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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은점(銀店) 개설 금지 상소 일기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763.4725-20170630.Y17322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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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일기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작성주체 함창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작성시기 1763
형태사항 크기: 27 X 19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5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함창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안내정보

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은점(銀店) 개설 금지 상소 일기
禁銀店疏行日記는 함창 사림들이 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관련 상소를 하며 37일 간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다. 본 상소 이전에도 5·6년간 순영과 중앙에 6~7회나 은점 개설반대를 呈文하여 개설 반대의 뜻을 전하려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자 상경 상소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함창사림은 疏都廳을 설치 후 제반 사항을 관장하게 하고, 회의 장소는 주로 향교와 향청을 이용하였다. 상소는 儒林疏로 정하였으며 함창지방 유력 가문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疏首에는 채명오, 疏掌議는 강세정과 이제백이 담당하여 疏草·兩門通文·山圖를 휴대하고 상경길에 올라 8일 후 한양에 도착하였다. 한양 도착 후 함창 사림들의 상소 전략은 남인 채제공과 제반 절차를 협의하에 진행하고자 했다. 이는 疏首 채명오가 채제공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고, 疏掌議 강세정은 채제공의 스승인 姜樸 일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관료보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노론 時派 실세 호조판서 趙雲逵의 선영이 황령산 일대에 분포해 楊州趙氏 가문 역시 은점개설을 반대할 것임을 알고 협조를 얻으려 했다. 상소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비변사가 은점주와 밀착된 상황이라는 각사에 呈文하여 해결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간파한 채제공은 伏閤 상소 하도록 주선하고 친교가 있는 동부승지 趙{肅+心}를 통해 상소를 진달했다. 상소를 읽은 영조는 "오늘 너희가 오린 상소문은 그 본이 聖廟를 위함에 있고, 자못 조리가 있어 그 마음씀이 가상하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 상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근기 남인 채제공의 지원과 협조 덕분이었다. 이는 채제공이 영・정조연간 영남의 인사를 중앙정계 발탁하고 영남 남인의 顯揚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채명오 등은 송시열・송준길 문묘 종사에 연명하는 등 영남 노론계 활동을 전개한 인물임에도 중앙 노론 세력이 아닌 남인 채제공을 통해서 민원을 해결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노정한다. 물론 이 문제가 외척 홍봉한과 연관된 점도 있지만 중앙 노론들이 영남 노론을 인식을 볼 수 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韓國의鄕校硏究』, 강대민, 경성대출판부, 1992
『朝鮮後期鄕校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尙州市史』, 상주시, 2010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은점(銀店) 개설 금지 상소 일기
자료의 내용
