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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1933년까지 비안향교(比安鄕校) 준분록(駿奔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920.4773-20170630.Y173250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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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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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비안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작성시기 1920
형태사항 크기: 21 X 22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의성 비안향교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안내정보

경신(1920)년부터 계유(1933)년까지 작성된 비안향교 〈준분록〉이다. 준분록은 향교에서 거행된 각종 제례에 참석한 인원에 대한 일종의 명부로 당시 제례에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제례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관직 또는 향교에서의 직임 등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작성되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안향교 인명관련 자료로서 당시의 의성군 비안향교의 인적 구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본 문서에 기록된 이들의 면면을 통해서 당시 비안향교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누구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정묘(1927)년의 초헌관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군수로 임명되어 경상북도 의성군에 부임한 박제륜으로 1930년 4월까지 의성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몇 차례 비안향교 향사 시에 초헌관으로 참석하고 있어 작성연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작성된 비안향교의 〈준분록〉으로 향교에서 거행된 각종 제례에 참석한 인원을 기록한 명부
자료의 내용
庚申(1920)년부터 癸酉(1933)년까지 작성된 비안향교 〈駿奔錄〉이다. 준분록은 향교에서 거행된 각종 祭禮에 참석한 인원에 대한 일종의 명부로 당시 제례에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제례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官職 또는 향교에서의 職任 등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작성되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안향교 인명관련 자료로서 당시의 의성군 비안향교의 인적 구성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본 문서에 기록된 이들의 면면을 통해서 당시 비안향교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누구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丁卯(1927)년의 初獻官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郡守로 임명되어 경상북도 의성군에 부임한 朴濟輪으로 1930년 4월까지 의성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몇 차례 비안향교 향사 시에 初獻官으로 참석하고 있어 작성연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1886(고종 23)년 12월에 태어난 박제륜1910(융희 4)년 경상북도 청하군 주사로 시작하여 1940년까지 군서기, 屬, 군수 등을 거치면서 일제로부터 각종 상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동조, 협조 하는 등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친일파이다.
향교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문란상을 보여, 그 이후 시대가 내려올수록 심화되었다.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이념과 지배계층의 신분적 특권이 향촌사회를 지배, 통제하는 한 외부로 표출되어 견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체제안정을 위한 名分敎化機構로서의 향교는 체제를 그 기저에서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士族은 향촌사회에서 통제력과 지도적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향반을 유지하면서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향촌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력이 해이해지면서 수령과 결탁됨으로서 특권세력으로서의 지위를 향촌사회에서 구축하였다. 이것은 사족으로서 자신과 그들이 속한 가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교의 고유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향교는 존속할 수 있었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일제의 전반적인 식민지 강화정책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유린하였다. 이미 통감부를 통해 한국의 교육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던 일제는 병합과 함께 전반적인 식민지 강화정책을 실행하면서 식민지 교육정책의 목표도 同化政策에 두고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의 말살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교육방침은 朝鮮敎育令(勅令 第229號, 1911. 8. 23)에서 완전히 규정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교육정책은 개항이후 근대조선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던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 國學으로서의 유교의 地位를 일개 敎化團體로서 처리하고 말았다. 동시에 유교적 지도이념의 상징 내지 그 중심기관으로서 成均館과 향교를 구시대의 상징물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즉 근대조선의 변혁과정에서 명분으로나마 명맥을 지켜오던 교육적 기능을 박탈하고 단지 先賢을 奉仕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비안향교에서 작성된 〈준분록〉도 단지 그러한 분위기에서 작성된 것이다.
1911년 6월 발표된 經學院規定으로 동년 9월 성균관은 450여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성균관은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을 겸한 관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경학원규정에 의해서 학교교육의 측면은 조선교육령에 따르고, 경학원이라는 이름하에 사회교육기관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에 대한 지방기관으로서 향교도 경학원의 통제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으며, 총독의 추천에 의해 각도에서 학식과 德望이 있는 유림으로 대제학 1인, 부제학 2인, 祭酒 5인, 司成 및 直員 약간명을 두고 제향과 원무를 처리하였다. 그 통제 하에 있는 향교도 종래 향교직원에서 문묘직원이라는 칭호로 변경되어 府尹이나 군수의 지휘를 받아 향사와 문묘수직, 그리고 庶務를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 문서에는 헌관과 직임 등에 따라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초헌관이 총독부가 임명한 군수였던 경우에도 문서 자체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총독부시정연보에 수록된 위와 같은 편제에 따른 구분에 관한 기록으로 작성되지는 않았다.
경학원은 춘추 2회에 釋奠을 거행하였다고 하는데 본 준분록에 나타나는 바와 같다. 2월과 8월에 석전을 거행하였으나, 유지비에 관한 기록은 별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각 지방 향교의 경우처럼 하사금 25만원을 할당 받아 제향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댓가는 향교 재산을 넘겨주는 엄청난 것이었다.
본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서는 명분상으로나마 가지고 있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자료적 가치
〈준분록〉은 향교에서 거행된 祭禮에 참석한 인원의 성명과 함께 당시 역임하고 있었던 官職 또는 향교에서의 職任을 기재하는 일종의 명부로 향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 더불어 先賢에 대한 祭享 기능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사족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장악력이 저하되는 과정에서도 향교는 사족들의 공론 형성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고 식민지 교육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상실해 간다. 본 문서는 일제 강점기 시기의 1920년~1930년대에 비안향교에서 거행되던 향사에 참여한 인물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당시 구성원들의 직임을 통해서 향사의 추이 등을 살펴볼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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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官 朴寅祐
金鎭九
禹馨植
李德坤
李容泰
執禮 卞弘默
大祝 朴周鳳
陳設 李萬寧
謁者 金錫河
鄭弼欽
朴大哲
權在旭
金炳華
孫載坤
林士鎭
金光植
金濟用
禹容九
朴稷相
李泰雨
金信濟
庚申八月五日
掌議 張在寬
金甲洙
辛酉二月初六日
獻官 張奎燮
金德根
禹漢植
金學祖
卞翯秀
執禮 李鍾祐
大祝 鄭道欽
陳設 丁大喆
張台胤
謁者 李萬寧
朴道鳳
金鎭杓
金亨鎭
成大尹
李琪景
金達權
崔丙基
孫永祐
裵景稷
李化雨
金洛紀
金榮九
禹中煥
張允鎬
掌議 康基德
禹熙穆

