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년~1825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바로 심원록은 서원 방문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심원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작성연대는 1816년(순조 16) 5월부터 1825년(순조 25) 정월까지 10년간 서원을 방문한 50명의 명단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동행자, 방문 소회를 담은 詩나 방문자 문집 내 기행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이며, 숙박한 사실도 확인 된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인원과 성관을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尙州 金氏 5명, 密城 朴·商山 金·義城 金·長水 黃·全州 李氏 각 3명, 光山 金·金氏·碧珍 李·驪州 李·平山 申·豐壤 趙氏 각 2명, 高靈 申·南陽 洪·南平 文·星山 呂·星州 李·延安 李·英陽 南·烏川 鄭·宜寧 南·晉山 姜·昌寧 成 ·昌寧 曹·草溪 鄭·豊山 洪·咸陽 朴·華順 崔·檜山 金·興陽 李氏 각 1명 순이다.
29개의 성관 중 상주·상산김씨 가문의 비율이 높으며 밀성박씨·의성김씨·선산김씨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土姓인 상산김씨는 고려 중기부터 吏族에서 계속 상경종사하여 고려말 金得培, 金先致 형제부터는 중앙에 크게 진출하였다. 형제가 공신에 책봉되어 많은 田地와 노비를 하사받았고, 김선치의 세 아들이 모두 조선조에 사환하여 명문으로 발전했다. 또한 상주 來性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가문이다. 자료 내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표점을 찍어 구분했는데 그중 金益耜이 바로 상산김씨 출신이다. 김익거는 1801년(순조 1) 문과에 합격하여 注書·監察·正言·庇仁縣監·文川郡守 등을 역임했고, 金履安의 문인이며 학덕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 외 1명은 李龍新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는 상주를 비롯한 保寧·沃川·善山·仁同 등 인근 고을 인물들이다.
옥동서원은 1789년(정조 13) 사액 후 다양한 가문들이 옥동서원 원임직에 참여하게 된 사액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액이 된 이후 경주의 옥산·서악·용산서원과 같이 옥동서원은 상주목의 서부지역을, 도남서원은 동부지역을, 흥암서원은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주 이외 사림들의 옥동서원에 대한 출입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옥동서원은 당색이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남인계 서원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심원록 분석은 그 서원의 위상을 반영하는 일정한 窓이 될 수 있는데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사액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파악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