禁銀店疏行日記는 함창 사림들이 1763년(영조 39)에 11월 13일부터 12월 20일까지 관련 상소를 하며 37일 간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다. 상소 이유는 함창향교 대성전의 主山이 되는 宰嶽山 來脈 중 宗山이 되는 銀尺面 黃嶺山 일대에 은을 채광 또는 제련하는 은점 개설하려 하자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상소이다. 이곳 은척 일대는 고려시대 銀尺疏로 유명하고, 후대에서도 銀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銀店 개설지가 바로 황령산 일대로 약 100여전 1670년(현종 11)에도 동일한 일로 함창 사림들의 상소에 의해 왕의 금지 명령이 내려졌던 곳이다. 이 상소 이전에도 5·6년간 순영과 중앙에 6~7회나 은점 개설반대를 呈文하여 개설 반대의 뜻을 전하려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자 상경 상소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함창사림은 疏都廳을 설치 후 제반 사항을 관장하게 하고, 회의 장소는 주로 향교와 향청을 이용하였으며, 상소는 儒林疏로 정하였다. 당시 상소에 동참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함창향교 校長 南必恒·剖席 李齊喬, 鄕廳首席 蔡膺禔·部首席 洪龜洛·李仁玉, 疏都廳 都廳 趙汲·疏首 蔡命五·疏掌議 姜世鼎·李齊白, 鄕員 安宅揆·安宅鼎·南道輐·李齊滂·李齊泰·南道輪·蔡景元·蔡景禹·蔡景魯·蔡景極·蔡景獻·姜必彦·姜必遜·金光緖·郭文鳳·權時哲 등 함창지방 유력 가문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疏首에는 인천채씨 가문의 蔡壽의 8대손 채명오를 필두로 疏掌議는 진주강씨 姜士尙의 7대손 강세정 및 전주이씨 이제백이 담당하여 疏草·兩門通文·山圖를 휴대하고 상경길에 나섰다. 상경노선은 영남대로와 일치하는데 함창현 향청에서 출발하여 雙花店(함창읍 북5리) - 幽谷店(문경시 유곡동) - 新院(문경 마성면) - 草谷(문경 상촌) 桐華院(문경 조경산성) - 高沙里(괴산 연풍면) - 安保(충주 상모면) - 水月店(충주 무두리) - 儉丹店(충주 이류면) - 崇善店(충주 신니면) - 냉천곡(음성) - 石院(이천) - 律村(영인 백암면) - 左棧店(용인 원삼면) - 陽地邑(용인 양지면) - 龍仁邑 - 板橋(성남) - 栗峴店(송파구 율현동) - 麻津 (송파구 삼전도) - 동대문 - 院洞에 총 8일이 걸려 도달했다. 상경 도중 말의 건강, 겨울철 추위 등의 고충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소를 반대하는 銀店主 辛致大 등의 세력의 신변 위협이 난관 있었다. 그래서 문경현감에게 도움을 구해 그의 배려로 將校의 호위 속에 조령을 넘었으며 安保에서는 鑄錢郎廳의 하인이 비변사에 보내는 보고서를 일부로 보이며 상소인들을 임금을 기만한 죄인으로 모는 협박도 이어졌다. 이는 함창 황령산 銀店 개설 명분은 禁衛營에다 鑄錢所를 설치함으로써 비롯되었기 때문에 비변사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은점 개설을 금지 시킬 사람은 임금밖에 없었다.
서울에 도착해 비답을 얻을 때까지 일정과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1월 24일 강세정이 貞洞 참봉 姜必敎를 방문해 상소의 일을 상의했다. 25일 채명오와 이제백이 齋洞修撰 金載順(함창현감 金魯의 조카)을 방문, 상소문 초안을 필삭 받은 후 강참봉을 방문해 함창향교의 통문을 楊州趙氏와 晉州姜氏에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참판 趙榮鎭과 戶判 趙雲逵에게 협조를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6일 3인이 領府事 申晩을 방문 협조를 요청하고, 참판 채제공을 방문했으나 사람이 많아 그냥 돌아왔다. 27일 3인이 재차 채제공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으면 동부승지 趙{肅+心}에게 부탁해 상소를 성사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상소문을 수정해주었다. 호판 조운규를 어렵게 만나 그들의 선영에도 관계된 일이니 협조를 요청하였다. 다시 조승지를 방문하였으나 퇴궐하지 않고 그의 당숙 趙上舍에게 협조를 요청하니 기꺼이 돕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판서 韓翼謨를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하니 예조판서에게 呈文하라고 하였다. 28일 食前에 채제공에게 편지를 보내 조승지판서 李之億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써 달라하니 즉답을 보내왔다. 먼저 이지억을 방문해 채제공의 편지를 전달하니 적극 돕게다 하고 왕이 患중이라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을 주었고, 그의 사위인 안동 柳生도 적극 후원해 주었다. 29일 3인이 金修撰을 방문하니 상소문 초안을 여러 곳 수정하고 상소문 서식을 가르쳐주었으며 상소문 용지도 구입해 주었다. 申領府事를 방문하니 적극 후원을 약속했다. 12월 1일 참의 朴聖源을 만나니 상소에 승산이 있다는 격려를 받고 강세정이 참판 南泰會를 방문하니 또 격려해 주었다. 특히 호조판서 조운규를 통하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받았다. 다시 채제공을 방문하여 상소문을 정서할 書吏와 하인을 청하여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2일 조식 전 박참의를 방문하여 상소문 초안을 최종 윤색했고, 채제공이 보내 준 서리로 하여금 상소문을 정서하고 名帖을 쓰다가 해가 저물어 중지하였다. 3일 서리가 와서 명첩을 다 썼다. 