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년(숙종 1) 작성한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알묘록(謁廟錄)
자료적 가치
서원은 양반이라면 방문하고 싶은 또 방문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새로 도임한 관찰사, 고을 및 인근 고을의 수령·察訪·都事 등도 서원에 알묘하고 부조하였다. 지방관들뿐만 아니라 소·대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新恩 인사, 전직관료, 유학 등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서원에 들러 알묘하고 갔다. 후손·방손·外裔들도 끊임없이 서원을 방문하였다.
알묘록은 서원 방문자들이 사당 참배 후 본인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다. 심원록이라 칭하지 않고 알묘록이라 적기한 것은 아직 서원으로서 승격하지 못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옥동서원은 1580년(선조 13) 방촌 황희의 영당으로 건립되어 춘추향사를 봉행하여 오다가, 1714년(숙종 40)에 사림들의 중론에 의해 沙西 全湜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15년(숙종 41)에는 신덕리에 위치한 방촌 황희의 영당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 후 1783년(정조 7)에는 畜翁 黃孝獻과 槃澗 黃紐를 추배하여 배향 선현은 모두 4인이 되었다. 이어 1789년(정조 13)에는 영남 사림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제 조정에서는 승지 朴天衡을 보내어 致祭하고 옥동서원이라 사액하였다.
알묘록은 임원록과 함께 서원에서 중요히 취급했던 문서로 그 등재 여부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심원록 표지에 本官 士人・서얼・中人은 勿書, 표제 인물・鄕員・本府人은 疊書한다는 문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色目이 判異하면 이름을 기재하더라도 인위적인 삭제를 가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원 방문자들의 방명록 작성은 상식화 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참배 후 본관・이름・관직・字・날짜・방문목적・기타 등의 내용을 적는다.
현재 옥동서원에 현전하는 알묘록은 본 자료가 유일한 것으로 1675년(숙종 1) 9월 20일에 작성된 것이다. 두 번째 수록된 沃川郡守 李選의 군수 부임연도가 1678년(숙종 4)이기 때문에 기미년은 1679년(숙종 5)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입록자의 방문 간지인 을묘는 1675년(숙종 1)이다. 서원 방문 후 사당을 배알 한 95명의 명부이다. 기재 방식은 위에 언급한 방식과 유사하며 자료의 풍성함을 더해줄 방문 소회를 담은 기록도 눈에 띈다. 다만 본관은 거의 기재를 하지 않았다.
이들 방문자들을 성씨를 나누어 정리하면 黃氏 21명, 李氏 20명, 鄭氏 7명, 金·宋氏 6, 成氏 4명, 盧·朴氏 각 3명, 郭·權·呂·徐·孫·全·丁·趙·洪氏 각 2명, 高·南·申·禹·尹·任·河氏 각 1명 순이다.
한편 방문자들의 거주지가 적기되어 있는 것을 분류하면 27개 지역인데 분포 지역은 상주를 비롯해서 結城·京·公州·公州·軍威·金山·羅州·南原·羅州·大丘·保寧·禮泉·文義·密陽·寶城·報恩·順天·楊州·永同·永川·沃川·沃川··龍宮·原州·長水·竹山·晉州·忠州·黃澗·懷德으로 경상도, 충청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내방이 이루어졌다.
이들 가운데 지방관 신분으로 방문한 인사들을 열거하면 靑巖察訪 呂命擧, 橫城縣監 盧思聖, 尙州牧使 李光夏·李萬元·李佰, 金山郡守 李汝岳, 昌樂察訪 李重培, 黃澗縣監 宋光浚, 永同縣監 任舜元, 淸道縣監 鄭祖甲, 善山府使 黃爾章, 沃川郡守 李選 등 인근 고을 수령들이다. 이외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은 1686년(숙종 12) 3월 26일 尋院한 護軍 丁時翰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君翊, 호는 愚潭, 아버지는 관찰사 彦璜이며, 어머니는 橫城趙氏로 직제학 正立의 딸로 남인계 가문 출신이다. 그는 평생 벼슬길을 멀리하며 강원도 원주 법천에서 李玄逸·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오직 학문에 힘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집의·성균관사업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남긴 山中日記 내 1686년 3월 26일 일기에 10대조 황희의 影幀을 참배한 뒤 "영정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만면에 화기가 가득한 것이 실로 태평시대 재상의 모습이다"라는 감회를 남겼다.
본 알묘록은 1714년 서원 승격 이전 영당 방문자들의 현황과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서원이 아님에도 상주목사를 비롯한 인근 지방관들의 발길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배향자 황희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황희의 후손들도 방문이 빈번했는데 이는 영당에 소장된 황희의 영정이 1424년(세종 6) 제작되어 가장 오래된 유일본이었기 때문에 이를 배알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를 통해서 옥동서원이 서원으로 승격받기 이전 대외 인적 네트워크 및 학맥과 인맥,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