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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11월부터 경자년 12월까지의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분향록(焚香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G.0000.4725-20170630.Y175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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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옥동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형태사항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안내정보

정유년 11월부터 경자년 12월까지의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분향록(焚香錄)
정유년 11월부터 경자년 12월까지 총 36회의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삭망제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원장과 재임, 유생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황씨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1~2명의 재임과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성관의 분포로 보아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중복적으로 기재된 것을 보이고 있는데,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고 31명의 주요 주관인물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황씨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김·노·이씨 각 2명, 손씨 1명이 등장한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윤정식

상세정보

정유년 11월부터 경자년 12월까지의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분향록(焚香錄)
자료의 내용
丁酉年 11월부터 庚子年 12월까지 총 36회의 玉洞書院에서 거행된 朔望際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焚香錄〉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원장과 재임, 유생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黃氏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립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祭享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상대적으로 제향을 통한 선현 숭배의 기능이 크게 강조되었다.
넓은 의미로서의 書院의 享禮는 사림의 공론에 의해 결정되고 국가에 의해 인준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더불어 향례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유교문화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참여 자체가 자신의 유교적 소양을 대외적으로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서원의 제례의식은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士林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현전하고 있는 옥동서원 관련 자료에는 제례와 관계되는 자료는 드문 형편이다. 따라서 분향을 비롯한 여러 제례의 절차나 형식, 내용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으나 다만 본 문서를 비롯한 수십여 焚香錄을 통해 삭망분향시의 참여 인원에 대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삭망분향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그 달의 한 가운데 날인 보름날에 향을 피워 올리는 비교적 간단한 의례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1~2명의 齋任과 儒生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성관의 분포로 보아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중복적으로 기재된 것을 보이고 있는데,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고 31명의 주요 주관인물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黃氏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金·盧·李氏 각 2명, 孫氏 1명이 등장한다. 옥동서원은 1789년(정조 13)에 사액을 받았는데 이후 상주목의 도남서원과 흥암서원과 함께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다양한 가문들이 서원 운영에 참가하기 시작하였고, 본 문서에 드러나는 여러 성씨들의 참여도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수적인 면에 있어 미비해 당시까지도 상주 사림들의 옥동서원에 대한 출입이 저조한 것이 나타나는데 이는 특정 당색을 표방하지 않고 있던 옥동서원을 문중서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제한적이라는 데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회에서 享祀를 비롯한 유교적 의례 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관계와 경계를 설정하고 형성하는 중요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대내외적으로 향사에 참여하는 행위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으며, 그 지역사회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선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주요한 척도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옥동서원 소장 성책류 중 삭망분향의 주관자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 서원 운영의 주요 성관의 분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사립 교육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향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건립 초기에는 인재양성과 학문연구라는 교육적 기능이 우선하였지만, 점차 先儒 향사와 지역 사회의 교화적 기능이 중시되어갔다. 더불어 서원이 지역별, 학맥별로 유대를 강화해 가면서 그 상징적 제향인물에 대한 제례의식과 기능이 점차 증대되어 갔다. 본 문서는 서원의 祭享儀式이 명맥을 유지하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의 원임과 원생의 인적구성의 단면을 보여주고, 상주 지역에서 옥동서원에 참여하는 이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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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
戊戌
己亥
庚子
焚香錄
十一月朔焚
香齋任 黃弼老
望焚
香齋任 孫石立
黃弼老
十二月朔焚
香儒生 黃景老
望焚
香齋任 黃弼老
香儒生 黃正老
望焚
香齋任 盧性大
十月朔焚
香齋任 李圭夏
望焚
香儒生 黃敎雨
十一月朔焚
香儒生 黃敬雨
望焚
香儒生 黃震老
十二月朔焚
香儒生 盧性道
望焚
香齋任 盧性大
庚子正月初五日焚
香院長 黃益鉉
齋任 李圭夏
金揚壽
黃淳老
黃昇鉉
黃浩善
黃昶凞
黃範凞
黃述老
黃奎鉉
黃大鉉
金韺壽
李以疇
黃源善
黃延老 侍行
黃敎雨 侍行
黃正老
黃肇雨
黃景老
黃弼老
黃徹雨 侍行
望焚
香儒生 黃述老
二月朔焚
香儒生 黃肇雨
望焚
香儒生 黃延老
三月朔焚
香儒生 黃敬雨
望焚
香儒生 黃敎雨
四月朔焚
香齋任 黃弼老
望焚
香齋任 黃弼老
五月朔焚
香齋任 黃弼老
望焚
香齋任 黃弼老
六月朔焚
香儒生 黃敎雨
望焚
香齋任 黃弼老
七月朔焚
香齋任 黃弼老
望焚
香齋任 黃弼老
八月朔焚
香儒生 黃延老
望焚
香儒生 黃敬雨
九月朔焚
香齋任 黃得雨
望焚
香儒生 黃綸老
十月朔焚
香齋任 黃得雨
望焚
香儒生 黃徹雨
十一月朔焚
香儒生 黃敬雨
望焚
香儒生 黃徹雨
十二月朔焚
香儒生 黃徹雨
望焚
香儒生 黃仁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