이제백이 貞洞참판 李得宗과 倉洞헌납 李與宗을 만나 상소할 때 적극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오후에 채명오가 판서 洪啓禧를 방문해 협조를 부탁했으나 상소문이 제대로 전달 여부를 염려 하였다. 4일 조식 전 채명오가 車洞의 교리 安杓를 방문해 도승지 金善行에게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식후 채명오와 강세정이 성균관으로 가서 金山 진사 朴柱天과 문경 山陽 진사 蔡耆光을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저녁 3인이 安洞영의정 홍봉한을 방문했으나 퇴궐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우의정 金相福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 일은 영의정이 주관자라 그에게 부탁하면 자신도 돕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5일 새벽 일찍 영의정을 방문했으나 이미 입궐해 버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로에 신임 경상도 관찰사 鄭存謙을 방문해 협조를 당부하니 부임 전이라 거절하였다. 채명오와 강세정이 비변사로 가서 영남 담당 서리를 만나 呈文하려 하였더니 시작 전이라 거절당했다. 오후 성균관의 박진사가 통문을 요청하여 함창현 사림 통문을 강세정이 베껴서 보냈다. 6일 3인이 영의정 집으로 가서 입궐하는 홍봉한을 기다려 가마 곁에서 "영남 유생이 성묘 주봉에서 은을 캐려는 변고 있어 와서 기다렸다"고 했으나 응답이 없어 대문 밖까지 따라가며 呈書하는 글을 읽어 달라고 외치자 "비변사에 呈書하라"고 답하고 떠나버렸다. 3인이 대궐문 밖까지 따라가며 呈文하여 했으나 하인배가 막아 쫓겨났다. 식후 성균관 박진사와 채진사가 숙소로 방문하였고, 상소일을 10일로 정하고 상소문 函과 보자기를 貰를 내었다. 7일 조식 전 채명오가 판관 金坦行을 방문해 협조를 부탁하니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강세정이 이지억 대감을 방문했으나 좋은 소식이 없었다. 오후에 3인이 영의정의 종형 洪象漢을 방문해 협조를 당부했으나 예조와 성균관에 呈文하라고 하였다. 8일 조식 전 채명오가 채제공을 방문하여 제 관서의 재상과 대담한 경위를 말하니 비변사·예조·성균관에 정문하는 일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 하여 伏閤하기로 정했다. 오후에 義興 진사 朴光輔가 성균관으로부터 위로차 내방이 있었다. 9일 동구 내 임금행차가 있다기에 3인이 갔으나 행차가 돈화문으로 사라지고 오전에 임금 행차가 있었으나 기회를 잃었다. 10일 柑科 시행으로 상소하지 못하였다. 채명오와 이제백이 김수찬을 방문했더니 풀이 꺾여 있었고, 도승지가 체직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판관을 방문했으나 입궐을 만나지 못하고 그의 아들과 면담 중 과객이 와서 이번 상소는 패소할 것이라 하였다. 11일 새벽에 목욕을 재계하고 창경궁 궐문에 나가 상소문을 올린 뒤 興化門에서 비답을 기다렸다. 비변사 하인들이 회유와 협박으로 상소문 내용을 베껴가려 했으나 거절했다. 12일 마침내 비답을 받았다. 함창 사림들의 상소 전략은 남인 채제공과 제반 절차를 협의하에 진행하고자 했다. 이는 疏首 채명오가 채제공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고, 疏掌議 강세정은 채제공의 스승인 姜樸 일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관료보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노론 時派 실세 호조판서 趙雲逵의 선영이 황령산 일대에 분포해 楊州趙氏 가문 역시 은점개설을 반대할 것임을 알고 협조를 얻으려 했다. 상소문은 참봉 姜必敎·참판 蔡濟恭·참의 朴聖源 등 총 5차례의 수정을 거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소의 방법도 자문을 받았다. 특히 상소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비변사가 은점주와 밀착된 상황이라는 각사에 呈文하여 해결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간파한 채제공은 伏閤 상소 하도록 주선하고 친교가 있는 동부승지 趙{肅+心}를 통해 상소를 진달했다. 상소를 읽은 영조는 "오늘 너희가 오린 상소문은 그 본이 聖廟를 위함에 있고, 자못 조리가 있어 그 마음씀이 가상하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 상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근기 남인 채제공의 지원과 협조 덕분이었다. 이는 채제공이 영・정조연간 영남의 인사를 중앙정계 발탁하고 영남 남인의 顯揚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채명오 등은 송시열・송준길 문묘 종사에 연명하는 등 영남 노론계 활동을 전개한 인물임에도 중앙 노론 세력이 아닌 남인 채제공을 통해서 민원을 해결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노정한다. 물론 이 문제가 외척 홍봉한과 연관된 점도 있지만 중앙 노론들이 영남 노론을 인식을 볼 수 있다. 12월 12일 함창 사림이 원하는 비답을 받은 뒤 13일 상소에 힘써준 인사들을 방문하여 사례하였다. 이때 각 관아의 書吏와 旅館下人에게는 관습화된 사례금 액수가 있어 노자가 고갈될 정도로 보답해야했다. 14일 상주로 내려가는 貰馬 3필을 구하여 12월 16일 하향길에 올랐다. 하향길은 종루 - 남대문 - 한강진 - 신원 - 판교 - 영남대로를 택해서 崇善店 - 安保店 - 高沙里 - 동화원·초곡 - 雙花村 - 상주 - 함창에 도착했다.
