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1857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바로 심원록은 서원 방문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심원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戊子 5월 26일부터 丁巳 5월까지 작성된 것이다. 자료의 작성연대는 첫 번째 입록자인 吳致成은 상주목사로 1828년(순조 28) 1월부터 1832년(순조 32) 1월까지 역임했기 때문에 그가 옥동서원을 방문한 무자년은 재임 중인 1828년이다. 그래서 본 심원록의 연대는 1828년부터 1857년(철종 8)까지 30년간 서원을 방문한 94명의 명단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동행자 기록은 일부 나타나지만 방문 소회를 담은 詩나 방문자 문집 내 기행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이며, 소·대과 합격 후 관행에 따라 서원을 방문한 인사 즉 帶恩한 9명도 확인이 된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인원과 성관을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長水 黃 각 22명, 晉山 姜氏 5명, 管城 全·豊壤 趙氏 각 4명, 高靈 申·善山 金氏 각 3명, 慶州 金·固城 李·光山 金·南陽 洪·宣城 李·順天 金·安東 權·安東 金·礪山 宋·沃川 全·全州 柳·全州 李·晉陽 鄭·昌原 黃·海州 吳·興陽 李氏 각 2명, 甘泉 文·光陵 李·唐城 洪·密陽 朴·缶林 洪·商山 金·西原 李·星山 裴·星山 李·安定 羅·冶城 宋·永山 金·烏川 鄭·龍潭 金·龍潭 韓·一善 金·竹山 安·靑松 沈·坡平 尹·豊山 柳·韓山 李氏 각 1명 순이다. 43개의 성관 중 황희의 후손인 장수황씨 가문의 비율이 상당이 높으며 진산강씨·관성전씨·풍양조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는 상주가 절대적이며 金山·밀양·榮州 등이다.
이중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표점을 찍어 구분했는데 모두 13명이다. 이들은 모두 소·대과에 합격했고, 주로 상주 내지 인근에 거주하는 인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1848년(헌종 14) 상주 공성면에 세거하는 여산 송씨 가문의 宋奎弼과 宋台霖이 주목된다. 먼저 전자는 字는 文徵이고, 호는 南皐로 1780년(정조 4) 출생하였다. 18세기 상주지역을 대표하던 立齋 鄭宗魯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1814년(순조 14) 식년시 병과 11위로 급제한 후 承文院副正子·著作·博士·太常寺直長·宗簿寺主簿·典籍·監察·持平·連原道察訪 등을 거친 뒤 낙향하여 棣華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향약을 제정하였다. 후자는 字는 壽汝로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注書·長寧殿別檢·成均館典籍·兵曹佐郞·正言·持平·吏曹正郎·梁山郡守·敦寧都正 등 내외직을 역임했다. 특히 1840년(헌종 6) 부임한 양산군수 재직 당시 三政에 대한 善政을 펼친 덕분에 이임 10년 후 송덕비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양자 모두 관직에서 퇴임 후 고향인 옥동서원을 방문했던 것이다.
18세기 말 이래 다양한 가문들이 옥동서원 원임직에 참여하게 된 것은 1789년(정조 13)의 사액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액이 된 이후 경주의 옥산·서악·용산서원과 같이 옥동서원은 상주목의 서부지역을, 도남서원은 동부지역을, 흥암서원은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은 분명했지만 여전히 상주 사림 이외의 옥동서원에 대한 출입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에도 지방관 방문을 비롯해 대소과 합격자 등의 방문에서 보듯 사액 후 지역 내 위상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옥동서원은 당색이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남인계 서원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심원록 분석은 그 서원의 위상을 반영하는 일정한 窓이 될 수 있는데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사액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파악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