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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1825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816.4725-20170630.Y175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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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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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시도기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심원록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작성시기 1816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9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1816년~1825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작성연대는 1816년(순조 16) 5월부터 1825년(순조 25) 정월까지 10년간 서원을 방문한 50명의 명단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동행자, 방문 소회를 담은 詩나 방문자 문집 내 기행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이며, 숙박한 사실도 확인 된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50명의 인원과 29개의 성관이 출입하였다. 29개의 성관 중 상주·상산김씨 가문의 비율이 높으며 밀성박씨·의성김씨·선산김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자료 내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표점을 찍어 구분했는데 그중 金益耜이 바로 방문 비율이 가장 높은 상산김씨 출신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는 상주를 비롯한 保寧·沃川·善山·仁同 등 인근 고을 인물들이다. 또한 옥동서원은 당색이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남인계 서원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16년~1825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바로 심원록은 서원 방문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심원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작성연대는 1816년(순조 16) 5월부터 1825년(순조 25) 정월까지 10년간 서원을 방문한 50명의 명단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동행자, 방문 소회를 담은 詩나 방문자 문집 내 기행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이며, 숙박한 사실도 확인 된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인원과 성관을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尙州 金氏 5명, 密城 朴·商山 金·義城 金·長水 黃·全州 李氏 각 3명, 光山 金·金氏·碧珍 李·驪州 李·平山 申·豐壤 趙氏 각 2명, 高靈 申·南陽 洪·南平 文·星山 呂·星州 李·延安 李·英陽 南·烏川 鄭·宜寧 南·晉山 姜·昌寧 成 ·昌寧 曹·草溪 鄭·豊山 洪·咸陽 朴·華順 崔·檜山 金·興陽 李氏 각 1명 순이다. 29개의 성관 중 상주·상산김씨 가문의 비율이 높으며 밀성박씨·의성김씨·선산김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土姓인 상산김씨는 고려 중기부터 吏族에서 계속 상경종사하여 고려말 金得培, 金先致 형제부터는 중앙에 크게 진출하였다. 형제가 공신에 책봉되어 많은 田地와 노비를 하사받았고, 김선치의 세 아들이 모두 조선조에 사환하여 명문으로 발전했다. 또한 상주 來性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가문이다. 자료 내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표점을 찍어 구분했는데 그중 金益耜이 바로 상산김씨 출신이다. 김익거는 1801년(순조 1) 문과에 합격하여 注書·監察·正言·庇仁縣監·文川郡守 등을 역임했고, 金履安의 문인이며 학덕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 외 1명은 李龍新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는 상주를 비롯한 保寧·沃川·善山·仁同 등 인근 고을 인물들이다. 옥동서원은 1789년(정조 13) 사액 후 다양한 가문들이 옥동서원 원임직에 참여하게 된 사액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액이 된 이후 경주옥산·서악·용산서원과 같이 옥동서원상주목의 서부지역을, 도남서원은 동부지역을, 흥암서원은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주 이외 사림들의 옥동서원에 대한 출입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옥동서원은 당색이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남인계 서원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심원록 분석은 그 서원의 위상을 반영하는 일정한 窓이 될 수 있는데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사액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파악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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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尋院錄 丙子 五月
平山申在一九月秋二十六日
後孫黃浩聖藍浦星洞丁丑三月晦祗謁
外裔宜寧南植正稺固 戊申 五月初三日祗謁
興陽後人李寅培仲賓 癸未 丁丑六月初一日祗 謁
檜山後人金若驥養直 丙戌 丁丑七月二十六日祗 謁
後學商山金益耜八月十四日祗謁奉審
後學昌寧成在斗同日祗 謁 奉審
後學密城朴光馥聞汝
彩雲朴挺圭國瑞
外裔豊壤趙泰和彙吉 丁酉 九月二十九日祗謁
趙保和而大 癸卯
延安後人李顯儒沃川陽月二十日未宿祗謁
南陽後人洪貞萬希元 己未 庚辰正月二十八日祗 謁
星州後人李鉉德儒 庚戌 三月十三日祗 謁
商山後人金載元同日祗 謁
豊山後人洪潤輔三月二十八日祗 謁
義城後人金㼂聖輝 壬子
後學全州李錫衡丙子十二月初八日祗謁
尙州金元鐸
金洙鐸
商山金聲鐸
尙州金鳴鐸
金貞鐸
金載岳丁丑三月十九日祗謁
外裔烏川鄭銈同日祗 謁
晉山後人姜世獻同日祗謁
全州後人李洛夏二十日祗謁
李圭夏
平山申在一丙子 九月二十六日祗謁
星山後人呂文行甲戌 十月初六日祗謁
咸陽後人朴漢亨通老 己卯
昌山後人成之烈沃川同月二十五日來宿祗謁
金珹聲集 壬子
金玉+羲羲瑞 癸丑 八月十六日祗 謁
草溪後人鄭弘猷致弘 癸巳 十一月十九日 祗謁
驪興後人李東馨辛巳十一月十五日祗謁
光山後人金得漢戊寅生 癸未三月十二日祗謁
光山後人金烱郁乙卯生 三月十二日祗謁
驪州李龍新仁同上同
華順崔鶴年
碧珍後人李光峻善山
李馨峻四月十七日來宿祗 謁
高靈後人申敬嵩尙州
英陽後人南柱銀
義城金俊鵬四月十九日祗 謁
南平文鼎垕象三 己酉 同日來宿祗 謁 有馬
義城金玉+羲同日祗 謁
昌寧曹錫恒癸未 九月初四日暮道窮來宿祗 謁
翼成公十四代孫宗仁癸未 十一月十一日祗謁
密陽後人朴仁達乙酉正月二十九日來宿祗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