자료적 가치
禁銀店疏行日記는 함창향교 대성전의 主山이 되는 宰嶽山 來脈 중 宗山이 되는 銀尺面 黃嶺山 일대에 은을 채광 또는 제련하는 은점 개설하려 하자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상소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후기 銀店의 폐해와 영남 향촌 사림들의 상소 과정과 누구를 통해 해결해 나아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咸昌鄕校誌』, 함창향교, 2010
「禁銀店疏行日記 硏究」『尙州文化硏究 12』, 권태을, 2002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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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金銀店疏行日記
癸未十一月十三日疏掌議李齊白治行入校校長南必恒副席
李齊喬已來待矣
十四日疏都廳趙汲鄕員安宅揆安宅鼎南道輐李齊滂
李濟晟李濟邴李齊泰南道輪入來因宿
十五日疏首蔡命五疏掌議姜世鼎鄕員蔡景元蔡景禹
蔡景魯蔡景極蔡景獻姜必彦姜必遜金光緖郭文鳳
鄕首席蔡應禔入來午後鄕首席先歸姜台叟以私故歸
本家疏首及李次庾離到鄕堂鄕
首席及副首席洪龜洛李仁玉留待校長及鄕員七八人隨來同宿夕後鄕副席李仁玉以緊故歸家夜
疏首與次庾入見官家而出
十六日朝前姜吉叟治行入來鄕員安宅揆
宅鼎權時哲入來食後鄕首席亦有故歸家疏首
與次庾先發台臾爲山圖踏印入官家官家不許疏行至雙花村次庾所騎馬倅蹇故還入
鄕堂改求他馬夕時三人同發而以卜重馬弱請得負卜軍請
於鄕堂卒地不得使驅從分負而去闕事乘暮近到幽谷店
十七日行過新院則所謂銀店魁首辛致大等已聞疏行之來預
待門外急招一角漢追來行中或後形跡可疑故慮有中
路不意之變及到聞縣卽爲呈書則官題曰此輩不顧所重作
黨欲爲設店之事曾亦痛憎而害及隣縣尤極痛駭笑所訴
如此堂爲定將校各別譏察以此後考次立旨成給事云云夕到
聞慶鄕校則任員皆不在以副席則遠居故作書於校長李拯
國甫則以落傷不得來答書而謝過又作牌於庫子申飭善
接之意以故雖無主人而客意安穩鄕首席蔡膺祜卽吾鄕
首席之伯氏也亦有故歸家兩副席皆出外倉而留置一所吏傳
語又以一貫銅二部鐵贐行分付使令疏行踰嶺時負卜軍使
之預爲等待其誠意可感
十八日使校下人及鄕廳負軍分運行具三人單騎曉發至
草谷則鄕廳使令先到發軍卽爲傳送至東火院亦如之鄕
廳使令辭退及到高沙里則亦皆無辭傳受而安保則頑拒不
受可痛可痛然嶺路氷板能免顚沛可幸朝過龍湫時有一
蒼髯者與着戰笠者同坐▣▣▣疾視行中貌狀可憎纔到
數里厥漢踵來至安保午路髥從同入房中問行中居地
行中問渠所在則稱以在京初云自大丘來又云自呂泉來坐
頃卽出俄而又來曰古人云相訟者同鼎吾亦以咸倉錄事上
