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1745년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심원록(尋院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바로 심원록은 서원 방문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심원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심원록은 모두 9책으로 본 자료는 그 중 하나로 戊申 3월 7일부터 乙丑 4월 2일까지 작성된 것이다. 두 번째 수록된 인사인 李麟至의 출생년이 1687년(숙종 9)이기 때문에 무신년은 이인좌 난이 발생한 1721년(영조 4)이다. 을축년은 1745년(영조 21)까지 이기에 18년간 서원을 방문한 54명의 명부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나 자료의 풍성함을 더해줄 방문 소회를 담은 詩나 동행자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서원 방문의 목적은 참배가 주된 이유로 기재되어 있다.
이들 방문자들을 그 인원과 성관을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長水 黃氏 7명, 夏山 成氏 6명, 豊壤 趙氏 4명, 管城 全氏각 3명, 聞韶 金氏·義城 金氏·平山 申氏·花山 權氏·興陽 李氏 각 2명, 管城 陸氏·光山 盧氏·錦城 朴氏·綾城 具氏·碧珍 李氏·安定 羅氏·礪山 宋氏·驪興 閔氏·延安 田氏·烏川 鄭氏·完山 李氏·月城 金氏·月城 李氏·鳳城 琴氏·三州 李氏·淸道 金氏·坡平 尹氏·河洞 鄭氏·河城 鄭氏·咸陽 呂氏·花山 金氏 각 1명 순이다. 31개의 성관 중 황희의 후손인 장수황씨 가문과 外裔들의 방문 비율이 높았다. 외예로 기재된 가문은 금성 박씨·파평 윤씨·하산 成氏들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가 적기되어 있는 것을 분류하면 11개 지역인데 그 분포현황은 상주를 비롯해서 金山·金泉·大邱·石木·善山·龍宮·龍潭·仁同·咸昌 등이다. 전라도 龍潭을 제외하면 모두 경상도이며 상주 인근 고을들이다.
이들 가운데 지방관의 방문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나마 생원시에 합격한 興陽이씨 가문의 李麟至 외에는 특별히 주목되는 인사가 없다.
이러한 이유는 1789년(정조 13) 사액 받기 이전 옥동서원은 아직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그 영향력도 크지 않아 옥동서원에 대한 사림들의 방문이 저조했던 사정에 기인한다. 또한 여기에 상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에 의한 접근성이 제한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후손들의 방문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문중서원으로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심원록 분석은 그 서원의 위상을 반영하는 일정한 窓이 될 수 있는데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사액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파악에 일정한 의의가 있다. 또한 옥동서원의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尋院錄』을 통해 본 18세기 전반 陶山書院의 방문과 그 의미」『퇴계학과 유교문화』 53, 김명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