辛酉八月初十日
獻官 張奎燮
朴斗老
禹昌植
權以燦
李老瞻
執禮 卞弘默
大祝 辛鶴洙
李鍾祐
金祥奎
孫性仁
李元昊
柳汶佑
鄭弼欽
金基遠
金海鎭
金聲培
權重華
金河一
金文起
金祖顯
李茂說
金正明
姜錫熙
宋泰善
權泰淳
李時敎
卞章默
金泰填
李載圭
朴秀鳳
金泰潤
李正大
掌議 康基德
掌議 禹熙穆
癸亥二月九日
駿奔錄
初獻官 金汝霖
亞獻官 金漢斗
終獻官 朴益祐
分獻官 張光勳
鄭基鎬
執禮 李鍾萬
大祝 金柱天
辛相殷
卞弘默
張在寬
金柱河
朴宗鳳
李義錫
權鍾奭
金時旭
朴基根
禹中煥
李春雨
裵舜稷
康基遠
掌議 康基德

癸亥八月一日
駿奔錄
初獻官 李周業
亞獻官 張璣煥
終獻官 朴容春
分獻官 金永鎭
金炳亮
執禮 卞柱燮
大祝 辛鶴洙
陳設 鄭道欽
謁者 禹敎性
贊引 金逸相
東唱 禹熙燮
朴孝順
金秉龍
金東鳳
康基德
金鍾洛
金祥奎
丁柄燮
黃斗鎭
金道權
尹起瀅
金時顯

甲子二月四日
駿奔錄
初獻官 幼學 張台胤
亞獻官 李容泰
終獻官 金重坤
分獻官 金鍾洪
禹鍾植
執禮 卞顯純
大祝 朴起鎬
金斗相
辛相殷
鄭弼欽
李基兌
安孝三
朴宗鳳
金濟弘
權泰淳
李觀植
金海起
金商機
康萬鎭
孫炳國
金兌卿