京願與之同行行中果是姜生員蔡生員李生員乎答曰何以知之
厥漢曰備邊司郎廳日前以摘奸銀坑次下來而聞此疏擧使我持報狀納于備局云云覓其報狀則自其行纏
中出示之其辭曰鑄錢郎廳爲牒報事小人卽到咸昌境內
則一鄕士林自知前日誣岡之罪盡爲逃躱是乎矣其中姜某
蔡某李某亦以校後用▣▣▣備財力盜得文狀未摘奸
前輕先上京憑公營私如此輩若不嚴徵何以令行於遠
化之人乎自備局卽爲捉囚各別重治云云髥漢又緩頰
曰姑待摘奸爭之不晩云行中據理大責曰汝爲汝事我爲
我事汝何來聒於此也其漢卽起出曰寧鬪智不鬪力其
言誠可笑也是夕止宿水月店
十九日曉發至儉丹店抹馬馬一匹不食頻臥故午後行
到崇善坪驟雨暴至馬上欲着新帽則風急帽縮兩手
扶笠而衣冠盡濕三人相顧失笑暮宿崇善店
二十日早發至冷泉谷曙色始生抹馬石院合宿津村昨今兩
日路澝太甚奴顚馬仆艱狀千萬是夜小雪
二十二日曉發近來日氣稍暖故着厚衣解置卜中纔行
雪風大作奴主皆寒戰艱到左棧店得溫房小鎭
卽發至陽智邑抹馬暮至龍仁邑適入煖堗一行穩宿稍
有生意焉
二十二日寒甚不得早動口口行到板橋板肆聞漢江流
澌不可渡由麻田浦路止宿栗峴店粮太告竭欲貿店中則
價直太高憫事
二十三日鷄初鳴雷聲大作雨下如注不得早發平明雨止
卽渡麻津由東大門入直抵院洞卞龍海家盖台叟嘗
與此人精熟故也卽掃一房借之可幸
二十四日台叟往見貞洞姜參奉必㪍相議疏事而歸奴馬
以各處興成之未及不得遠送
二十五日奴馬三駄還送郭周伯家馬及陽凡奴則留置朝
疏首及次庾同往齋洞金修撰載順家示以疏草則多有
筆削處且有款接之意金修撰卽前城主金魯氏從子也
食後三人同往姜參奉家傳致校中抵趙門姜門通文要
與同聲姜參奉轉送其通於其隣屋趙參判營鎭家則辭
以削職推委於戶判趙雲逵可歎姜參奉見疏草曰語多
浮陳姑留此文則堂釐改云姑留置疏草而歸
二十六日朝前三人往見磗洞申領府事晩告以銀事申相曰吾
曾見本道報狀已知顚末云疏首曰何以則可以禁斷也申相曰
搢紳間公議皆以爲若有儒疏則亦必禁止云云食後同往
參奉家則已搆置疏草矣自其處轉向藥峴蔡參判
濟恭家則多人在座故不發所懷而歸
二十七日三人步往藥峴則主人皆款迎盖與疏首同姓而情熟
故也說盡銀事且示山圖及疏草則主台慷慨曰此而不禁
則聖廟之變已無可言白咸之人民何以生爲所當殷死力
爭處也旣有先朝處分則前日所呈之疏
今上朝萬無不捧之理吾見趙同副{肅+心}則當極言捧入之意
而但今則上 候不平藥房入直難於伏閤姑侯
平復進呈云云疏草數節删削所見精明矣歸路又見姜
參奉圖得趙參判書以爲連臂戶判之子參判之子趙
高山昌逵作書於戶判曰咸昌儒生以銀店事持通文
到方進往門館未可卽已招見否一次校理大貴於禁帥
斷不可已也云云仍借姜參奉下人同往會洞戶判家
傳致趙高山書而久無黑白三人坐歇所飢寒俱極招閽
者入送鄕中通文及三人名御則卽請入來坐定問曰此
通何意也答曰鄙縣所遭非但聖廟之極變在大監
宅先壟尤爲切害故士林之有此通文欲籍同聲之勢云則戶
判曰以此銀事日前已發備邊司闕文云曾於安保因厥
漢報狀雖聞備闕之說而不以爲信今聞此言吾咸景色
自可想得矣言未畢戶判嘔吐冷涏數次若將氣窒顧謂
曰吾病如此從當思量處之故退如何云云台叟曰通刺極
