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부터 1933년까지 작성된 비안향교의 〈준분록〉으로 향교에서 거행된 각종 제례에 참석한 인원을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庚申(1920)년부터 癸酉(1933)년까지 작성된 비안향교 〈駿奔錄〉이다. 준분록은 향교에서 거행된 각종 祭禮에 참석한 인원에 대한 일종의 명부로 당시 제례에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제례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官職 또는 향교에서의 職任 등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작성되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안향교 인명관련 자료로서 당시의 의성군 비안향교의 인적 구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본 문서에 기록된 이들의 면면을 통해서 당시 비안향교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누구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丁卯(1927)년의 初獻官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郡守로 임명되어 경상북도 의성군에 부임한 朴濟輪으로 1930년 4월까지 의성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몇 차례 비안향교 향사 시에 初獻官으로 참석하고 있어 작성연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1886(고종 23)년 12월에 태어난 박제륜은 1910(융희 4)년 경상북도 청하군 주사로 시작하여 1940년까지 군서기, 屬, 군수 등을 거치면서 일제로부터 각종 상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동조, 협조 하는 등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친일파이다.
향교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문란상을 보여, 그 이후 시대가 내려올수록 심화되었다.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이념과 지배계층의 신분적 특권이 향촌사회를 지배, 통제하는 한 외부로 표출되어 견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체제안정을 위한 名分敎化機構로서의 향교는 체제를 그 기저에서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士族은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향반을 유지하면서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력이 해이해지면서 수령과 결탁됨으로서 특권세력으로서의 지위를 향촌사회에서 구축하였다. 이것은 사족으로서 자신과 그들이 속한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교의 고유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향교는 존속할 수 있었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일제의 전반적인 식민지 강화정책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유린하였다. 이미 통감부를 통해 한국의 교육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던 일제는 병합과 함께 전반적인 식민지 강화정책을 실행하면서 식민지 교육정책의 목표도 同化政策에 두고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의 말살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교육방침은 朝鮮敎育令(勅令 第229號, 1911. 8. 23)에서 완전히 규정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교육정책은 개항이후 근대조선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던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 國學으로서의 유교의 地位를 일개 敎化團體로서 처리하고 말았다. 동시에 유교적 지도이념의 상징 내지 그 중심기관으로서 成均館과 향교를 구시대의 상징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즉 근대조선의 변혁과정에서 명분으로나마 명맥을 지켜오던 교육적 기능을 박탈하고 단지 先賢을 奉仕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비안향교에서 작성된 〈준분록〉도 단지 그러한 분위기에서 작성된 것이다.
1911년 6월 발표된 經學院規定으로 동년 9월 성균관은 450여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성균관은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을 겸한 관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경학원규정에 의해서 학교교육의 측면은 조선교육령에 따르고, 경학원이라는 이름하에 사회교육기관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에 대한 지방기관으로서 향교도 경학원의 통제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으며, 총독의 추천에 의해 각도에서 학식과 德望이 있는 유림으로 대제학 1인, 부제학 2인, 祭酒 5인, 司成 및 直員 약간명을 두고 제향과 원무를 처리하였다. 그 통제 하에 있는 향교도 종래 향교직원에서 문묘직원이라는 칭호로 변경되어 府尹이나 군수의 지휘를 받아 향사와 문묘수직, 그리고 庶務를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 문서에는 헌관과 직임 등에 따라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초헌관이 총독부가 임명한 군수였던 경우에도 문서 자체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총독부시정연보에 수록된 위와 같은 편제에 따른 구분에 관한 기록으로 작성되지는 않았다.
경학원은 춘추 2회에 釋奠을 거행하였다고 하는데 본 준분록에 나타나는 바와 같다. 2월과 8월에 석전을 거행하였으나, 유지비에 관한 기록은 별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각 지방 향교의 경우처럼 하사금 25만원을 할당 받아 제향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댓가는 향교 재산을 넘겨주는 엄청난 것이었다.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명분상으로나마 가지고 있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자료적 가치
〈준분록〉은 향교에서 거행된 祭禮에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官職 또는 향교에서의 職任을 기재하는 일종의 명부로 향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 더불어 先賢에 대한 祭享 기능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사족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장악력이 저하되는 과정에서도 향교는 사족들의 공론 형성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고 식민지 교육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상실해 간다. 본 문서는 일제 강점기 시기의 1920년~1930년대에 비안향교에서 거행되던 향사에 참여한 인물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당시 구성원들의 직임을 통해서 향사의 추이 등을 살펴볼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