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은점(銀店) 개설 금지 상소 일기
자료의 내용
禁銀店疏行日記는 함창 사림들이 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관련 상소를 하며 37일 간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다. 상소 이유는 함창향교 대성전의 主山이 되는 宰嶽山 來脈 중 宗山이 되는 銀尺面 黃嶺山 일대에 은을 채광 또는 제련하는 은점 개설하려 하자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상소이다. 이곳 은척 일대는 고려시대 銀尺疏로 유명하고, 후대에서도 銀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銀店 개설지가 바로 황령산 일대로 약 100여전 1670년(현종 11)에도 동일한 일로 함창 사림들의 상소에 의해 왕의 금지 명령이 내려졌던 곳이다.
이 상소 이전에도 5·6년간 순영과 중앙에 6~7회나 은점 개설반대를 呈文하여 개설 반대의 뜻을 전하려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자 상경 상소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함창사림은 疏都廳을 설치 후 제반 사항을 관장하게 하고, 회의 장소는 주로 향교와 향청을 이용하였으며, 상소는 儒林疏로 정하였다. 당시 상소에 동참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함창향교 校長 南必恒·剖席 李齊喬, 鄕廳首席 蔡膺禔·部首席 洪龜洛·李仁玉, 疏都廳 都廳 趙汲·疏首 蔡命五·疏掌議 姜世鼎·李齊白, 鄕員 安宅揆·安宅鼎·南道輐·李齊滂·李齊泰·南道輪·蔡景元·蔡景禹·蔡景魯·蔡景極·蔡景獻·姜必彦·姜必遜·金光緖·郭文鳳·權時哲 등 함창지방 유력 가문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疏首에는 인천채씨 가문의 蔡壽의 8대손 채명오를 필두로 疏掌議는 진주강씨 姜士尙의 7대손 강세정 및 전주이씨 이제백이 담당하여 疏草·兩門通文·山圖를 휴대하고 상경길에 나섰다. 상경노선은 영남대로와 일치하는데 함창현 향청에서 출발하여 雙花店(함창읍 북5리) - 幽谷店(문경시 유곡동) - 新院(문경 마성면) - 草谷(문경 상촌) 桐華院(문경 조경산성) - 高沙里(괴산 연풍면) - 安保(충주 상모면) - 水月店(충주 무두리) - 儉丹店(충주 이류면) - 崇善店(충주 신니면) - 냉천곡(음성) - 石院(이천) - 律村(영인 백암면) - 左棧店(용인 원삼면) - 陽地邑(용인 양지면) - 龍仁邑 - 板橋(성남) - 栗峴店(송파구 율현동) - 麻津 (송파구 삼전도) - 동대문 - 院洞에 총 8일이 걸려 도달했다.
상경 도중 말의 건강, 겨울철 추위 등의 고충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소를 반대하는 銀店主 辛致大 등의 세력의 신변 위협이 난관 있었다. 그래서 문경현감에게 도움을 구해 그의 배려로 將校의 호위 속에 조령을 넘었으며 安保에서는 鑄錢郎廳의 하인이 비변사에 보내는 보고서를 일부로 보이며 상소인들을 임금을 기만한 죄인으로 모는 협박도 이어졌다. 이는 함창 황령산 銀店 개설 명분은 禁衛營에다 鑄錢所를 설치함으로써 비롯되었기 때문에 비변사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은점 개설을 금지 시킬 사람은 임금밖에 없었다.