難未可分付于禁將否答曰吾何分付病勢如此從後更
來云故不得已退出又歷訪趙承宣{肅+心}則自闕未退見
其堂叔趙上舍示以疏草及山圖則上舍曰近來儒疏雖難入
呈而此則更有先朝成命似不見阻吾見堂侄當備傳云
矣又歷見韓判書翼謨答曰吾雖有備局堂上之名病勢
已久不與朝政備闕有無全不聞知而若有可言之路當公
頌然此闕聖廟士林當呈書於禮判云矣辭出夜色已
闌蒼黃步還汗出沾背其困厄可勝言哉
二十八日朝前裁書藥峴請趙同副捧疏囑簡及李判
書之億通刺書則蔡台卽爲答書而又書送兩處書
其檢趙令書曰咸昌士林以禁營之方掘銀於聖廟主峰
咫尺之地不勝憤惋閔迫方此裏足陳疏盖曾於
顯廟朝亦有此事故伊時本縣多士陳章至蒙特敎嚴
禁矣儒疏之以猥積見退不惑岐貳必須以先朝事爲言俾
多士得免等待濡滯之恝則其幸當如何也勿泛泛云云
其扺李台書曰嶺儒以聖廟事入京而有稟白方進
往門館幸望卽爲邀見隨事指揮如何云云李台卽蔡台
之舅氏也次庚以足▣不能動疏首與台叟同往羅洞李
台家先投藥峴書則卽請入兩人備陳銀變則李台曰
世變如此豈不寒心但今則上候不平臣民憂遑從當
言及於廟堂云云李台之胥安東柳生亦從傍助言同道
之誼可見矣
二十九日三人同往齋洞金修撰家示疏草則筆削數節且
書疏式一一指敎使其家奴貿給疏紙曰書疏後使之更示
而若通呈疏日字則當以捧入之意書囑承宣云可感仍向礡
洞申領相家示以疏草及山圖則申相曰曾聞銀坑在
聖廟數十里外及內見山圖決不可設店姑待上候之平復
士林呈疏則當有處分亦當有公議云矣
十二月初一日疏首往見朴參議聖源說及銀事則答曰須聞某
人以其先山主脉設銀店事合族上言蒙允禁斷况此
聖廟主脉曾有先朝成命者乎備局若知如許實狀必
爲痛禁云云台叟往見南參判泰會示以疏草則答曰吾在
咸衙時已知此山之爲聖廟主脉且有先祖禁令則孰
敢設店乎果有備關則備關乃有司堂上之次知戶判方
帶備局有司堂上之任若知實狀則必有量處云矣台叟
轉往蔡台家則羅洞李台亦來坐方說吾
咸銀事矣俄而李台先歸台叟請借寫疏書吏及呈疏時使喚下人
則快許可感
初二日朝前疏首見朴參議聖源鍛鍊疏草措語一
層潤色矣食後蔡台命送兵曹書吏裁疏紙書之而以
所備筆墨之不好以渠筆墨而書之是亦蔡台之分付也
未及書名帖而日已暮姑書吏還歸
初三日書吏又來畢書而去次庚往見貞洞李參判得宗
倉洞李獻納興宗說及銀事則莫不寒心請其呈疏時
宣力答云若呈疏而見阻則通之節當書囑承宣云矣
午後疏首往見洪判書啓禧告以疏事答曰上疏太過若呈疏
而某或告之曰此非士林公議而乃是中間之人云則亦將奈何
云矣
初四日朝前疏首往見車洞安校理杓轉囑都承旨金先行
以爲捧疏之地而盖安與金爲娚妺故也食後疏首與台叟
同往泮齋尋見金山朴進士柱天山陽蔡進士蓍光千里相
逢其喜可知也仍請呈疏時得送館下人則皆云咸昌士林
有通文於太學然後館儒亦當依例施行云矣夕間三
人持呈書往于安洞領相洪公鳳漢家則自闕未退仍往
社洞右相金公相福家投刺則辭以有疾故入送呈文則卽
爲請入仍問曰呈辭已悉而何以呈於我也疏首答曰大監方
帶禁營都提調故來呈云則右相曰我亦知其然而但禁營鑄
錢乃廟堂之付託者也而領相主其事若往訴領相則當得題
吾以有病不見外人而爲陳此言請入云矣
初五日曉頭三人俱往安洞則領相已詣闕矣歸路歷入
