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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부터 179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21.2771-20170630.Y175032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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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선생안
작성주체 향안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621
형태사항 크기: 42.7 X 30.9
수량: 66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안내정보

1621년부터 179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본 향안은 1621년부터 1791년(정조 15) 171년 기간 작성된 현풍의 향안으로 총 467명이 등재 되어 있는 명부이다. 자료 명칭은 향안(上)으로 기재되어 있고 좌목은 총23회 걸쳐 입록되어 있고 그 구성은 본관·字號·생년간지·관직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18세세기 현풍지역 사족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다. 자료내 입록자들을 성씨별로 총 정리하면 곽씨 254명, 김씨 105명, 박씨 37명, 엄씨 32명, 배씨 12명, 채씨 10명, 成氏 7명, 나씨 6명, 이씨 4명, 鄭氏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에 대한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현풍을 대표하였던 가문으로 玄風郭氏(土姓), 瑞興金氏(金宏弼 후예)를 주축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향안은 18·19세기 전후하여 향안의 성격이 변화하지만 영남지역에서는 기존의 입록 기준과 폐쇄적 성격이 잔존했는데 입록 가문의 변동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현풍향안은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621년부터 179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현풍현은 임진왜란 당시 倭軍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곳이었기 때문에 현풍현 향안도 이때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도 공론에 의해 임진왜란 후에 복구 된 현풍향안으로 초기 향원 현황 및 재지사족의 동향과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안은 17세기 이후 경재소가 폐지되면서 鄕廳이나 향교 또는 서원에 각 1부씩 비치하였기 때문에 도동서원에 있는 『향록』도 이러한 연유로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현풍향교에도 도동서원과 작성연대가 같은 『향록』과 『향안설립초정규등초』가 남아있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동서원에는 전해지고 있는 본 향안은 1621년부터 1791년(정조 15) 171년 기간 작성된 현풍의 향안으로 총 467명이 등재 되어 있는 명부이다. 자료 명칭은 향안(上)으로 기재되어 있고 좌목은 총23회 걸쳐 입록되어 있고 그 구성은 본관·字號·생년간지·관직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18세세기 현풍지역 사족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다. 본 향안을 시대별, 성씨별로 구분하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21년 작성된 첫 번째 좌목은 곽씨 27명, 김씨 20명, 박씨 5명, 엄씨 5명, 鄭氏 1명, 채씨 1명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두 번째 좌목은 천계 1년(1621) 8월의 것으로 6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김씨·박씨 각 6명씩 등재되어 있다. 세 번째 좌목은 崇情 9년(1636) 정월의 것으로 10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4명, 김씨 3명, 박씨·엄씨·나씨 각 1명씩 등재되어 있다. 네 번째 좌목은 崇情 12년(1639) 8월의 것으로 11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4명, 김씨 4명, 박씨·엄씨·나씨 각 1명씩 등재되어 있다. 다섯 번째 좌목은 1640년(인조 18) 2월의 것으로 57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33명, 김씨 12명, 박씨 6명, 엄씨 3명, 나씨 3명, 나씨 2명, 채씨 1명이 등재되어 있다. 여섯 번째 좌목은 1647년(인조 25) 9월의 것으로 19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11명, 김씨 6명, 배씨·성씨 각 1명 씩 등재되어 있다. 일곱 번째 좌목은 1651년(효종 2) 2월의 것으로 6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김씨 3명, 곽씨 1명, 나씨·이씨 각 1명 씩 등재되어 있다. 여덟 번째 좌목은 1658년(효종 9) 2월의 것으로 18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8명, 김씨4 명, 박씨 3명, 엄씨 2명, 배씨 1명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아홉 번째 좌목은 1659년(효종 10) 정월의 것으로 19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10명, 김씨 4명, 채씨 2명, 나·박·엄씨 각 1명씩 등재되어 있다. 열 번째 좌목은 1666년(현종 7) 2월의 것으로 13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9명, 김씨 3명, 박씨 1명씩 등재되어 있다. 열한 번째 좌목은 1667년(현종 8) 10월의 것으로 21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8명, 김씨 7명, 엄씨·이씨 각 2명, 박씨·채씨 각 1명씩이 등재되어 있다. 열두 번째 좌목은 1669년(현종 10) 2월의 것으로 3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김씨 2명, 곽씨 1명이 등재되어 있다.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좌목은 1673년(현종 14) 7월과 10월의 것으로 모두 24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18명, 김·엄·이씨 각 1명 씩 등재되어 있다. 열다섯 번째와 열여섯 번째 좌목은 1676년(숙종 2) 11월과 1692년(숙종 18) 2월의 것으로 2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2명이 등재되어 있다. 열일곱 번째 좌목은 1693년(숙종 19) 11월 21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14명, 김씨·엄씨 각 2명, 박씨 1명, 성씨 1명, 채씨 1명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열여덟 번째 좌목은 1694년(숙종 19) 3월의 것으로 34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23명, 김씨 5명, 박씨 3명, 배씨·엄씨·채씨 각 1명 순으로 등재되어 있다. 상기 내용을 성씨별로 총 정리하면 곽씨 254명, 김씨 105명, 박씨 37명, 엄씨 32명, 배씨 12명, 채씨 10명, 成氏 7명, 나씨 6명, 이씨 4명, 鄭氏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에 대한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현풍을 대표하였던 가문으로 玄風郭氏(土姓), 瑞興金氏(金宏弼 후예)를 주축으로 이들 가문에 비해 가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도동서원 및 향안에 참여했던 淸道金氏(金仁壽 후예), 慶州·善山金氏, 密陽朴氏(朴惺 후예), 順天朴氏(朴允康 후예), 寧越嚴氏(嚴誡 후예), 平康蔡氏(蔡石堅 후예), 壽城羅氏(羅世謙 후예), 星州裵氏(裵嗣宗 후예) 등이 유력 가문들이었다. 여기 등재된 성씨들이 바로 현풍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들의 구성원 이었다. 특히 현풍곽씨와 서흥김씨는 현풍현을 대표 성관일 뿐만 아니라 성주권 首院 역할을 한 도동서원 운영을 담당했던 성관이기도 하다. 또한 실제 양성은 문벌이나 地望 뿐만 아니라 文科와 生進科 합격자 및 사환에 있어서도 여타의 가문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양성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서인 내지 노론 정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현풍권 사림 사회를 주도해 나갔다. 일반적으로 향안은 지역차가 있기는 하나 17세기에는 그 기본적 성격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작성된 사족 명부이며, 부·모·처에 모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입록 될 수 있었던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19세기 전후하여 향안의 성격이 변화하고 재지사족의 대응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영남지역에서는 기존의 향안 성격이 잔존했는데 현풍향안도 그러한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향안이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본 향안을 분석한 결과 현풍현의 향안은 입록 가문의 변동 거의 없이 지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입록 인물 가운데에는 향안 외에도 이 시기 도동서원 入院錄과 현풍향교 교안(校案)에도 중복 입록자들이 다수가 확인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각기 문서가 독립적으로 작성·운영된 것이 아니라 모두 양반사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명부로 기능하였고 그 기반을 향권을 장악·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17세기 후반 현풍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도동서원 소장 향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작성된 향안이다. 임진왜란 이후 현풍지역의 재지사족의 동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향안 내 절대적 비중을 지닌 가문은 현풍곽씨로 이 가문의 族勢가 강했음을 알려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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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案 上
古者鄕錄雖以三鄕爲規而世降俗末未免違
規之弊或以一鄕或以二鄕無有一定之規故今
則以三鄕僉議定規鄕錄之時以二鄕薦望則
當身及薦望人竝爲削跡事
天啓元年八月 日鄕錄
郭赾
金鋏
郭再容
嚴汝愉
郭再鳴
金震起
郭宗閔
郭再恕
金進
鄭橚
金彦瑞
金震陽
金瑾
金應賢
朴壯生
郭宗善
郭再祺
郭澧
金大振
金玹
郭淨
郭㠎
郭嵅
郭崷
金應白
嚴尙志
郭峵
郭嶙
郭瀅
郭嶾
嚴尙節
金應哲
郭活
金應信
郭昌後
金應先
朴恬
郭峓
郭嶫
郭㞳
蔡雲龍
金克鳴
金應憲
郭岒
郭義藩
金克孝
金克悌
朴振立
嚴尙中
嚴士奇
金致信
郭嶰
郭揚馨
郭顔期
朴悟
郭崦
金是輝
金硡
朴慶生

