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621년부터 165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1621.2771-20170630.Y1750320029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선생안
작성주체 향안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작성시기 1621
형태사항 크기: 40 X 30
수량: 2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현소장처: 대구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안내정보

1621년부터 165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본 자료는 1621년(광해 13)부터 1651년(효종 2) 31년 동안 작성된 현풍의 향안으로 6차례에 거쳐 입록되었으며 총109명이 등재 되어 있다. 총 성씨별로 정리하면 곽씨 55명, 김씨 30명, 박씨 9명, 엄씨·나씨 각 5명, 배씨 2명, 성씨·이씨·채씨 각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은 조선시대 현풍을 대표하였던 가문으로 玄風郭氏(土姓), 瑞興金氏(金宏弼 후예)를 주축으로 이들 가문에 비해 가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도동서원 및 향안에 참여했던 淸道金氏(金仁壽 후예), 慶州·善山金氏, 密陽朴氏(朴惺 후예), 順天朴氏(朴允康 후예), 寧越嚴氏(嚴誡 후예), 平康蔡氏(蔡石堅 후예), 壽城羅氏(羅世謙 후예), 星州裵氏(裵嗣宗 후예) 등이 유력 가문들이었다. 여기 등재된 성씨들이 바로 현풍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들의 구성원 이었다. 본 향안은 17세기 초·중반1628년 현풍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621년부터 1651년까지 작성된 현풍현(玄風縣)의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현풍현은 임진왜란 당시 倭軍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곳이었기 때문에 현풍현 향안도 이때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 된 향안들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는데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추진되는 추세였다. 본 향안도 공론에 의해 임진왜란 후에 복구 된 현풍향안으로 초기 향원 현황 및 재지사족의 동향과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안은 17세기 이후 경재소가 폐지되면서 鄕廳이나 향교 또는 서원에 각 1부씩 비치하였기 때문에 도동서원에 있는 『향록』도 이러한 연유로 이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현풍향교에도 도동서원과 작성연대가 같은 『향록』과 『향안설립초정규등초』가 남아있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동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향안의 총 기간은 1621년부터 1851년까지 231년간 향안 명단이다. 이중 본 자료는 1621년(광해 13)부터 1651년(효종 2) 31년 동안 작성된 현풍의 향안으로 총 109명이 등재 되어 있다. 자료 명칭은 향안으로 기재되어 있고 좌목은 총6회 걸쳐 입록되어 있고 그 구성은 본관·字號·생년간지·관직 등에 관한 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7세 초·중반 현풍지역 사족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좌목은 천계 1년(1621) 8월의 것으로 6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김씨·박씨 각 6명씩 등재되어 있다. 두 번째 좌목은 崇情 9년(1636) 정월의 것으로 10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4명, 김씨 3명, 박씨·엄씨·나씨 각 1명씩 등재되어 있다. 세 번째 좌목은 崇情 12년(1639) 8월의 것으로 11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4명, 김씨 4명, 박씨·엄씨·나씨 각 1명씩 등재되어 있다. 네 번째 좌목은 1640년(인조 18) 2월의 것으로 57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33명, 김씨 12명, 박씨 6명, 엄씨 3명, 나씨 3명, 나씨 2명, 채씨 1명이 등재되어 있다. 다섯 번째 좌목은 1647년(인조 25) 9월의 것으로 19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곽씨 11명, 김씨 6명, 배씨·성씨 각 1명 씩 등재되어 있다. 여섯 번째 좌목은 1651년(효종 2) 2월의 것으로 6명의 입록자 성씨를 보면 김씨 3명, 곽씨 1명, 나씨·이씨 각 1명 씩 등재되어 있다. 총 성씨별로 정리하면 곽씨 55명, 김씨 30명, 박씨 9명, 엄씨·나씨 각 5명, 배씨 2명, 성씨·이씨·채씨 각 1명 순이다. 이들 성씨들에 대한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현풍을 대표하였던 가문으로 玄風郭氏(土姓), 瑞興金氏(金宏弼 후예)를 주축으로 이들 가문에 비해 가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도동서원 및 향안에 참여했던 淸道金氏(金仁壽 후예), 慶州·善山金氏, 密陽朴氏(朴惺 후예), 順天朴氏(朴允康 후예), 寧越嚴氏(嚴誡 후예), 平康蔡氏(蔡石堅 후예), 壽城羅氏(羅世謙 후예), 星州裵氏(裵嗣宗 후예) 등이 유력 가문들이었다. 여기 등재된 성씨들이 바로 현풍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들의 구성원 이었다. 특히 현풍곽씨와 서흥김씨는 현풍현을 대표 성관일 뿐만 아니라 성주권 首院 역할을 한 도동서원 운영을 담당했던 성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 도동서원 入院錄에도 그대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며, 나아가 이들은 조선후기 서인 내지 노론 정권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현풍권 사림 사회를 주도해 나갔다. 또한 실제 양성은 문벌이나 地望 뿐만 아니라 文科와 生進科 합격자 및 사환에 있어서도 여타의 가문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자료적 가치
본 향안은 17세기 초·중반 현풍지역 사족들의 인적구성과 성씨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도동서원 소장 향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작성된 향안이다. 임진왜란 이후 현풍지역의 재지사족의 동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향안 내 절대적 비중을 지닌 가문은 현풍곽씨와 서흥김씨로 양 가문의 族勢가 강했음을 알려준다.
『道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7
『朝鮮後期 書院硏究』,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鄕案
天啓元年八月日
金應哲
郭岒
金應憲
朴振立
郭顔期
朴敏修

崇禎九年正月日
金克暉
郭瀏
嚴士和

郭瀜
郭弘栽
羅以賢
金大鐩
郭汝桓
裵繼緖
金處精

崇禎十二年八月日
郭惟寧
郭汝樑
金大鎔
郭守一
金處一
郭弘哉
金成暉
羅以俊
金永暉
嚴繼達
朴履謹

庚辰二月日
金善英
郭汖
郭弘章
郭克一
嚴宇俊
金玧
郭惟藩
蔡益朋
金大釴
郭弘培
朴昌徵
金大鍷
金時獻
羅以豪
郭慶章
郭弘埰
郭希周
朴弘禎
郭希顔
郭汝櫓
郭希曾
郭汝梓
朴弘祿
朴弘祚
郭愈昌
金時佐
郭泰亨
郭弘增
郭弘均
郭希點
金時哲
郭鉉
郭景義
金光斗
郭希晟
羅壽徽
郭希泰
郭希說
朴弘祥
金善元
郭希天
郭世麟
金處中
郭世鳳
郭世楗
郭世龜
郭鑌
嚴泰章
郭世構
嚴泰逸
郭泰元
郭汝樞
金硉
金大鍇
朴東奭
郭汝松
郭汝楫

丁亥九月日
成昌夏
金元龜
金大錫
金大錞
金大鑰
郭必昌
郭天民
郭希稷
郭亨昌
郭慶卓
郭鍵
郭銑
郭天逵
郭希張
金大銑
金時逸
郭晟
郭欽
裵後迪

辛卯二月日
金揚暉
金秀輝
金泰淵
李光信
羅壽昌
郭昌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