서울에 도착해 비답을 얻을 때까지 일정과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1월 24일 강세정이 貞洞 참봉 姜必敎를 방문해 상소의 일을 상의했다. 25일 채명오와 이제백이 齋洞의 修撰 金載順(함창현감 金魯의 조카)을 방문, 상소문 초안을 필삭 받은 후 강참봉을 방문해 함창향교의 통문을 楊州趙氏와 晉州姜氏에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참판 趙榮鎭과 戶判 趙雲逵에게 협조를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6일 3인이 領府事 申晩을 방문 협조를 요청하고, 참판 채제공을 방문했으나 사람이 많아 그냥 돌아왔다. 27일 3인이 재차 채제공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으면 동부승지 趙{肅+心}에게 부탁해 상소를 성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상소문을 수정해주었다. 호판 조운규를 어렵게 만나 그들의 선영에도 관계된 일이니 협조를 요청하였다. 다시 조승지를 방문하였으나 퇴궐하지 않고 그의 당숙 趙上舍에게 협조를 요청하니 기꺼이 돕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판서 韓翼謨를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하니 예조판서에게 呈文하라고 하였다. 28일 食前에 채제공에게 편지를 보내 조승지와 판서 李之億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 달라하니 즉답을 보내왔다. 먼저 이지억을 방문해 채제공의 편지를 전달하니 적극 돕게다 하고 왕이 患중이라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을 주었고, 그의 사위인 안동 柳生도 적극 후원해 주었다. 29일 3인이 金修撰을 방문하니 상소문 초안을 여러 곳 수정하고 상소문 서식을 가르쳐주었으며 상소문 용지도 구입해 주었다. 申領府事를 방문하니 적극 후원을 약속했다.
12월 1일 참의 朴聖源을 만나니 상소에 승산이 있다는 격려를 받고 강세정이 참판 南泰會를 방문하니 또 격려해 주었다. 특히 호조판서 조운규를 통하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받았다. 다시 채제공을 방문하여 상소문을 정서할 書吏와 하인을 청하여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2일 조식 전 박참의를 방문하여 상소문 초안을 최종 윤색했고, 채제공이 보내 준 서리로 하여금 상소문을 정서하고 名帖을 쓰다가 해가 저물어 중지하였다. 3일 서리가 와서 명첩을 다 썼다. 이제백이 貞洞의 참판 李得宗과 倉洞의 헌납 李與宗을 만나 상소할 때 적극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오후에 채명오가 판서 洪啓禧를 방문해 협조를 부탁했으나 상소문이 제대로 전달 여부를 염려 하였다.
4일 조식 전 채명오가 車洞의 교리 安杓를 방문해 도승지 金善行에게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식후 채명오와 강세정이 성균관으로 가서 金山 진사 朴柱天과 문경 山陽 진사 蔡耆光을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저녁 3인이 安洞의 영의정 홍봉한을 방문했으나 퇴궐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우의정 金相福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 일은 영의정이 주관자라 그에게 부탁하면 자신도 돕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5일 새벽 일찍 영의정을 방문했으나 이미 입궐해 버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로에 신임 경상도 관찰사 鄭存謙을 방문해 협조를 당부하니 부임 전이라 거절하였다. 채명오와 강세정이 비변사로 가서 영남 담당 서리를 만나 呈文하려 하였더니 시작 전이라 거절당했다. 오후 성균관의 박진사가 통문을 요청하여 함창현 사림 통문을 강세정이 베껴서 보냈다. 6일 3인이 영의정 집으로 가서 입궐하는 홍봉한을 기다려 가마 곁에서 "영남 유생이 성묘 주봉에서 은을 캐려는 변고 있어 와서 기다렸다"고 했으나 응답이 없어 대문 밖까지 따라가며 呈書하는 글을 읽어 달라고 외치자 "비변사에 呈書하라"고 답하고 떠나버렸다. 3인이 대궐문 밖까지 따라가며 呈文하여 했으나 하인배가 막아 쫓겨났다. 