天啓元年八月日
金應哲
郭岒
金應憲
朴振立
郭顔期
朴敏修

崇禎九年正月日
金克暉
郭瀏
嚴士和
郭瀜
郭弘栽
羅以賢
金大鐩
郭汝桓
裵繼緖
金處精

崇禎十二年八月日
郭惟寧
郭汝樑
金大鎔
郭守一
金處一
郭弘垣
金成暉
羅以俊
金永暉
嚴繼達
朴履謹

庚辰二月日
金善英
郭汖
郭弘章
郭克一
嚴宇俊
金玧
郭惟藩
蔡益朋
金大釴
郭弘培
朴昌徵
金大鍷
金時獻
羅以豪
郭慶章
郭弘埰
郭希周
朴弘禎
郭希顔
郭汝櫓
郭希曾
郭汝梓
朴弘祿
朴弘祚
郭愈昌
金時佐
郭泰亨
郭弘增
郭弘均
郭希點
金時哲
郭鉉
郭景義
金光斗
郭希晟
羅壽徽
郭希泰
郭希說
朴弘祥
金善元
郭希天
郭世麟
金處中
郭世鳳
郭世楗
郭世龜
郭鑌
嚴泰章
郭世構
嚴泰逸
郭泰元
郭汝樞
金硉
金大鍇
朴東奭
郭汝松
郭汝楫

