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년 3월부터 기묘년 10월까지의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옥동서원(玉洞書院) 분향록(焚香錄)
자료의 내용
19세기 후반 경인 庚午年 3월부터 己卯年 10월까지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삭망제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院長과 齋任, 儒生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황씨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尙州牧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립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祭享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상대적으로 제향을 통한 선현 숭배의 기능이 크게 강조되었다.
넓은 의미로서의 서원의 향례는 사림의 공론에 의해 결정되고 국가에 의해 인준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더불어 향례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유교문화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참여 자체가 자신의 유교적 소양을 대외적으로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서원의 제례의식은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현전하고 있는 옥동서원 관련 자료에는 제례와 관계되는 자료는 드문 형편이다. 따라서 분향을 비롯한 여러 제례의 절차나 형식, 내용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으나 다만 본 문서를 비롯한 수십여 焚香錄을 통해 삭망분향시의 참여 인원에 대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삭망분향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그 달의 한 가운데 날인 보름날에 향을 피워 올리는 비교적 간단한 의례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재임과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성관의 분포로 보아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10년 동안의 기간 중 경오, 기묘 2개년의 기록만을 성책한 것으로 경오년 3월, 10월부터 12월까지 8회, 기묘년 정월부터 10월까지 19회 등 총 27회의 삭망분향시의 주관자들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신미년부터 무인년까지 누락된 해의 사정에 관한 별도의 기록은 없다. 다만 옥동서원 소장 여타의 인명관련 기록들을 통해서 대략 19세기 후반 경에 시행된 삭망분향에 참여한 인물들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중복적으로 기재된 것을 보이고 있는데,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황씨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옥동서원은 1789년(정조 13)에 사액을 받았는데 이후 상주목의 도남서원과 흥암서원과 함께 관내를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다양한 가문들이 서원 운영에 참가하기 시작하였고, 본 문서에 드러나는 여러 성씨들의 참여도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회에서 향사를 비롯한 유교적 의례 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관계와 경계를 설정하고 형성하는 중요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대내외적으로 향사에 참여하는 행위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으며, 그 지역사회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선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주요한 척도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문서가 작성될 19세기 후반에 옥동서원의 삭망분향례를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보여주는 문서이다. 이를 통해 당시 옥동서원의 실질적 운영주체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분향이라는 유교적 의례행위가 가진 사회적 관계설정 및 개개인의 지위를 드러내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윤정식