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27년(1701)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용궁향교(龍宮鄕校)에서 작성한 청금록(靑衿錄)
자료의 내용
청금록(靑衿錄)은 조선후기 향교에 출입하던 양반사족인 청금유생을 기록한 명부이다. 청금유생은 향교에 출입하였던 양반사족의 명부로서 평민 또는 서얼들로 이루어졌던 교생(校生)과 대비되는 존재들로 교임과 함께 향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적 구성이자 운영 담당자였다. 이러한 교생과 청금유생의 분화, 즉 청금록이 작성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인조연간 교생고강의 실시와 과거응시 자격부여라는 2가지의 요인을 들 수 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교생의 수는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은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郡)은 50명, 현(縣)은 30명이며 이는 조선후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양반사족들은 군현의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정액내의 교생, 즉 액내교생(額內校生)으로 향교에 입교하여 향교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에 반해 군역면제와 각종특권을 받을 목적으로 비양반층의 정원 외의 입교 또한 이루어졌으며 이를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 하였다.
현재 용궁향교에 현전하는 청금록은 모두 3책으로 그 명칭을 청금록과 용궁관유생성책(龍宮官儒生成冊)으로 쓰고 있다. 본 청금록은 앞서 작성된 청금록에 이어 가록한 것이 아니고, 숙종 27년(1701)을 기준해서 당시 용궁현의 청금유생을 모두 기록한 것이다. 이는 양 청금록을 비교해 보면 대부분의 인물이 중복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본 자료는 숙종 27년(1701)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2년간 총 118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액내교생이 99명과 액외교생이 19명으로 각기 신분을 구분하여 등재되어 있다. 겉표제에는 청금록으로 되어있고, 본 좌목에는 성명・자(字)・이거(移居)에 관한 사항을 기재해 두고 있고 말미에 간지가 있다.
먼저 98명의 액내교생의 성씨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안씨 14명, 이씨 13명, 鄭氏 11명, 윤씨 10명, 남・全氏 각 8명, 姜・고・홍씨 각 7명, 채씨 4명, 장씨 3명, 권・류・반씨 각 2명, 김씨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에 대한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용궁현의 대표적인 성씨로는 축산승람(竺山勝覽)에 의하면 안씨는 순흥・광주(廣州), 이씨는 성주・여주・한산, 정씨는 청주・동래, 윤씨는 파평, 남씨는 의령, 전씨는 축산(竺山), 강씨는 진주, 고씨는 개성, 홍씨는 부림(缶林), 채씨는 인천, 장씨는 울진, 권씨는 안동, 류씨는 진주, 반씨는 기성(歧城), 김씨는 일선・영양 등으로 파악되었다. 전반적으로 순흥안씨가 두드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순흥안씨들은 고려시대 문과급제 후 좌정승을 역임한 안문개(安文凱 1333~1389)의 후손들이다. 14세기 말 조선왕조개창에 반대하여 유배로 인해 이 지역으로 낙남(落南)한 이래 후손들이 경상도 예천 등지에 세거하였다.
용궁향교의 경우 18세기 초반까지는 비양반층의 액내교생으로의 입교에 따른 유생・교생으로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 청금록의 액내교생 숫자가 크게 증가하는 바는 종래 법제상 교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 향교에서 유생・교생으로 분화된 이후의 청금유생을 말한다. 그래서 그 인원도 종래의 교생안과 같이 정액이 없기 때문에 향촌 내 전 사족들이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즉 본 등재자들은 18세기 초반 용궁현의 모든 재지사족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문서는 조선초기의 교육대상자로서의 생도안이 아니고 향안과 같은 용궁현에 거주하는 사족들의 명부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 입록 자격도 당시 향안의 입록 규정과 동일하였다고 판단된다.
다음 19명의 액외교생의 성씨를 나열하면 김씨 8명, 전・홍씨 각 3명, 권씨 2명, 손씨 1명 순이다. 이들은 기록상으로도 액내교생과는 구별되어 있다. 자(字)와 간지가 없이 이름만 있을 뿐이다.
자료적 가치
본 청금록은 18세기 초반 용궁향교의 인적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가록된 인물들은 18세기 초반 용궁현의 모든 재지사족들을 총망라하고 있어 향안과 같은 성격의 사족들의 안(案)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청금유생의 입록 현황을 통해 용궁의 향촌사회 내 사족의 동향과 향교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액내교생과 액외교생을 분명히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慶北鄕校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1
『韓國의 鄕校 硏究』, 강대민, 경성대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 硏究』, 윤희면, 일조각, 1991
『龍宮鄕校誌』, 용궁향교, 2004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