲有置。啓下內辭意。奉審施行爲乎矣。到付▣▣▣▣▣▣▣▣▣▣日。
十日。
十一日。
十二日。
十三日。
十四日。
十五日。
十六日。
十七日
黃弼熙連▣▣▣▣▣▣▣▣▣▣順金來。索見各處書封。盖以致祭關文尙未到。本▣▣▣▣▣▣▣▣疑慮。呈于嶺伯。受題音而送也。事旣急迫。來奴趂罷▣▣▣▣。
▣十九日。
黃道源來。
二十日。
黃弼熙往禮曹直房。探問致祭官爲誰。及▣▣▣▣。則書吏報曰。政院多事。尙未聞差定何承宣。亦未知何日發行也云。
二十一日。
復往禮曹直房。書吏曰。致祭官今已判府差定兪承旨恒柱。明日辭朝。出宿門外云。
二十二日。
往苧洞俞承旨家。則俞令擁衾而坐。丁台亦在座。觀其症勢。甚不輕。傍觀勸其呈遞。祭官兪令曰。上意命我必行。我欲一去中山。與黃泰熙穩討。而▣雖中◆添病。今行斷不可已。丁台曰。今意如此。則不可尼之。而觀病勢。明日辭▣▣▣。兪令曰。此則然矣。午後更聞。則病勢猝重。方用參劑。明如呈遞云。
二十▣▣▣▣乃勢轉劇。上疏蒙遞。韓晩裕代出。朝食後。黃弼熙黃夏鎭同▣▣▣▣▣▣▣▣令。欣然迎接曰。卽入政院。明如發行云。午後更往。則以政院▣▣▣▣▣▣▣▣▣▣。承旨天衡代出。黃弼熙黃夏鎭。因往安洞朴令家。▣▣▣▣▣▣▣▣▣▣後初命。方使政院稟啓。命下後。可以決矣。俄而叙命▣▣▣▣▣▣▣▣▣▣▣朴令奉香祝。出宿于東門外。是日威儀甚盛◆傍▣▣▣▣▣▣▣▣▣▣▣載報。債錢一百五十兩而來。因收刷京債。可幸。
二十四日。
▣▣▣▣▣▣▣▣▣▣▣。黃弼熙請黃進士冕源裁書送于成永。兩邑卽招▣▣。▣▣▣▣▣▣▣▣▣▣▣▣▣▣▣▣▣▣▣▣▣▣▣[疏首▣▣▣▣▣▣]▣▣▣▣▣▣▣▣▣▣▣▣▣▣▣▣▣▣▣▣▣▣▣▣▣▣▣▣▣▣▣▣▣▣矣▣▣▣▣▣▣▣▣▣▣▣▣▣▣▣▣▣▣▣▣▣▣▣▣▣▣▣▣▣▣▣▣▣▣▣▣▣▣▣▣▣▣▣▣▣▣▣▣▣▣▣▣▣▣▣▣▣▣因士賚兄委枉。謹審僉兄有事▣▣▣▣▣▣▣▣▣▣▣▣▣▣▣▣▣▣▣▣▣▣▣留年未遑之事。倡發於今日。甚盛。▣始▣▣▣▣▣▣▣▣▣▣。勉旃以副吾儕之望如何。第作客他鄕于今朔矣。▣▣▣▣▣▣▣而民謠土俗不幷。以南疎拙生手無望。剛制然截奈何。覺稚▣▣▣▣▣勤敎而事不如意。只以如于物奉塞。殊失專信之意。歉悚曷極自所邇。有▣▣▣▣不備。南艸二斤錢文五兩伴呈。以爲一時會語之資如何。▣▣▣▣▣▣▣▣理義浩答疏首書。▣▣▣▣▣▣▣▣▣▣▣▣▣▣▣▣▣▣▣▣▣▣▣▣痬一向彌留。身亦患▣▣▣▣▣▣僕僕而旅寓多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