甲子八月初七日
駿奔錄
初獻官 直員 張台胤
亞獻官 幼學 朴孝淳
終獻官 卞祐燮
分獻官 鄭基範
金學澈
脯有司 張在寬
執禮 金益祖
大祝 禹敎性
陳設 姜錫圭
丁柄燮
謁者 朴來寧
權禧相
贊引 金亨河
朴益權
朴基根
禹容九
康在秀
李龍雨
金鍾洛
金昌燮
金東華
禹允煥
張洛圭
掌議 李鍾萬
李善會
乙丑二月十日
駿奔錄
乙丑二月十日
初獻官 直員 張台胤
亞獻官 幼學 金在衡
終獻官 金炳亮
分獻官 禹秉謨
李鎭畿
祭物有司 李鎭畿
執禮 卞璣秀
大祝 李鍾澈
陳設 孫聖鎬
謁者 鄭漢斗
金亨河
贊引 張文秀
朴宗鳳
金鍾大
康萬鎭
金慶鎭
權泰佑
金昌榮
崔鍾夏
李章雨
金永謨
金大年
金鍾洛
金星吉
姜信祚
李春雨
掌議 李鍾萬
李善會
乙丑八月日
初獻官 直員 張台胤
亞獻官 幼學 李老瞻
終獻官 朴琦相
分獻官 禹成植
卞道秀
執禮 金載鑪
大祝 辛鶴洙
陳設 金祥奎
金達權
金時泰
金孝源
金範九
李尙雨
金斗鎭
安鍾泰
林雨相
丁大亨
金鎭杓
掌議 鄭道欽
李鎭畿
金錫河
丙寅二月日
初獻官 張光悌
亞獻官 卞喆來
終獻官 金汝殷
分獻官 朴甲一
李鍾浩
執禮 李正大
大祝 朴潤九
陳設 安孝濂
朴文哲
權在七
金顯振
謁者 李永春
贊引 金泰填
金泰潤
東唱 金聲台
金淵浩
西唱 金在錫
禹載奎
奉香 禹乙東
鄭聖基
奉爐 崔定洙
金龍濟
掌牲 李光昊
司尊 金淇元
洗爵 金悳坤
奉爵 李鍾八
奠爵 金大經
盥洗位 朴皓鳳
掌議 鄭道欽
李鎭畿
金錫河
丙寅八月日
初獻官 直員 張台胤
亞獻官 幼學 朴容澤
終獻官 李運斗
分獻官 禹熙敬
李鍾祐
執禮 金麟洙
大祝 金逸相
陳設 張九壽
辛相漢
謁者 李基兌
贊引 金龍鎭
朴來寧
東唱 金尙鎭
西唱 吉泰錫
奉香 李承晃
奉爐 康基遠
掌牲 宋炳善
掌饌 權五疇
司尊 安瓊玉
洗爵 金定基
奉爵 金永謨
奠爵 宋君顯
盥洗 崔柱胤
滌器 金錫河
掌議 鄭道欽
金錫河
丁卯二月日
初獻官 直員 張台胤
亞獻官 主事 卞翯秀
終獻官 幼學 李鎭春
分獻官 金堡鎭
朴周鳳
執禮 朴孝寅
大祝 金起漢
金聲培
陳設 金祥奎
金商道
脯有司 張在寬
謁者 金容範
金鎭沃
贊引 權以恒
張顯武
金炳華
權泰淳
金時泰
禹周聲
金兌卿
安敎植
李夏錫
姜信祚
李相臣
權泰仁
朴道希
李東淑
掌議 鄭道欽
金斗鎭
金錫河

丁卯八月初五日
駿奔錄
初獻官 郡守 朴濟輪
亞獻官 幼學 禹昌植
李老瞻
李秉鎬
金在衡
執禮 卞箕東
朴繼魯
大祝 李鍾穆
陳設 裵永祚
金汝祚
謁者 金達河
贊引 金泰鉉
李鍾和
金燦周
張瀅植
金在熙
鄭演基
林在琥
林士鎭
金壽錫
李時泰
脯有司 張正夏
掌議 鄭道欽
金斗鎭
李春雨

戊辰二月初七日
駿奔錄
初獻官 直員 鄭道欽
亞獻官 幼學 張守道
終獻官 卞道秀
分獻官 朴容春
金基浩
脯有司 張在寬
執禮 金鍾一
大祝 李時華
陳設 金國鎭
謁者 金起漢
朴炳洪
金定坤
贊引 趙承穆
禹周聲
東唱 辛在洙
西唱 康萬鎭
奉香 林光洙
崔晟基
奉爐 李萬基
李九龍
掌牲 金南錫
掌饌 尹永圭
李孟哲
司尊 金厚坤
洗爵 金泰鎭
金■■
奉爵 孫有秀
奠爵 朴斗大
掌議 金斗鎭
李正大
鄭漢杓

戊辰八月初一日
駿奔錄
初獻官 鄭道欽
亞獻官 張泰鎭
終獻官 金學信
分獻官 朴孝大
李甲奎
執禮 禹熙遠
大祝 朴漢根
陳設 金範九
金鶴相
謁者 朴舜九
卞在萬
孫載坤
贊引 權禧相
張甲壽
東唱 丁基燮
西唱 金昌壎
奉香 金時玉
奉爐 趙命遠
金鍾洛
掌牲 鄭南圭
掌饌 李相龍
司尊 李南奎
洗爵 鄭元坤
奉爵 金永植
金鎭河
掌議 金斗鎭
李正大

己巳二月初三日
駿奔錄
初獻官 鄭道欽
亞獻官 禹贊植
終獻官 張洛基
分獻官 卞周燮
李鍾鳳
執禮 金起淳
大祝 金基弘
陳設 朴始東
金鍾洙
李熙洛
謁者 權重標
張慶胤
朴秀鳳
贊引 康基遠
李英輔
東唱 卞章然
西唱 金舜卿
奉香 金淵龜
奉爐 金厚坤
張璟胤
掌牲 禹永基
掌饌 金在鵬
司尊 金基權
洗爵 李相善
奉爵 李■說
奠爵 金斗鎭
盥洗位 李正大

