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년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현풍현은 임진왜란 당시 倭軍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곳이었기 때문에 현풍현 향안도 이때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도 공론에 의해 임진왜란 후에 복구 된 현풍향안으로 초기 향원 현황 및 재지사족의 동향과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안은 17세기 이후
경재소가 폐지되면서
鄕廳이나 향교 또는 서원에 각 1부씩 비치하였기 때문에
도동서원에 있는 『향록』도 이러한 연유로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현풍향교에도
도동서원과 작성연대가 같은 『향록』과 『향안설립초정규등초』가 남아있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동서원 소장 향안의 총 기간은 1621년부터 1851년까지 231년간 향안 명단이다. 이중 본 자료는 1628년(인조6) 작성된 현풍의 향안으로 59명이 등재 되어 있다. 자료 명칭은 향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鄕案의 異稱인데 이 향록을 통해 당시 현풍지역 사족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좌목 구성은 본관·字號·생년간지·관직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향안 입록자 5명을 제외하고 그 성명 위에는 ‘屳’이라 부기되어 있는데 훗날 어느 시점에 향안 입록자를 상고하는 과정에서 관련자가 사망한 자를 부기한 것이다.
성씨별로 구분하면 곽씨 27명, 김씨 20명, 박씨 5명, 엄씨 5명, 鄭氏 1명, 채씨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에 대한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현풍을 대표하였던 가문으로 玄風郭氏(土姓), 瑞興金氏(金宏弼 후예)를 주축으로 이들 가문에 비해 가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도동서원 및 향안에 참여했던 淸道金氏(金仁壽 후예), 慶州·善山金氏, 密陽朴氏(朴惺 후예), 順天朴氏(朴允康 후예), 寧越嚴氏(嚴誡 후예), 平康蔡氏(蔡石堅 후예), 壽城羅氏(羅世謙 후예), 星州裵氏(裵嗣宗 후예) 등이 유력 가문들이었다. 여기 등재된 성씨들이 바로 현풍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들의 구성원 이었다.
특히 현풍곽씨와 서흥김씨는 현풍현을 대표 성관일 뿐만 아니라 성주권 首院 역할을 한 도동서원 운영을 담당했던 성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 도동서원 入院錄에도 그대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은 조선후기 서인 내지 노론 정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현풍권 사림 사회를 주도해 나갔다. 또한 실제 양성은 문벌이나 地望 뿐만 아니라 文科와 生進科 합격자 및 사환에 있어서도 여타의 가문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입록자 중 관직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郭崦의 경우 유일하게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博士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자료적 가치
본 향록은 1628년 현풍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도동서원 소장 향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작성된 향안이다. 임진왜란 이후 현풍지역의 재지사족의 동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향안 내 절대적 비중을 지닌 가문은 현풍곽씨와 서흥김씨로 양 가문의 族勢가 강했음을 알려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