丁亥九月日
成昌夏
金元龜
金大錫
金大錞
金大鑰
郭必昌
郭天民
郭希稷
郭亨昌
郭慶卓
郭鍵
郭銑
郭天逵
郭希張
金大銑
金時逸
郭晟
郭欽
裵後迪

辛卯二月日
金揚暉
金秀暉
金泰淵
李光信
羅壽昌
郭昌道

戊戌二月日
郭鋘
朴東俊
嚴泰熙
金大頀
郭泰道
金大鏶
郭元仁
郭世楷
郭昇
朴昌猷
郭好英
郭好雄
金時彦
嚴泰怡
裵後度
金光漢
朴叙揆 改名世熙
郭銶

己亥正月日
羅壽宗
郭世栻
郭鎔
蔡國禎
郭壽龜
郭昌久
郭昌垓
郭銓
郭重和
裵後垍
金光河
金時振
金斗英
郭鈒
郭暹
金斗輝
朴廷煥
郭鐮
蔡國祥

丙午二月日
郭鑑
郭炅
郭鏛
朴廷燁
金夏錫
郭壽漢
金光繼
金慶和
郭世杓
郭希賢
郭昌周
郭昌壕
郭昪

丁未十月日
郭賚之
郭峻之
郭熙之
郭泰齊
金光璧
金震龜
金命龜
金聖龜
金翼和
李泰耈
金時弼
朴廷爀
郭鏝
郭鍰
郭文濟
蔡國英
李碩耈
金斗文
嚴泰純
嚴泰裕
郭就和

己酉二月日
金斗經
金光纘
郭思齊

癸丑七月日
朴無忝
朴世杰
郭壽夏
郭壽星
郭暄
郭文海
郭彦昉
郭彦時
郭彦昶
郭壽祺
郭錂
郭松壽
金斗瞻
郭鎌
郭衛之
郭壽奎
金永蔓
郭翰世
嚴泰旻
嚴世裕
郭翰邦
郭翰國
郭昫
郭睍

戊午正月二十四日
郭文漢
金光緖
郭文潑
金光綜
郭文江
嚴支廈
嚴大廈
金光縯
郭翰時
朴世勳
郭文泗
朴震碩 改名泰錫
郭斗壽
郭壽華
郭暘
郭周萬
郭壽彦
郭星斗
金聖徵
郭壽鳳
郭文源
郭星緯
朴世文
郭宣和
郭在一
朴無必
朴世謙
金克和
郭彦明
郭壽海
金時翼

己未正月初四日
郭廷翔
郭廷賓
金聖求
金光冑
金光胤
郭廷賚

乙巳三月初一日
裵夏經
蔡時昌
成遇寅
郭晬
金聖祉
郭令之
金萬龜
嚴潤廈
金夏賢
金斗南
郭文淑
金萬澄
郭在三
郭命之
郭萬甲
郭文潝
蔡時浻
郭萬封
裵一經
郭載玄
郭壽道
郭在新
嚴以恪
嚴宗廈
郭文沂
郭文溢
金聖倫
裵漢經
金慶鳴

癸丑十月日
郭景復
郭在臨
郭來甲
郭存誼
嚴以健
裵尙祉
金萬俊
郭壽遠
成德寅
郭在升
郭景栻
郭文濤
裵尙禎
金垕慶
郭在完
郭在晋
郭在全
郭師泰
朴世偁
嚴以寬
郭壽延
郭垕
裵尙禮
金萬傑
郭文溍
郭在恒
郭在謙
郭文沄
郭東佑
郭星老
金繼憲
嚴以性
朴泰復
郭存吾

丙辰十一月日
郭景斗

壬申二月日
郭東弼

癸酉十一月日
嚴繼光
郭昌周
蔡時郁
郭嶷
郭師賢
朴奎
成迪寅
郭木+厚
郭在咸
嚴以節
金孝敦
郭峋
郭圻朝
郭東翊
郭命德
郭景杞
郭處寬
郭慶裕
金夏一
郭安朝
郭顯九

甲戌三月二十九日
郭東一
金萬輝
郭師尹
蔡時成
郭師尙
成㵓
朴泰信
金夏珩
郭處完
郭最垕
郭基玄
郭海朝
郭景憲
郭師閔
郭景栢
郭景梓
郭處定
郭東翰
郭在心
郭師惇
金孝曾
郭龜朝
朴堡
郭潤瑞
裵尙祿
朴之欽
郭慶一
郭慶國
金萬光
郭存勗
郭處大
金夏九
郭鼎九
郭興朝
嚴孝光

己丑十月十一日
郭在七
金繼遠
嚴景光
朴之錝
郭景龜
郭在東
郭景卨
郭龍朝
郭濂
郭弼世
嚴再光
郭潤九
郭重國
裵尙祚
朴之鎔
郭處華
郭景權
郭涵
郭慶弘
嚴應光
郭慶遠
郭相垕
金澯
郭熙朝
朴之秀
嚴坤
金禹圭
金南圭
郭弼禹
成洙
成彦標
郭最堅
郭漢相
郭昌度
郭夢九
嚴圭
金弘老

辛亥三月十二日
金鼎濟
郭利九
郭弼唐
蔡達後
郭弼檀
朴之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