己巳八月日
駿奔錄
初獻官 郡守 朴濟輪
亞獻官 幼學 康周燮
終獻官 朴岐鳳
分獻官 李鎭遠
金鍾云
執禮 卞彰燮
大祝 朴潤華
陳設 金道榮
謁者 張世鎬
金泰潤
金輝大
贊引 權鍾奭
禹復性
東唱 安文煥
西唱 金造濟
奉香 安命遠
奉爐 金鼎漢
掌牲 李洪宰
掌饌 金振河
司尊 金龍河
洗爵 李東奐
奉爵 金源河
奠爵 權赫泰
直員 鄭道欽
掌議 金斗鎭
張守榮
李正大

庚午二月日
初獻官 鄭道欽
亞獻官 禹夏植
終獻官 金基魯
分獻官 卞弘默
金達鎭
執禮 朴濟東
大祝 李時華
陳設 張芝秀
卞洪燮
金竝洙
謁者 朴炳華
金孝源
李永春
贊引 李丙泰
金淳河
東唱 張在河
西唱 趙鏞潤
奉香 鄭舜基
奉爐 金萬圭
掌牲 金永模
掌饌 金宗會
司尊 李九鉉
金龜年
尹起瀅
洗爵 李基兌
奉爵 崔斗洙
申彦洙
李禹錫
金永根
奠爵 裵在煥
李春基
盥洗位 李元雨
金鍾洛
滌器 鄭漢宗
鄭漢燮
黃元鎭
掌議 金斗鎭
張守榮
李正大

庚午八月三日
獻官 直員 卞弘默
朴鴻九
張洛基
李鍾華
金河鎭
執禮 金甲洙
大祝 禹疇根
陳設 金鍾洙
金禹相
謁者 禹敎性
贊引 鄭忠欽
金濟完
金輝郁
金羲錫
金一鎭
金賢植
李茂春
金龜鎬
李圭顯
李時泰
康琦鎭
金在玉
金亦濟
掌議 金斗鎭
張守榮
李正大

辛未二月五日
初獻官 郡守 朴濟均
亞獻官 直員 卞弘默
終獻官 張錫胤
分獻官 金胤錫
朴泰東
執禮 禹熙遠
大祝 鄭弼欽
陳設 李尙大
謁者 金海鎭
孫鼎鎬
康萬鎭
贊引 權禧相
朴厦郁
朴炳直
張武秀
卞在璇
金相■
金琦河
梁守英
辛德洙
梁熙榮
金東碩
金淵龜
掌議 金鍾洙
金禹相

初獻官 禹熙敬
亞獻官 姜華馨
終獻官 金炳亮
分獻官 金商道
安奎玄
執禮 張在寬
大祝 朴炳衍
陳設 卞在鳳
朴文國
辛未八月八日
駿奔錄
張箕鎭
謁者 鄭漢斗
權在七
金時泰
朴韶欽
金南喆
金洪鎭
南相璇
李龍雨
金濟春
金燦雨
尹永圭
朴喜龍
金在億
禹載奎
金昶斗
崔雲鶴
徐相弼
黃元鎭
掌議 康羲燮
金鍾洙
金禹相

壬申二月一日
駿奔錄
壬申春享
獻官 禹熙敬
金在衡
李和坤
金溶夏
朴周鳳
執禮 張基五
大祝 李永春
陳設 李茂說
宋炳善
張洛鎭
鄭元坤
金濟完
金直容
姜錫重
金大根
李觀洙
李章雨
裵哲煥
李殷炯
鄭南鎭
掌議 卞在鳳
朴濟東
權泰淵

壬申秋享
初獻官 禹熙敬
亞獻官 金瀅培
終獻官 鄭基範
分獻官 金基浩
分獻官 張在斗
執禮 朴孝秀
大祝 李鍾洙
朴舜九
康道鎭
金致九
李觀洙
朴益權
李茂春
張世胤
李基雨
李牧鉉
金洪培
掌議 權泰淵
金泰潤
癸酉二月初七日
駿奔錄
初獻官 金炳亮
亞獻官 卞武燮
終獻官 朴孝淳
分獻官 禹鎬東
李元昊
執禮 金麟洙
大祝 李正大
陳設 金鶴相
李龍奎
謁者 鄭忠欽
崔鍾斗
贊引 金濟完
康在秀
司尊 李昌潤
奉香 朴炳稷
奉爐 金道煥
奠爵 朴魯允
掌牲 權大燮
掌饌 辛甲洙
爵洗位 金再鳳
盥洗位 張斗煥
滌器 朴能大
金達權
掌議 張斗煥
金達權
朴能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