新嶺伯鄭公存謙家投刺則不納曰未辭朝前未當見本道
儒生云故更以聖廟之有變累度往復而終不許入無可
奈何疏首與台首同往備局招見嶺南次知書吏出給呈
文則答曰未開坐前不可呈書云問其何時開坐則答曰有
事開坐或一年二三度云雖欲呈備局何時得置還午後
泮齋朴進士柱天專人來索通文故台丈焉本邑士林通
文而送之
初六日鷄未鳴三人俱往安洞領相家入大門內坐歇廳數食
領相詣闕籠燭照濯三人立於平轎邊齊聲告曰嶺儒
以聖廟主峰掘銀之變來待云則無所忿憤故三人追出
門外以受覽呈書高聲大告則輒曰呈于備邊司三人
又追往闕門外更欲呈書則下人輩突入却逐無可奈何
食後朴進士柱天蔡進士蓍光來訪館下人二名亦來現初定以
八日呈疏拘於國忌退定十日疏函及裏袱貰錢給送
初七日朝前疏首往見金判官坦行則言論切直憤惋慷慨曰
我見領相當極言其不可使彼奸細輩反受重律勿慮卜
云云方此愁亂之際得聞此言其爲一時之快不可勝言台叟
往見羅洞李台而別無喜言午後三人同往小公洞洪判書
象漢家投刺則卽請入洪判書領相之從兄也纔聞銀說
輒曰咸昌銀事吾巳熱聞銀坑於聖廟絶遠云然否台叟
出示山圖疏首指示來脉則勵聲大言曰此豈可掘之地乎如
是則道伯與本官何不痛禁三人告以前後禁斷之由則笑
而不答且曰呈于禮曹及成均館似好云矣
初八日朝前疏首往見蔡台備傳諸宰所言則答曰次欲呈
疏司呈單似甚無益莫如急急呈疏以待聖上處分云
故備局禮曹成均館各司呈書皆盡置而不呈午後義興朴
進士光輔自泮齋來訪
初九日雨雪交下咫尺難通三人相對愁亂之際忽聞
大駕擧動于洞口內大闕三人勇朴則大駕巳入敦化門未
及仰瞻天顔其恨曷勝午前大駕卽爲還宮而亦未
及知尤切伏恨初昏判下柑科
初十日以科事不得呈疏台叟往紟川省墓而歸都令金善
行遆改元仁孫代出而卒難連臂奈何疏首與次庚同往
修撰家日前巳向振威不勝落莫仍往金判官家入
直未還與其子酬酢之際有一中路漢入坐聞禁銀之說
大警曰此人大敗大敗云文其由則答曰洛中有錢財
者無數下去吾之一族與隣人亦參其中人云大槪自幽谷店至
板橋凡大小酒幕無賴輩處處群聚無不以咸昌銀事爲
奇貨及到城中亦皆如是若非聖上之特加判付則莫
可禁遏也
十一日三人早起齋沐封章食後館下人六名持袱函而
來卽奉疏詣闕聞是日爲次對衆會之中恐有岐貳之
論入於依幕以待大臣之退歸矣午後詣宰俱退三人
卽爲進往闕門則下輩已說鋪陳床卓而待矣奉疏於
床上而三人列伏床前使館下人入送疏大槩則卽令疏首
奉章而入該房承旨出坐于堂上命疏首奉疏四拜卽
令讀疏疏首快讀一次承旨廳畢▣▣▣▣▣承旨
趙▣也疏首還出三人同伏興化▣▣▣▣▣▣▣▣▣
傳喝仍令使喚盖兵曹下人則任▣▣▣▣▣▣▣▣
▣朴進士光輔蔡進士蓍光自院洞下處▣▣▣▣▣▣日同坐
而歸呈疏未久以冬至使乘轎事灣尹咨文適到自上命大
臣入侍俄而右相先到領相繼至三人不知咨文之至而纔巳呈
疏卽令大臣入對其愰悚不瑕之慮有不可勝言矣伏閤不久
行止殊常之類無數來集或問疏由或察動靜俄又一書
吏來請疏草出給則當謄出云問其何司下人不答云禁
營書吏故不給疏草又爲轉請於館下人必欲謄去而終不
出給厥漢退去他得又來曰領議政大監分付內疏草斯速
謄送云威喝非常三人擧理叱退厥漢罔知攸措百般哀乞