식후 성균관 박진사와 채진사가 숙소로 방문하였고, 상소일을 10일로 정하고 상소문 函과 보자기를 貰를 내었다. 7일 조식 전 채명오가 판관 金坦行을 방문해 협조를 부탁하니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강세정이 이지억 대감을 방문했으나 좋은 소식이 없었다. 오후에 3인이 영의정의 종형 洪象漢을 방문해 협조를 당부했으나 예조와 성균관에 呈文하라고 하였다. 8일 조식 전 채명오가 채제공을 방문하여 제 관서의 재상과 대담한 경위를 말하니 비변사·예조·성균관에 정문하는 일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 하여 伏閤하기로 정했다. 오후에 義興 진사 朴光輔가 성균관으로부터 위로차 내방이 있었다. 9일 동구 내 임금행차가 있다기에 3인이 갔으나 행차가 돈화문으로 사라지고 오전에 임금 행차가 있었으나 기회를 잃었다. 10일 柑科 시행으로 상소하지 못하였다. 채명오와 이제백이 김수찬을 방문했더니 풀이 꺾여 있었고, 도승지가 체직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판관을 방문했으나 입궐을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과 면담 중 과객이 와서 이번 상소는 패소할 것이라 하였다. 11일 새벽에 목욕을 재계하고 창경궁 궐문에 나가 상소문을 올린 뒤 興化門에서 비답을 기다렸다. 비변사 하인들이 회유와 협박으로 상소문 내용을 베껴가려 했으나 거절했다. 12일 마침내 비답을 받았다.
함창 사림들의 상소 전략은 남인 채제공과 제반 절차를 협의하에 진행하고자 했다. 이는 疏首 채명오가 채제공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고, 疏掌議 강세정은 채제공의 스승인 姜樸 일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관료보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노론 時派 실세 호조판서 趙雲逵의 선영이 황령산 일대에 분포해 楊州趙氏 가문 역시 은점개설을 반대할 것임을 알고 협조를 얻으려 했다. 상소문은 참봉 姜必敎·참판 蔡濟恭·참의 朴聖源 등 총 5차례의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소의 방법도 자문을 받았다. 특히 상소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비변사가 은점주와 밀착된 상황이라는 각사에 呈文하여 해결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간파한 채제공은 伏閤 상소 하도록 주선하고 친교가 있는 동부승지 趙{肅+心}를 통해 상소를 진달했다. 상소를 읽은 영조는 "오늘 너희가 오린 상소문은 그 본이 聖廟를 위함에 있고, 자못 조리가 있어 그 마음씀이 가상하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 상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근기 남인 채제공의 지원과 협조 덕분이었다. 이는 채제공이 영・정조연간 영남의 인사를 중앙정계 발탁하고 영남 남인의 顯揚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채명오 등은 송시열・송준길 문묘 종사에 연명하는 등 영남 노론계 활동을 전개한 인물임에도 중앙 노론 세력이 아닌 남인 채제공을 통해서 민원을 해결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노정한다. 물론 이 문제가 외척 홍봉한과 연관된 점도 있지만 중앙 노론들이 영남 노론을 인식을 볼 수 있다.
12월 12일 함창 사림이 원하는 비답을 받은 뒤 13일 상소에 힘써준 인사들을 방문하여 사례하였다. 이때 각 관아의 書吏와 旅館下人에게는 관습화된 사례금 액수가 있어 노자가 고갈될 정도로 보답해야했다. 14일 상주로 내려가는 貰馬 3필을 구하여 12월 16일 하향길에 올랐다.
하향길은 종루 - 남대문 - 한강진 - 신원 - 판교 - 영남대로를 택해서 崇善店 - 安保店 - 高沙里 - 동화원·초곡 - 雙花村 - 상주 - 함창에 도착했다.
자료적 가치
禁銀店疏行日記는 함창향교 대성전의 主山이 되는 宰嶽山 來脈 중 宗山이 되는 銀尺面 黃嶺山 일대에 은을 채광 또는 제련하는 은점 개설하려 하자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상소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후기 銀店의 폐해와 영남 향촌 사림들의 상소 과정과 누구를 통해 해결해 나아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禁銀店疏行日記 硏究」『尙州文化硏究 12』, 권태을, 2002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