盖厥漢亦禁營下人云禁將慮有斥言自家欲見疏本之
意也三人露伏興化門前而大臣不退冷氣透骨不忍
堪耐夜深後暫出倚幕坐而待之鷄初鳴大臣始退三人復伏
于門前俄而政院下吏來告曰疏佌巳下云疏首卽隨吏
而入謄書聖佌而出奉佌于床上疏首立於床前
台叟奉佌大讀三人列伏再拜佌曰省疏具悉鄕
儒之不緊章奏卽予不取况幕年自勵之時乎今者爾
投之章其本爲聖廟頗條理其用尙矣旣有
昔年禁令則近年以來連所作俑其涉可駭此乃牟利輩
之習若不嚴懲何以永社後弊辛致大令該道嚴刑定
配爾等安意守聖廟恪修學業焉三人伏見聖佌
手舞足蹈全忘昨夜之凍寒矣卽爲撤還下處則主人老
媼聞下佌踊躍而舞一室男女爭來獻賀以此觀之則凡
我咸人之聳喜感頌可知也卽以呈疏判付之意作書於校中
以付邸便而其卽傳何可必也疏事已決歸意如矢已所置
一匹馬蹇立他無貰馬求得之路憫事憫事昨日呈疏時
各廳書吏使令及各門禁卒皆指小紙及濡筆請爲
行下而或請五六貫或請三四貫小不下一二兩四面爭
訴眩人耳目雖欲一井退斥而非但自有古例若無此輩
則莫可通傳故量宜略施而其數甚夥矣今又館下
人告辭時徵索之苦十倍於禁卒而凡呈疏時擧行諸
節若非館人則莫知向方雖給十貫銅實無所惜而行
資告渴不能如意可歎可歎
十三日台叟往藥峴深謝眷顧之義主台悅之心不下咸人矣
午後疏首與次庚往謝礡洞申相申相亦稱賀不巳
十四日三人供出廣問嶺南下去貰馬而不得而歸夕間奴也與尙
州漢約得貰馬三匹其以十六日早發而來可幸
十五日奴也於旅客主人處見邑居潘書房持來鄕書知
各家安報可幸而備關下去後營門使尙州鎭將摘奸
銀坑鎭將㤼於備關與廷鉉輩符同尺量山麓夜以繼晝透
迤屈曲以衍其步雖士林齊進爭卞則皆揮却不請及
其枚報營門之時倍增里數全沒事體士林進到官門
呈書欲爭取又牢拒不受云鎭將之不顧所重至於此極
誠可寒心恨未及聞知於未呈疏之前也
十六日朝前泮齋蔡上舍步來送別鄕關之誼可見
矣疏首與台叟往見蔡台告別而趙同副則以晨入
關暮始還累次委訪不得面謝而歸其恨不可言午
尙州漢牽馬而來三人同發主人隨▣鐘樓送別
而內主以煙價之太廉頗有形色云是可歉然行到板
橋夕飯後尙州漢十餘輩乘月發行行中不得已隨發
終夜行一百二十里雪風如割萬身凍直飢寒俱極▣
分必死而半夜中道不得自由作此安行追悔莫及奈何
十六日鷄未鳴賈漢必欲由槐山路直走松面而要與同去故還
推半貰而落後食後三人步出終日行四十里至崇善則兩足
皆繭不可前進一步地矣入於酒幕則咸邑居劉惡不侄子金伊
云者來見日前載柿上京方牽空馬三駄而歸者也行中請借
其馬卽徵貰太高可痛
十九日貰得厥馬三駄至達川朝飯出發至水月遷岩三人下馬
步上金伊者牽馬先走呼之不應三人俱着毛襪足厚衣艱幸
步行數十里其苦狀有不可謄言至安保店則銀城申上
舍壯奴六七名適到來見疏首卽令기奴捉入厥漢曵髮數
十回小雪其憤而憤頭下杖則恐有過氣含忍放出以待
歸家後重治計耳行具則給貰負來三人步到高沙止宿
二十日三人乘機軍踰領至東火院轉乘他機至草谷朝飯
貰任大丘下去馬直到双花村趙上舍家卽主人兄弟入邑
不在日巳犯夜故不得前進疏首與次庚留宿台叟
緊故擧火歸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